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의 존대가 지나쳐 기분 상하는 일이 종종 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함께 쇼핑하는 일이 잦아졌는데, 내 경우엔 특히 지나친 존대와 어색한 호칭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곤 한다.
"이 사이즈는 미듐이세요.""지금 품절이 됐는데, 며칠 후 입고되실 거예요""요 아인 이번 시즌 상품으로 나오신 거라 워낙 인기가 많으세요.""8만 9천 원 되시겠어요."나를 존중한다고 쓰는 것일 테지만, 실은 내가 관심을 보이는 물건을 높이는 판매원들의 그릇된 존대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손님을 존대하는 것이라 생각해 이처럼 말할 것이다. 이렇게 돌려 생각하면 기분이 크게 나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기분이 영 좋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걱정된다. 내가 깎아내려져서가 아니라 우리말의 잘못된 쓰임 때문이다.
그런데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와 같은 존대가 이젠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공감할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여하간 이런 존대가 당연한 듯, 바람직한 듯이 자연스럽게 쓰인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이 존대법이 당연한 것으로 정착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우리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요즘 학생들은 이런 존대법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들과 딸에게 물어보니 '뭐 문제될 것이 있냐?'는 표정이다. 그래서 왜 이 말이 그릇된 것인지, 잘못된 말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널리 쓰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등에 대해 조목조목 알려줬더니 요즘 대부분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맞는 말인 줄 알았다며 아쉬워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잘못된 존대법은 TV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 등에서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볼일을 보고 온 그 집의 부부 중 한 사람이 도우미 아줌마에게 아들이나 딸의 상황에 대해 묻는다. "아무개 왔어요?"라든가, "OO이는 집에 있어요?", "밥은 먹었어요? 뭘 먹었나요?" 정도로 말이다. 이럴 때 가사노동자들은 "왔어요", "안 왔어요"라든가, "있어요", "나갔어요", "없어요" 정도로 대답하는 것이 맞겠다. 그런데 "오시지 않았어요"라든가 "삼십 분 전에 나가셨어요", "식사하셨어요" 등으로 대답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과연 이게 맞을까? 존대한답시고 실은 아랫사람의 행동 자체를 윗사람에게 높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드라마들이 이런 식의 존대를 한다. 아마도 꽤 역량 있는 작가가 대본을 썼을 것인데 말이다. 어렸을 때 윗사람에게 말할 때는 아랫사람을 높이지 않는 것으로 배웠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이처럼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의 행동거지를 높여 말하는 것이 방송과 일상에서 너무 당연하게 쓰이고 있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잘못 알고 있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럽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게 복잡하면 기본 정신보다는 쓸데없는 것부터 익히게 되는 것 같다. 손자가 할아버지한테 "이 신발 엄마께서 사주신 거야"라고 말한다면 고쳐줘야 할 틀린 어법인데 요새는 텔레비전에 나와 재롱부리는 똑똑한 어린이까지 '엄마께서', '아빠께서' 말하니까 '께서'대신 '가'를 쓰는 어린이는 가정교육이 덜된 어린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노란집>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서<노란집>(열림원 펴냄)은 고 박완서(1931.10.20.~2011.1.22) 선생의 미발표 원고들을 엮어 낸 책이다. 작가 역시 생전 이와 같은 그릇된 존대법에 씁쓸함과 아쉬움이 많았나보다. 이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란 글에는 이와 같은 잘못된 높임말에 대한 이야기 외에 바람직하지 못한 호칭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것에 대한 언급도 있다.
한 젊은 기자가 자신을 이름 뒤에 '-교수'를 붙여 부르더란다. 그냥 이름 뒤에 '선생님' 정도 붙여 부르면 될 것을 교수가 선생님보다 좀 더 격이 있어 보였는지, 아니 교수가 선생님의 높임 정도로 생각됐는지 나름 높여 준답시고 극구 아무개 교수님이라 부르더란다.
