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형식의 서평을 쓰고 싶었다. 생각 끝에 여러 명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수다를 떨어보기로 했다. 한 권의 책에서 다양한 의견이 가지를 치면서 끊임없이 확장되는, 내용의 새로움까지 담기는 기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책수다'를 시작한다. 김경훈, 박현진, 이규정 시민기자가 함께 쓰는 이 기사는 2주에 하나씩 연재된다. - 기자말.
박현진(아래 박) : "청년이 20대 내내 분투하더라도, 취업하기 어려운 시기잖아. 사회에서 내버려진 듯한 절망에 사로잡힐 정도로 말이야. 공인영어점수니, 봉사활동이니, 대외활동이니 분명 열심히 하는데, '내 자리'는 없거든.
인터넷 공간에서 그 절망으로 '병맛' '일베' 따위를 만들어내고, 그걸 즐기는 이들도 나타났어. 그들은 스스로를 향해 거리낌 없이 '잉여'라고 부르지. 어느새 잉여는 청년의 또 다른 이름이 됐어. 청년이 사회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 이른바 '청년 문제'의 본질일 거야.
최태섭이 쓴 책 <잉여사회>(웅진지식하우스 펴냄)는 청년을 잉여로 만들어버린 한국사회와 잉여의 살아가는 모습을 담았어. 전반부에서는 잉여가 등장하게 된 구조적 원인을 고민하고, 후반부에서는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잉여가 만들어낸 현상들을 소개하지. 무엇보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잉여'가 바로 우리 이야기잖아. 다들 <잉여사회>가 남 이야기 같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읽었어?"
김경훈(아래 김) : "일단 나도 한 명의 잉여로서 많이 공감이 됐어.(웃음) 취업준비생으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난 뭐 하고 살았나', '난 필요 없는 존재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23쪽)인 자기소개서를 쓸 때의 당혹스러움도 많이 공감이 됐고.
<잉여사회>는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를 풍미한 '청년 담론' 연장선에 있다고 봐. 2007년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은 커졌지만 정작 청년이 겪고 있는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어. 20~30대 일부가 신문지면에 '청년 논객'으로 글을 쓰고, 국회까지 나아가 '금배지'도 달았지만, 일반적인 청년의 삶이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잖아."
넘쳐나지만 왜곡된 '청년 담론'... 공허한 자기계발서 열풍
이규정(아래 이) : "그건 지금 청년이 과거와 양상이 크게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아. 예를 하나 들어볼까? '386세대'에게는 정치적 민주화 쟁취라는 세대적 단일 목표가 있었잖아. 목표가 분명하니까, 대응도 분명한 거지. 근데 지금은 청년마다 사는 모습도, 추구하는 목표도 동일하지 않잖아. 한쪽에서는 삼성에 입사하려 'SSAT'를 붙잡고, 한쪽에서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잖아. 세대의 응집력이 없으니까, 세대론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지."
박 : "청년 담론이 현실에서 왜곡된 경우도 많지 않나? 저자도 '결국 만들어진 것은 어른들의 은혜로운 배려에 의해 발언권을 얻은 20대'(35쪽)일 뿐이라고 꼬집잖아. 예를 들어 청년을 위해서 청년비례대표를 국회로 보냈다고 하는데…. 청년이 청년비례대표를 뽑았나? 청년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 대다수 청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긴 어려웠지. 사실 관심이 없기도 했고. 청년에게 '저들이 내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냉정하게 보면 그 '대표'들은 각 정당에서 '간택'된 인물들이잖아. 청년이 청년비례대표를 자신의 대변자로 여기기 힘들 수밖에 없어. 오히려 기득권층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그들에게 불리하지 않은 방향에서 '우리는 청년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아'라며 생색만 내는 방법이 돼버렸지."
김 :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어. 지금은 좀 꺾였지만 자기 계발서 열풍이야. 난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서 위로받기에는 내용이 공허하다는 생각을 했어. 예를 들면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많은 대학생 사례를 다뤘지만, 가난한 학생 이야기는 없잖아. 꿈, 열정, 희망…. 다 좋은 이야기지. 그런데 아르바이트 하면서 장학금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야. 청년들이 처한 상황은 그런 뜬구름 잡는 말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게 아니거든."
박 : "영화감독 변영주씨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난도 교수를 비판하니까, 김 교수가 트위터를 통해 '내가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반박한 적이 있어. 그게 기득권층의 솔직한 생각이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서 지금 위치까지 왔는데, 지금의 청년이 힘들다고 하는 게 불평불만처럼 느껴지는 것 아닐까. 김미경 같은 사람도 방송 강연 보면, '내가 말하는 거 해내면, 너희도 나처럼 성공할 수 있다' 정도의 이야기를 하면서 20대를 닦달하잖아. 결국 자기 계발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청년아 성공하기 위해 다른 청년을 밟고 올라서라'가 아니었을까."
현실의 배설구가 된 인터넷 공간... '병맛' 그리고 '일베'이 : "청년 담론이 넘쳐나도 현실은 바뀌지 않고, 그렇다고 위로를 받기도 어려운 상황인 거네. 스스로에 대한 잉여라는 지칭도, 이런 고단한 현실에 대한 씁쓸한 자조가 섞인 반응일거야. 그러다 보니 인터넷 공간은 이 책에서 설명한 대로 '돈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놀이터이자, 광장이자, 배설구이자, 현실'(133쪽)이 됐지.
