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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취재뒷얘기 시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고 느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시민기자 여러분의 자발적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2010년 11월 20일 오후 4시 20분경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결의대회 도중 현대차 하청업체 드림산업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황인화(당시 34)씨가 "대법 판결 이행" 등을 요구하며 무대 위로 뛰어올라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무대 밑으로 떨어진 순간. 그는 현재 건강을 되찾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잇다
 2010년 11월 20일 오후 4시 20분경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결의대회 도중 현대차 하청업체 드림산업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 황인화(당시 34)씨가 "대법 판결 이행" 등을 요구하며 무대 위로 뛰어올라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무대 밑으로 떨어진 순간. 그는 현재 건강을 되찾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잇다
ⓒ 현대차비정규직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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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판결이었다.

2013년 10월 10일 울산지법 제4민사부는 지난 2010년 공장점거 농성과 관련, 현대자동차 측이 금속노조 현대차 비정규직지회(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조합원 28명을 상대로 제기한 손배소송에서 "11명이 20억 원을 연대해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울산지법은 특히 지난 2010년 공장 점거농성에 대해 "지회의 쟁의행위는 적법하지 않다"며 "정규직으로 간주된 최병승씨의 대법원 판결도 다른 조합원에게 일괄 적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런 울산지법 판결은 지난 2010년과 2012년 대법원이 최병승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의 대표소송에서 잇따라 내린 "같은 라인에서 작업을 하고 원청에서 작업지시를 받기에 정규직 대상이 맞다"고 한 판결과 상충된다.

가까이서 목격한 분신

특히 현대차가 이 소송을 포함해 비정규직을 상대로 한 전체 손배소는 16건, 청구금액은 173억 원에 달한다. 이번 판결은 궁지에 몰린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를 극한의 벼랑끝으로 내모는 격이다.

또 이 판결로 지난 2010년 공장점거 농성 과정에서 발생한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신 시도, 천의봉·최병승 조합원이 벌인 296일간 철탑농성은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현대자동차는 1997년 IMF 이후,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그후 경기가 회복되자 회사 측은 정리해고한 정규직의 자리를 하청업체 노동자로 채웠다.

같은 공장에서, 같은 작업지시서에 따라, 같은 일을 하지만 임금과 처우가 정규직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현대차 비정규직들은 2003년 노조를 결성했다. 이들은 2004년 노동부가 현대차 공장 대부분 공정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리자 본격적인 정규직 전환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노조 일에 앞장선 이들에게 돌아온 건 해고와 구속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업과 소송 등을 진행했다. 소송이 시작된 지 8년 만인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최병승씨에 대해 정규직 인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비정규직노조 가입률이 높은 한 하청업체는 폐업을 단행하기도 했다.

2010년 11월 15일의 일이다. 이날 노사는 물리적으로 대치했고, 경찰이 투입돼 한동안 울산에서 자취를 감춘 최루액이 분사되기도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현대차 울산1공장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 200여 명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25일간 농성을 이어갔다.

2010년 11월 현대차 울산1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던 비정규직들이 농성 현장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2010년 11월 현대차 울산1공장에서 농성을 벌이던 비정규직들이 농성 현장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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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점거 농성이 시작된 지 5일째 되던 2010년 11월 20일, 민주노총은 오후 3시부터 '민주노총 영남권 결의대회'를 열었다. 나는 이 현장을 취재했다.

결의대회가 무르익던 오후 4시 20분께,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 앞에 마련된 임시무대 위로 갑자기 한 남성이 뛰어올라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불은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졌고, 남성은 무대 밑으로 떨어졌다.

당시 나는 무대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서 민주노총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급히 무대쪽으로 달려가니 주위에 있던 집회 참가자가 이미 불을 끈 뒤였다. 사람들은 분신자의 옷을 벗기는 등 응급조치를 했다. 이후 그는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

분신한 사람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황인화(당시 34)씨. 그는 현대차 하청업체인 드림산업 소속으로 일했다. 그는 11월 15일 공장점거 때 조합원들과 함께 농성을 시작한 후 노모가 아프다는 소식에 17일 아침 공장을 나왔다. 이후 회사 측의 저지로 다시 농성 현장에 합류하지 못해 갈등을 겼었다. 3일 뒤인 20일 오후, 그는 분신을 선택했다. 

황씨는 얼굴과 목, 가슴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전해졌다. 이후 나의 머리에서는 '왜 분신을 택했을까. 분신을 결정하기까지 심적인 갈등은 어떠했으며, 그 후의 고통을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분신하면 얼마나 아플까?

