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자본주의의 절대적인 신봉자들은 생산성의 증가에 따른 경제성장이 사회 전체를 골고루 잘살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쿠즈네츠 곡선, 1억 총중류, 트리클다운 경제학과 같은 용어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이론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잘 사는 이상적인 자본주의와 관련된다. 최근에 '경제민주화' 부흥사에서 '친재벌' 전도사로 열차를 갈아탄 박근혜 대통령이나 '돈, 돈'을 외치는 삼성 이건희 회장 같은 이들도 분명 좋아할 말들이다.

'쿠즈네츠 곡선'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낮은 소득 불평등이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 U자형으로 돼 있다. 경제 발전이 소득 불평등을 완화해 준다는 논리다. '1억 총중류'는 1970년대에 일본인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중류)으로 인식했음을 뜻하는 말이다. '트리클다운 경제학'은 최상층이 부유해지면 더 많은 일자리 창출 등을 통해 부의 흐름이 하층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경제 이론이다. 실제 현실은 어떨까.

"19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중산층의 소득은 정체되기 시작했고, 최상층은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득 불평등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확대되었고, 신흥 시장은 물론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 경제에서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났다."(책 <플루토크라트> 13쪽)

지난 10일, 스위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가 '2013 세계 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부의 46%는 상위 1% 부자들이 차지한다. 최상위 1%가 전체 부의 절반 가까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상위 10%로 그 범위를 넓히면 전세계 부의 86%가 부자들의 수중에 놓인다. '1 대 99' '20 대 80 사회'라는 말은 과장해서 만들어낸 허황한 수식어구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보고서는 한국의 백만장자 숫자가 오는 2018년엔 79%가 증가한 44만9000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브라질·폴란드 등과 함께 백만장자 증가세가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만큼 부의 편중이 심화할 것이라는 방증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대한민국이 20 대 80 사회라는 사실은 구체적인 수치들이 증명한다. 2009년 기준으로, 종합소득세 신고자 중 상위 20% 소득자의 1인당 소득금액은 1999년 5800만 원에서 9000만 원으로 10년 새 55%가 증가했다. 대다수가 억대 수입에 가깝다. 반면 하위 20% 소득자의 1인당 소득금액은 같은 기간 306만 원에서 199만 원으로 오히려 크게 줄어들었다. 10년간 따낸 경제성장의 과실이 상층의 부자들에게만 쏠린 것이다.

돈-정치-이념의 순환... 있는 사람은 더 강해진다

책 <플루토크라트> 표지
 책 <플루토크라트> 표지
ⓒ 열린책들

관련사진보기

책 <플루토크라트>는 세상이 두 블록으로 갈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플루토노미(Plutonomy)와 그 나머지로. 플루토노미는 부유층을 뜻하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와 '경제(economy)'가 결합된 합성어다. 소수의 부유층에 부가 집중된 상태를 가리킨다. 플루토크라트, 곧 슈퍼 리치들은 갈수록 더 부유해지고, 자신들끼리 더 똘똘 뭉치며, 평범한 일반 시민들과 점점 거리를 넓혀가고 있다. 힘?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세다.

이 책은 플루토노미에 관한 심층 보고서다. 그들은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었을까. 우리의 삶은 그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있을까. 전 세계 상위 0.1%의 신흥 갑부들을 만들어내는 글로벌 자본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까.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에 빛나는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정치적·경제적 관점 모두를 차용해 상위 1%의 플루토크라트를 분석한다.

"가장 먼저 정치적 판단이 슈퍼 엘리트들을 탄생시켰고, 이들 계급의 경제력이 성장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권력도 함께 커졌다. 돈, 정치, 이념 사이의 순환 고리는 슈퍼엘리트 계급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이자 결과다. 물론 경제력 역시 중요하다. 세계화와 기술 혁명,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함께 빚어내고 있는 세계적인 경제 성장은 플루토크라트의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원동력이다."(본문 16쪽)

이 책에 따르면, 플루토노미 세상에서 '미국 소비자' '영국 소비자' '한국 소비자' 등의 꼬리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의 국적을 불문하고 자신들만의 별천지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에게는 고국에 있는 동포가 아니라 자신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진 세계적인 동료 부자들이 더 친숙하다. 국경을 뛰어넘어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 우정을 나눈다.

플루토노미의 역사적인 성장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디트로이트 협약'과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디트로이트 협약은 1950년에 전미 자동차 노동조합과 빅3 자동차 제조업체들 사이에 맺은 5년간의 상호 협조 계약이었다. 저자는 디트로이트 협약 기간이 미국 중산층의 황금기이자 1%와 나머지의 격차가 줄어든 시대였다고 평가한다.

디트로이트 협약은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막을 내린다. 이때 들어선 것이 워싱턴 컨센서스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분석을 따라가 보자. 레이건과 대처는 최상층의 세율을 대폭 낮췄다. 레이건 행정부는 최상위 한계 세율을 70%에서 28%로 삭감했다. 최대 자본 이득세도 20%로 낮췄다. 노동조합을 압박하고, 사회보장 진출을 줄였으며, 경제 규제도 완화했다.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디트로이트 협약의 붕괴와 워싱턴 컨센서스의 급격한 부상은 플로토노미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자는 1%의 번영에 기술 혁명과 세계화가 큰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그 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쥐게 된 플루토크라트들은 디트로이트 협약이 붕괴하고, 워싱턴 컨센서스가 부상하는 정치·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세금 감축, 규제 완화 등의 단꿀을 맛보게 된다. 저자는 이를 게임의 규칙이 다시 한 번 게임에서 이기고 있는 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 빗댄다.