사실 '병맛'이라는 게 일반적인 서사를 전복하면서 나오는 거거든. 병맛으로 유명한 만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어. 여고생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선배에게 '선배 주려고 도시락을 쌌어요'라고 하는데 '꺼져'라는 답변이 나와. 일상적인 서사가 깨진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는 거지. 이를 두고 저자는 '와장창하고 박살나는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삶의 궤적과 매우 닮아있다'(140쪽)고 표현해. 지금 청년이 겪고 있는 일상이 녹록지 않잖아?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기도 어렵고 말이야. 차라리 '뒤집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청년이 자기 삶에서도 이런 전복을 꿈꾸니까, 병맛에 공감도 하고."
김 : "'일베'도 시작은 비슷했을 거야. <잉여사회>의 저자는 '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광주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게 된 것은 이들에게 광주가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광주를 욕하면 적들이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즐겁기 때문'(233쪽)이라고 말해. 어떤 금기를 전복하는 데서 오는 쾌락이 일베의 핵심적인 작동원리라는 거지.
다만 이 사람들은 비겁한 방식으로 쾌락을 만드는 것 같아. 안전하게 짓밟을 수 있는 대상을 주로 공격하니까. 여성, 이주노동자, 5·18광주민주화운동 유족 등은 인터넷 잉여와 마찬가지로 강자가 아니잖아. 전복의 대상이 아닌 거지. 누군가는 민주화 이후 우리사회 주역인 386세대에 대한 반감을 근원이라 분석하더라고. 이것이 진보진영 전체로 표출된다는 거지. 그렇다면 기득권이 된 386세대하고만 싸워야 하는 거 아냐?"
박 : "맞는 이야기야. 그런데 우리가 더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어. 사실 일베의 주장이 새로운 건 아니야. 저자가 설명하듯 '일베의 주장들은 지난 십여 년간의 인터넷상에서 언제나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들'(223쪽)이잖아. 다만 언론이 주목하고, 사회적 논의에 등장하면서 확대 재생산된 거지. 일베를 보면, 언론에 자신들이 등장하면 좋아하더라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편이 더 적절한 대응방식이라고 생각해. 어긋난 방식으로 느끼는 쾌락이니까, 점차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거든."
대다수 청년이 빠져 있는 '죄수의 딜레마'
박 : 다시 현실로 돌아가서, 얼마 전에 교수님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 2010년 즈음해서 1학년 학생들이 입학하자마자 자기를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제가 취업을 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실 수 있느냐'를 묻는다는 거야. 특정 직업을 가지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들고서 말이야. 그 이야기는 최소한 고등학교 시절부터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잖아."
김 : "모든 대학생에게 취업은 최우선 명제가 된 건 맞아. 우리는 고등학생 때 '대학교만 가면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고등학생은 '좋은 대학가도, 열심히 안 하면 취직이 어렵다'가 된 거지. 예전에는 대학이 최종목표였다면, 이제는 대학이 취업이라는 최종목표의 중간단계랄까."
이 : "어린 시절부터 다들 취업을 향해 각개약진 하는 거지. 초등학생부터 토익 같은 공인영어점수에 매달리고, 봉사활동도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서 하는 게 흔한 일이 돼버렸잖아. 어차피 청년 대다수가 취업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일찌감치 시작해서 우위를 선점하면 유리하니까."
김 : "대다수 청년이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거 같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최선의 결과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상황 말이야. 애초 경쟁이라는 게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질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 그런 식으로는 자기 혼자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청년실업이라는 사회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아. 이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답습되는 청년 담론, 이제는 그 너머를 이야기할 때박 : "이제 <잉여사회>에 대해 정리를 해보자. 이 책은 잉여라는 열쇳말로 청년의 현실을 소상하게 드러내주고 있어. 다만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당사자인 청년에게 새롭지는 않을 거야. 마치 우리 세대가 지닌 한계가 <잉여사회>에서도 드러난 거 같아. 뭐가 문제인지도 알고, 그 문제가 어떻게 발현되는 건지도 아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는 거지. 이 책이 딱 그래."
김 : "나도 비슷한 아쉬움을 느꼈어. 청년담론에 원래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배울 건 없는 것 같아. 특히 결말 부분이 그래. 다루는 문제는 굉장히 현실적인데 그 대안으로 제시된 '생존, 성장, 만남'은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야. 아까 말한 자기계발서의 문제와도 비슷해. 이런 추상적인 말로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까?"
이 : "물론 <잉여사회>에서의 성찰이 무의미한 건 아냐. 사실 취업을 한다고 해서 잉여를 완전히 벗어나는 건 아니야. 직장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나뉘고 잘려서 '잉여 중년'이 될 수도 있잖아? 그런 측면에서 우리 사회를 잉여사회라고 명명한 거 자체가 적절했다고 생각해. 청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잖아.
공통적으로 결말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거 같아. 저자는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261쪽)라고 책을 매조지어버려. 책에서 풀어놓은 분석을 바탕으로 '뭘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가 없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리는 느낌이야."
박 : "청년 담론이 <88만원 세대> 이후 끊임없이 답습돼 왔잖아. 그런데 담론들이 그 너머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잉여사회>에 대한 공통적인 아쉬움도 거기서 비롯되고…. 이미 분석은 넘칠 정도로 많이 나왔어. 이젠 청년이 잉여사회에서 '반전의 전망'(258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잉여사회>(최태섭 지음 | 웅직지식하우스 | 2013.09. |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