분신 다음날인 2010년 11월 21일, 병원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한 비정규직 조합원과 전화통화를 했다. 아들 소식을 듣고 황씨의 모친이 병원으로 달려온 날이다.

동료에 따르면 그날 황씨는 "엄마 걱정하지 마. 협상한다고 농성 풀면 안 돼. 6개월 농성하면 우리가 이긴다"며 "농성장이 너무 추우니 침낭 꼭 넣어 줘"라고 노모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황씨는 "친구들이 보고 싶다. 농성장을 꼭 지켜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후 황씨의 분신은 많은 이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그의 분신에도 현대차 비정규직들은 정규직 전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회사 측이 제안한 "비정규직 모두 정규직 전환이 아닌, 3000명 신규 채용"을 두고 비정규직은 분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황씨의 분신 시도 2년 5개월 뒤인 2013년 4월 16일 오후 3시, 이번엔 기아차 광주공장 비정규직노조 김아무개(36) 조직부장이 역시 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했다. 급히 <오마이뉴스>에 관련 기사를 송고하는데, 문득 황인화씨가 생각났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었던 그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동안 품어왔던 궁금증도 풀고 싶었다. 한편으론 '그날의 악몽을 되살리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도 앞섰다.

많이 우려했지만 황씨는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2013년 4월 17일, 황씨를 만났다. 예상과 달리 화상 흔적은 많이 남지 않았다. 그는 밝고 쾌활했다. 특히 그는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여자친구, 장모가 될 분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여자친구가 볼에 뽀뽀를 하자 익살스런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분신할 당시 겁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10년간 싸우는 동안 회사가 얼마나 독한지를 알기에, 내가 선택할 길은 분신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분신할 때 그 아픔은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며 "뼛속까지 파고드는 아픔이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청년인 그는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한다. 지금 마음도 분신할 때와 똑같다. 정규직과 똑같이 일하는 비정규직이 왜 차별을 받아야 하나"라며 "차별은 사람의 존엄성마저 파괴한다"고 분신 시도 이유를 밝혔다. 그는 짦은 만남을 뒤로한 채 다시 일터로 향했다.

2012년 10월 27일 낮 12시경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우상수 사무차장이 철탑 위 두 조합원에게 밥과 배터리를 올리고 있다
 2012년 10월 27일 낮 12시경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우상수 사무차장이 철탑 위 두 조합원에게 밥과 배터리를 올리고 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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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황씨의 분신 시도는 시나브로 잊혔고, 현대차 비정규직은 여러 경로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2012년 10월 17일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조합원 두 명이 현대차 울산공장 명촌정문 쪽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이 시작된 지 10일 후인 2012년 10월 27일 오전, 철탑으로 향했다. 솔직히 30m 철탑 위에서 어떻게 식사하고 씻는지,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잊을 수 없는 천의봉·천의봉의 여름

그날따라 비가 내렸다. 철탑에서는 '웅'하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철탑 밑에서 위를 쳐다보며 31살의 천의봉씨와 전화통화를 했다.

시골에서 자란 천씨는, 아직도 고향에서 농사 짓는 홀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어릴 적 시골 냇가에서 전기로 물고기를 잡다 감전된 경험 때문에 지금도 '감전 트라우마'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15만4000볼트 고압이 흐르는 송전탑 위에서 농성을 했다. 

천의봉씨는 "추위, 배고픔, 쓸쓸함은 참을 수 있는데, 생리현상 해결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특히 철탑농성장은 전국적 이슈가 되면서 많은 눈길을 받았다. 당연히 철탑 위에서 엉덩이 드러낸 채 배변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천씨는 "대변은 검은 비닐에 싼 후 봉합해 옆 공터로 던진다"고 말했다. 목숨 걸고 철탑에 올랐지만 차마 동료들에게 '그것'까지 맡기기는 미안하다고 했다. 천씨는 통화 말미에 대뜸 "형님, 내려가면 술 한잔 사 주세요"라고 말했다.

춥지 않은 겨울이 있겠냐마는, 지난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특히 현대차 철탑농성장은 바다·강과 가까워 바람이 매섭다. 두 비정규직 조합원은 그런 겨울을 넘기고 여름을 맞았다. '울산 기온 40도' 라는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지난 8월 8일 두 조합원은 농성을 마쳤다.

2013년 8월 8일 철탑을 내려오기 전, 천씨는 전화통화에서 "겨울엔 여름이, 여름엔 겨울이 낫다고들 하지만, 나는 겨울 두 번 지내는 것이 여름 한 번 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폭염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갔다.

분신과 철탑농성도 마다않고 세상에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한 현대차 비정규직. 하지만 최근 울산지법이 내린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은 그들의 호소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태그:#현대차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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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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