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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어떤 것이 생기면 그것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호기심 충만해 내 연인의 과거가 궁금해지는 그런 심리라고나 할까(물론, 도를 지나치면 지루한 다툼이 시작되긴 하지만).

가을이와 한 집에 산 지 9개월에 접어들었다. 난 이 녀석의 지난 10년이 궁금해 못 견디겠다. 가을이의 과거를 알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봉사자들의 기억에 의존하는 것.

가을이가 빵을 잘 먹었다고? 믿고 싶지 않다

[증언①] "견사에 들어가면 가을이는 항상 살갑게 다가왔다. 앞발을 내밀고 고개를 들이대며 연신 애정을 갈구했다."

믿을 수 없다. 내가 아는 가을은 세 번 이상 만난 지인이 아니라면 엄격히 경계한다. 또한, 그런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반가워 손 내미는 사람들에게 두려운 기색을 역력히 보여 내가 민망할 정도다. 짧은 기간에 성격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내 해석으로는 자신의 '전용 공간'이 아닌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나름의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라는 보호자와 함께 사는 공간이라 내 눈치를 본다고나 할까. 솔직히 가을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어 기분은 좋다.

[증언②] "가을이는 빵을 잘 먹었다. '커피번'을 가져갈 때는 더 달라고 애원했으며, 순식간에 먹어치우기도 했다."

믿을 수 없다. 빵을 잘 먹는 건 알고 있지만, 주기적으로 빵을 먹어왔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밀가루와 이스트는 개의 건강에 좋지 않다. 더구나 '커피번'의 성분에 카페인이라도 들어있다면? 개에게 카페인은 치명적이다. 난 가을이가 보는 앞에서 빵을 잘 못 먹는다. 우유와 버터의 황홀한 냄새는 가을이에게 엄청난 유혹인지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기 때문이다.

장판의 변천사 가을이에겐 '너무 저렴한 제품'이라는 사장님의 조언을 들을 걸 그랬다.
장판의 변천사가을이에겐 '너무 저렴한 제품'이라는 사장님의 조언을 들을 걸 그랬다. ⓒ 박혜림

[증언③] "더러운 이불을 바꿔주려 했는데 가을은 불안한 기색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잠시 후, 가을이는 옆 견사의 친구 이불을 철창 안으로 있는 힘껏 끌어당겨 궁둥이를 대고 앉아있었다. 좁은 틈새로 끄집어냈으니 당연히 이불은 손바닥 반만 했다. 찬 바닥에 앉기가 무지 싫었나 보다."

알고도 남는다. 가을의 잘 준비는 요란하다. 우선 누우려는 바닥이 얼룽벌룽할 때까지 긁고 또 긁는다. 그저 맨바닥이어도 빠트리지 않고 제자리에서 뱅뱅 돌아가며 가상의 이부자리를 정비한다. 어쩔 때는 내 베개를 제 침대 삼아 안락하게 누워있고, 제 몸 누이기 꼭 맞는 수건이나 방석은 귀신같이 알고 편히 취한다. 외모는 다소 근본 없어 보일지라도 행태는 타고난 공주마마이지 않은가.

넌 누굴 위해 그런 미소를... 뭐지? 이 기시감

이런 증언들을 접하고도 갈증이 남을 때도 있다. 그러면 가을이가 있던 보호소의 인터넷 카페에서 그의 옛 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지만 가을이의 과거를 찾는 일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한다.

옛날 옛적에 가을이는 웃는 모습이 예뻐 카페의 대표 모델이기도 했고, 꽤 많은 대모(지속적인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왔다. 그간 알 수 없는 분들의 사랑에 늦게라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나 허름한 옷을 입고 있거나 눈가에 눈곱이 껴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관심받지 못하는 어린 것들은 얼마나 애잔한가. 난 지나가는 강아지조차도 이런 모양새면 달려가 단장해준다.

그러다 두둥! 가을이 두 발로 서서 누군가를 반기는 사진 앞에서는… 기분이 뭐랄까. 참 묘해진다. 이렇게 해맑은 미소를 과연 누구에게 지은 걸까. 누군지 엄청 행복했겠다. 근데…, 이 기시감은 뭐지? 그렇다. '내 남자의 과거를 목격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다.

비유가 좀 오그라들긴 하지만, 사랑에는 한심하게도 사악한 질투심이 꼭 끼어들지 않나. 그의 찬란했던 과거를 현재의 내가 결코 가질 수 없음에 속상해하던 나. 바보가 아닐 수 없다. 과장을 조금 더 하자면, 가을이가 건강하고 쾌활했던 '젊은 시절'을 나와 함께 보내지 못한 게 속상한 것이다.

과거야 어찌됐든... 지금에 충실해야지

 가을(아래 사진)과 가베... 닮았나? 그나저나 가을의 옛날 사진은 좀 추레하다.
가을(아래 사진)과 가베... 닮았나? 그나저나 가을의 옛날 사진은 좀 추레하다. ⓒ 평강공주유기견보호소

이런 부끄러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발견한 가을이의 충격적인 과거. 가을은 '엄마'였다. 그것도 여러 번. 마냥 갓난 아기 취급을 해왔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선배(?)라 주춤했다. 가을이가 마지막으로 낳은 딸내미 '가베'는 보호소에서 지내고 있다. 가을이의 새끼라는 사실을 알고 가베를 다시 보니 역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아팠겠지. 몸보신은 잘했으려나. 아빠는 누굴까. 지금도 가베를 알아볼까.

가을이가 태교를 안정적으로 못했는지(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도 하다) 가베는 지나치게 예민하다. 봉사자들 중 가베에게 가까이 가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란다. 가베는 아주 조그마한 소리에도 격하게 짖어댄다. 짠한 마음에 간식을 들고 가도, 보는 데서는 먹지 않아 자리를 피해줘야만 했다.

소장님께 여쭤보니 가을이와도 그리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단다. 많은 강아지들을 잉태하고, 낳는 동안 가을이가 겪었을지도 모를 외로움·두려움·고통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그래도, 지나간 일을 붙들고만 있으면 뭐하겠나.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을이와 알코당달코당 잘 지내야지.

귀부인 가을 내 거친 운전에도 이런 자태로 있어주면 좋으련만...
귀부인 가을내 거친 운전에도 이런 자태로 있어주면 좋으련만... ⓒ 이진희

최근 장롱면허를 졸업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내 애마는 12년 된 경차. 가을이를 태우려면 어차피 과속은 금지라 잘 나가는 차는 필요 없다. 차가 클 필요도 없다. 큰 마음 먹고 가을이와 시승식을 치렀는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멀미를 한다. 정성스레 먹인 밥을 왈칵, 고스란히 토했다.

다른 이의 차를 얻어 탈 땐 점잖기만 했던 애가 왜 내 차에선 유독 힘들어할까. 승차감이 그렇게 후진가. 아니면 내 운전이 너무 미숙한가. 가을이 덕에 고민은 늘어가고 그에 맞춰 성장도 기쁨도 따라온다. 차는 소박할지라도 운전만큼은 고급스럽게 할 수 있도록 더 연구해야겠다.


#가을이#가베#시승식#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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