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항상 싸울까? 국가의 큰 일을 하는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회사나 집, 학교에서 싸우는 모습을 끊임없이 본다. 싸우는 이유는 그렇다 치고 왜 싸움이 멈추지 않는 걸까? 다른 데서 찾는 것보다 나 스스로의 경험에서 찾는 게 가장 빠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싸워본 경험이 있으니까.
얼마 전 도서관에 갔다가 도서 대출을 거절 당했다. 오랫 동안 책을 빌리던 곳이었기 때문에 상심이 컸다. 얼마 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행정구역이 바뀌었기 때문에 대출이 안 된다는 것이다. 도서관 사서의 대응이 무척 차가워서 나는 그만 화를 내고 말았다. 그 순간 도서관 이용자로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상처와 사람들 앞에서 면박당하며 느낀 수치심 때문이다.
가끔 부부싸움을 했던 일도 되돌아보면 마찬가지였다. 설거지를 했을 때 뒤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잔소리를 들을 때, 별 것 아닌 문제에 대해서 부당하게 바가지를 긁힌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화를 내는 사건들의 공통점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화를 내는 나의 모습을 인지할 수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싸움이 커졌을 때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 화를 내는 그 순간 이해가 된다면 어떨까? '디퓨징(defusing)', 즉 이성적인 뇌를 이용하여 분노를 현명하게 해체하는 방식을 통해서 시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전임 강사이자 정신과 전문의 조렙 슈랜드와 리 디바인(의학 전문 저널리스트)의 <디퓨징>은 영어의 뜻처럼 '분노'를 둘러싼 각종 상황과 두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하여 원인을 밝혀 내고, 실제로 분노 상황이 펼쳐졌을 때 내키는 대로 표출하지 않고 평화롭게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분노를 키우는 세 가지 폭탄 <디퓨징>을 읽으면, 우리가 왜 고고학과 천문학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당장 내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참고하는 것은 바로 역사다. 하지만 역사는 기껏 해야 1만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형성된 것이다. 반면 우리 두뇌는 수백만 년 전부터 다듬어져 온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본능'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화를 내는 순간, 최신식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인간에서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원시인으로 돌변한다.
화를 내면 뇌간과 변연계가 두뇌를 지배하게 되는데, 철저히 본능에 휘둘리게 된다. 평상시에는 문명인이었다가 화를 내는 순간 원시인으로 바뀐다고 생각하니 인간의 찬란한 문명이 애석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아울러 우리 원시인 할아버지들이 얼마나 공포스런 환경에서 살았기에 후손들의 두뇌에 지침을 새겨넣은 것일까? 문제는 찬란한 문명 역시 본능에 휘둘린다는 점이다. 인류의 비극인 크고 작은 전쟁의 경우, 발발 이유는 다를지언정 분노·질투·의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국내에서도 '올해 최고의 영화'로 회자되었던 <더 헌트>(2012)는 평범한 유치원 교사가 아이의 사소한 거짓말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이야기다. <디퓨징>은 면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인간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세 가지 범주를 밝혀냈다. 그것은 자산·영역·관계다. 쉽게 말하면 먹을 것·집·친구다. 이 중에서 한 가지라도 침해를 당하면 화가 나는데, 세 가지 전부 해당하면 분노가 무섭게 타오르기 쉽다.
<더 헌트>의 주인공은 성추행 의혹 때문에 다니던 유치원에서 쫓겨났고(자산), 슈퍼마켓에도 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팔매가 날아오는 등 공동체에서 사실상 추방되었다(영역). 그리고 평생 우정을 쌓아오던 친구의 유치원생 딸과 추문이 생겼기 때문에 역시 친구도 잃게 되었다(관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하고 속이 막힌 것 같은 기분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역시 세 가지 범주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화가 났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자세한 과정을 볼 수 있었던 <디퓨징>이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분노를 하나씩 잘게 쪼개 해체하기 위해서는 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알아야 한다. 특히 두뇌의 세 가지 중심 부위인 뇌간, 변연계, 전전두엽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인간의 뇌에서 가장 먼저 발달한 뇌간(腦幹), 이른바 파충류의 뇌라고 불리는 부위는 심장박동과 호흡 등 생존과 진화 전반을 관장한다. 뇌간이 신체에서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이해가 간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기 때문이다. 뇌간 바로 옆에 위치한 변연계는 포유류의 뇌라고도 불린다. 좌우로 편도체를 거느리고 있으며, 충동과 기억, 일곱 가지 기본 감정인 화·경멸·공포·혐오감·기쁨·슬픔·놀람을 관장한다. 이 감정들은 짜증과 분노부터 우울·회한·죄책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의 기초가 된다. 변연계는 각 상황에 맞게 감정 신호를 보냄으로써 뇌간의 생존 활동을 보좌한다. 여기까지는 '동물'로서 인간의 두뇌다.