자수성가? 그건 명백한 '포장'이다

부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부자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별다른 능력도 없으면서 조상 덕에 부자가 된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런 바람 덕분일까. 이 책은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가 2012년 억만장자 랭킹 순위에 오른 1226명 가운데 840명을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분류해 놓았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자수성가는 하나의 '포장지'일 뿐이다.

"자수성가는 오늘날 세계적인 플루토크라트들이 그리고 있는 자화상의 핵심 주제다. 또한 그들의 사치와 지위, 영향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수성가를 들먹이기도 한다."(본문 83쪽)

물론 자수성가라는 '포장지'가 벗겨지지 않도록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일하는 부자들'이다. 저자는 최근 미국 상류층 젊은이들의 애더럴 복용 현상을 소개한다. 애더럴은 24시간 동안 자지 않고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금지 약물이다. 미래의 1%에 들기 위해 기꺼이 현재의 자신을 혹사시키는 예비 슈퍼리치들의 자화상이다.

오해하지는 말자. '일하는 부자들'이나, 애더럴을 복용하는 예비 슈퍼리치들은 결코 자수성가할 수밖에 없는 조건 아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일하고 공부하는 것은 1%, 나아가 0.1%에 들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들은 이미 플루토노미 체제의 아래에 사는 나머지들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저 높은 곳에서 살아간다. 그곳에서 그들만의 치열한 욕망 경쟁을 펼치기 위해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베네치아의 갑부들이 몰락한 이유를 기억하라

500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일까. 저자는 '결론'에서 베네치아의 사례를 든다. 황금기의 베네치아 갑부들은 그들을 부유하게 만든 코멘다 제도(오늘날 합자회사의 원형과 유사한 것- 기자 주)를 폐지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그전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공식 명부인 <황금의 책>을 펴내 지배 계급의 자리를 독점했다. 초기의 대표 민주주의는 부자 귀족 중심의 과두 체제로 급격히 바뀌어 버렸다. 충격에 빠진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를 '폐쇄'라는 의미로 '세라타(La Serrata)'로 불렀다.

"(민주주의와 같은- 기자 주) 포용적인 시스템 덕분에 성공을 거둔 엘리트들은 그들이 꼭대기로 밟고 올라갔던 사다리를 걷어차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러한 플루토크라트들의 성장을 걱정해야 하는 이유는 더 있다. (중략) 최상층은 더 부유해지면서, 게임의 법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그러한 힘은 곧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 된다. 세레타가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사회를 폐쇄적으로 바꾸어버린 베네치아 지배층은 사실 강력한 열린 경제를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본문 419쪽)

저자는 사람들의 탐욕이나 자본가를 영웅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등이 오늘날의 경제적 엘리트들이 베네치아의 갑부들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도록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기에 낮은 세금과 솜방망이 규제, 형식적인 노동조합과 아무런 제약이 없는 정치 후원 제도 등은 플루토크라트들에게 최고의 이익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오늘날의 슈퍼엘리트들을 양산한 개방적이고 유연한 정치·경제 시스템은 그 자체를 유지하는 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다.

한국의 재벌 총수들은 회사의 이익을 국가와 국민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할 때가 많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나라 전체의 이익으로 과대포장하는 것이다. 그 뻔한 거짓말을 국민들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 정부는 여전히 그들의 장단에 맞춰 재벌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정책을 펼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행보는 참으로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걸레'가 돼버린 경제민주화

지난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헌법 119조 2항(경제민주화 조항)의 산파였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영입해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했다. 수많은 중소기업인과 샐러리맨들의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지금 경제민주화는 너덜너덜한 '걸레'가 돼버렸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제시한 국정목표에서는 경제민주화라는 용어 자체가 빠져버렸다. 7월에 박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입법이)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하더니, 8월에는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옥죄기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기업의 구미에 맞게 경제민주화 의지를 후퇴시킨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박 대통령의 입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말 자체를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워낙 '침묵'을 좋아하는 분이시니까 말이다.

부의 편재와 불평등의 문제를 다룬 책을 봤으니 이런 질문이 떠오를 법하다. 도대체 가장 이상적인 부의 분배 형태는 어떤 것일까. 북유럽에 있는 복지 선진국이자 사민주의 국가인 스웨덴의 상위 20%가 차지하는 부의 비중이 36%다. 미국 듀크대학의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의 연구에서 설문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상위 20%가 전체 부의 32% 정도를 소유하는 상황을 가장 선호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스웨던보다 조금 낮고 1950년대 말의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1%의 부자들을 우선시하는 정부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정부가 바뀌지 않으면 나머지 99%가 아예 정부를 바꿔버리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적인 선거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이 지난해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한 의혹으로 지금 온 나라가 폭풍 정국에 휩싸여 있긴 하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플루토크라트>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 10. 10 | 482쪽 | 2만 원)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열린책들(2013)


태그:#<플루토크라트>,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