그에 작가는 "나는 대학에 단 한 번도 강의 나간 일이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리 부르더란다. 작가는 말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부를 잘하는 사람 같아 호감도 믿음도 가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도 작가처럼 호칭 때문에 그리 기분 좋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과거 난 자동차용품점을 했었다. 때문에 결혼한 여자를 부르는 '아무개 엄마'나 '아무개 어머님', '아줌마'외에 '사장님'이나 '사모님', '여사님'이란 호칭까지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중 '여사님'이란 호칭은 영 껄끄러웠다. 그래서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까지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쪽에선 부득불 "결혼한 여자이니 여사가 맞다"며 '여사'라 부르곤 했다. 당시 나는 삼십대였다. 물론 여사란 단어가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이긴하다. 그런데 말은 시대에 따라 그 쓰임새가 달라진다. 예전에야 여사란 단어가 결혼한 여자를 통칭하는 말이었을지 몰라도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여하간 연륜이 많거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에게나 붙일 수 있는 호칭이라는 생각에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아줌마라고 불러 달랬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은 그 이후로도 '여사'란 호칭을 버리지 않고 부르곤 했다. 불리는 사람이 불편하다며 아줌마라고 불러달라고 했음에도 상대방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방식대로 부르는 그 사람이 결코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작가처럼 아부를 잘하는 사람, 경우에 따라 자신을 던지면서까지 굽실거리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최근 몇 년 째 듣는 호칭들은 내 이름에 '씨'자를 붙여서거나 '아무개 고객님', '아무개엄마' 외에 '-기자님' '-선생님' 정도다. 그런데 이런 호칭 외에 종종 사장님 혹은 사모님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것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물건 하나 사러 간 가게에서마저 사장님 혹은 사모님 소릴 듣는다. 그냥 손님 정도로 부르면 될 것을 말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에게 '언니'라 불릴 때는 더욱 불편하기만 하다. 대체 이 엉망진창 존대법과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 호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라도 고치지 않으면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따라할 것인데 말이다.
전에는 '씨' 자만 달랑 붙이는 걸 좀 무례하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보다는 오히려 편하다. 고유명사에다 '씨' 자만 붙이면 존댓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고마워요' 하는 것도 전에는 귀에 거슬렸는데 '요'자만 붙여도 존댓말로 쳐줘야 하지 않을까 눙쳐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박완서 씨 고마워요' 하는 정도밖에 존댓말을 못 쓰는 젊은이도 내가 그쪽 성명을 물어보면 김철수라고 말하지 않고 '김'자 '철'자 '수'자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다가는 제 자식 이름도 우리 아기는 '나'자 '리'자입니다, 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노란집>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서
<노란집>을 선택하기 전 어떤 책일까? 검색을 해보니 '박완서의 소설집 <노란 집>.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집에서 저자가 쓴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란 설명이 보였다. 미발표 단편 소설들을 모은 책이라 생각했다. 지난해 읽은 <부처님 근처>(가교출판 펴냄, 2012)란 작가의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의 깊은 여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 이 책은 모두 6부, 이중 제1부 '그들만의 사랑법'만 소설이고, 나머지는 앞에 언급된 이와 같은 글들이기 때문이다.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호칭과 높임말에 관한 글처럼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글들 말이다. 여하간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는 평소 아쉬움과 씁쓸함을 느끼곤 했던 호칭과 높임말 관련 글이라 깊이 공감하며 만난 글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박완서 작가의 노년의 생활과 생활철학을 풍성하게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외에도 '산후우울증이 회복될 무렵', '하찮은 것에서 배우기', '내리막길의 어려움', '책에 굶주렸던 시절의 행복',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오해', '나귀를 끌 것인가, 탈 것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 소중한 것' 등이 인상 깊었다.
이중 '산후우울증이 회복될 무렵'이란 글은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인 <부처님 근처>와 깊은 관련이 있는 글이다. 소설가의 초기 작품인 이 소설을 인상 깊게 읽은 사람들이나 소설가 박완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특히 여성독자라면 이 글은 물론 이 책 <노란집>에 공감하지 않을까. '산후우울증이 회복될 무렵'이란 글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노란집>| 박완서 |열림원 펴냄 | 2013.08.30 발간|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