<디퓨징>의 주인공이자 분노를 다스리는 귀재인 '전전두엽'은 책에서는 '경찰관'으로 묘사된다. 전전두엽이 분노반응을 알아보고, 감시하고, 조절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산·영역·관계의 세 가지 범주와 뇌간·변연계·전전두엽의 조합관 관계 안에서 분노 상황이 발생한다는 게 책의 핵심적인 내용인데, 타깃을 정확히 파악했으니 각각의 대처 방법에 대해서 정확히 제안할 수 있다. 이 점이 <디퓨징>의 가장 큰 미덕이었다.
예컨대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산·영역·관계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무장을 해제하거나 안심을 시킬 수 있다. 또 화가 나는 것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자세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내가 위협을 가했는지 헤아려 보고 그 사람이 중시하는 것에 대해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화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누군가가 화를 낼 때, 그 다음 상황이 무척 중요하다는 말이다. 화에 대해서 부정할 때 화는 폭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존중하는 순간 화는 개미처럼 작아진다. 이것이 바로 전전두엽이 부리는 마술이다.
<디퓨징>의 저자에게 느껴지는 애정심리학 관련 책과 과학 교양 서적을 읽으면 특히 기억에 남는 책도 있고 아쉬움이 드는 책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사회심리학자 티모시 윌슨의 <스토리>(웅진지식하우스)와 <협력의 진화>(시스테마)였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는 <협력의 유전자>의 추천사를 자처하며 "나는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해 흥분에 휩싸여 읽었으며, 이 책의 전도사라도 된 듯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읽으라고 권하였다"고 고백하고서 "세계의 지도자들을 모두 가두어 놓고 이 책을 준 다음 다 읽을 때까지 풀어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 개인에게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썼다.
과학자의 인류애가 충만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심리학자 또는 과학자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과 열정을 세상에 바쳤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끊이지 않는 싸움, 그리고 불행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과학과 심리학의 소재로 해결하려는 '담대한 도전'을 품은 책들이다.
나는 <디퓨징>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 경제학 분야에서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나 폴 크루그먼, 장하준의 책들에서 동일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인 자연과학과 경제학, 심리학 등의 전문 영역을 다룬 책들의 저자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과시하거나 순수한 호기심을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심리학과 뇌 과학 분야의 책들은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게 되고, 표현 방법 자체도 철학자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상처를 주고, 분노를 삭이는 아비규환 같은 현상이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지를 밝히는 것은 이미 철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화'와 관련한 심리학 저술의 경우, 예전에는 재빨리 탈출해야 할 대상으로서 '분노'를 상정했다. 그러나 <디퓨징>은 분노가 인류의 원시인 할아버지 때부터 가져왔던 생존 기술이었다는 점을 명시하면서 존중하고 있었다.
저자가 함께 다룬 주제 중에서 페이스북의 문제와 인터넷 익명성의 문제, 그리고 육아와 관련된 문제는 관심을 끌었다. 페이스북에 표시한 모호한 정보 때문에 연인들의 관계가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는 실험 결과를 보면 문명과 본능이 얼마나 혼재돼 있는지 알 수 있다.
<협력의 진화>의 핵심 주제와 맥이 닿는 '스페인의 도로 위의 다툼' 실험 결과(55쪽)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가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눌 때 악플은 사라지지만 다시 만날 일이 없거나 익명의 상태에 있을 때는 부지불식간에 분노가 배설된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로서 아이와 전전두엽의 관계는 주목을 끌었다. 아기는 태어나고 몇 시간 만에 변연계가 생성되기 때문에 화를 금방 눈치챌 수 있지만, 전전두엽은 태어난 지 18개월만에 생성되며 성인이 될 때까지 미완성 상태로 있기 때문에 느닷없이 짜증을 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게된 뒤 반성하게 됐다. 뜻한 대로 되지 않고 기분이 안 좋을 때 아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공감이 되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나는 아이들이 화를 낼 때 억누르라고만 했으니 무척 부끄럽다.
사람이 화를 내는 모습은 마치 불길이 번지는 것과 같은데, 불길을 순식간에 얌전하게 만드는 모습은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현란하게 보인다. <디퓨징>의 저자가 말하는 비밀은 공감, 신뢰, 존중에 있었다. 그것은 감정을 관장하는 변연계가 전전두엽과 끊임없이 소통을 하는 밀월관계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에 토대를 두는 해법이다. 저자의 한마디가 <디퓨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했던 일은 마법이 아니다. 단순히 그를 존중했을 뿐이다. - <디퓨징> 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