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증말 고생들 했어유."
27일 공주 왕촌 살구쟁이에 묻힌 유해발굴이 마무리됐다. 1950년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짧은 생을 마감한 79구의 유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14일 동안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유해발굴 작업을 벌였다. 그래도 예상보다 작업 속도가 빨랐다. 유해 발굴 현장을 총지휘해온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비법(?)을 공개했다.
"40여 년간 발굴 현장을 누볐던 석장리 마을에 사는 어르신들 덕분입니다. 정말 베테랑이에요."박 교수가 말한 '석장리 어르신들'은 김종근(76), 김희환(73), 박홍래(79), 전은성(60)씨 등 4명이다. 박 교수가 다시 이들을 치켜세웠다.
"한국의 어지간한 구석기 문화재 발굴현장은 다 참여했어요. 유물발굴에 관해서는 최고 전문가예요."'석장리 어르신들'의 주업은 농업이다. 공주 금강변에 있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대대손손 땅을 일구며 논농사와 밭농사로 삶을 잇고 있다. 이들이 유물 발굴 최고 실력자라고?
이들의 얘기를 듣기에 앞서 공주 석장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필요하다. 한반도 구석기시대 유물의 발굴은 1964년 공주 석장리 금강 변에서 시작됐다.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다던 학설을 보기 좋게 뒤집은 곳이 석장리다. 교과서에 처음으로 구석기 유물 분포지역으로 소개된 곳도 석장리다.
40년간 주업같은 부업, 우리는 '자칭 문화재발굴 전문가'
석장리 구석기 유물발굴은 1964년부터다. 박홍래(79)씨는 서른 살 때 석장리 유물 발굴 일을 처음 접했다.
"1964년에 석장리 유물발굴이 처음 시작됐어. 이전에는 동네에 품앗이 외에 품을 파는 일 자체가 읎었어. 내다 파는 건 나무뿐이었어. 산에서 나무를 해다 공주읍내에 갖다 팔았어. 구석기 유물발굴을 하는데 일꾼이 필요하니께 인근 동네사람들이 죄 동원됐지. 나무장사보다 돈벌이가 낫더라구. 그때부터 농사짓다 틈나는 대로 발굴현장에서 일당 받고 날품을 팔게 됐지."같은 마을 김종근(76)씨가 얼른 박씨의 말을 받았다.
"처음엔 동네 처녀 총각까지 다 불러들였지. 발굴하는데 인력이 부족했어. 어떤 역할을 했냐고? 역할은 무슨… 그냥 땅 파고 또 파서 유물을 파내는 일이지." 인근 마을에 사는 김희환(73)씨는 스물네 살 되던 해부터 석장리 유물발굴 현장에서 일했다.
"기억에 남는 유물들이야 많지. 주먹도끼, 찍개, 몸돌… 발굴된 구석기 유물은 전부 인부들이 찾은 거야. 교수들이야 일 시키고 분석만 하지 직접 땅은 안팠으니까…."박 교수와 인연을 맺은 곳도 석장리 발굴현장이다.
"박 교수님은 그때 대학원생이었지. 유해 발굴하러 와서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됐으니… 세월 참 빠르네 그려."단양 금굴-구낭굴,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이렇게 시작된 유물발굴이 40년 동안 주업 같은 부업이 됐다. 우선 석장리 유물발굴이 1992년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경험이 쌓이다보니 학계에서도 단순 노무자가 아닌 기술직으로 분류했다.
일반 노무자에 비해 일당도 높았고 현장의 대우도 달라졌다. 농사일을 하다가도 불러 주기만 하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이들의 손을 거친 문화재발굴 현장만 어림잡아 40여 곳이다. 교과서와 뉴스에서만 보고 들었던 지명이 이들 입에서 술술 쏟아져 나왔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못하지. 대충 기억나는 곳? 어디 보자 경기도 연천 전곡리, 도라산역 부근, 단양 금굴-구낭굴,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전라도 어디더라… 전국을 다 다녔지, 중국하고 러시아? 거긴 문화재 발굴하러 간 건 아니고 구석기 문화 학술 발표하는 데 따라가 봤어."전문가들이 이들을 찾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지형에 따라 어디를 어떻게 발굴해야 하는지, 발굴 방법은 물론 발굴 기간까지 판단해 낸다. 그들만의 유물 발굴 노하우도 수두룩하다. 일례로 이들은 비가 올 때도 발굴작업을 할 수 있는 초간편 비가림 시설을 고안해 사용하고 있다.
"발굴 작업이 끝나면 집으로 두꺼운 책자로 만든 '발굴보고서'가 배달돼. 책장을 넘기며 '이건 내가 찾아낸 거고 요건 전씨가 발굴한 거고' 생각하지. 그땐 참 뿌듯하고 기뻐. 여러 학자들과 술 마시며 정도 많이 들었어, 돈 벌려고 한 일이지만 보람을 느끼지." (김희안씨)"엉망이고 우리 눈에 안차... 인자 그만해야지"
이들도 속상할 때가 많다. 현장에서 사정을 잘 모르는 관계자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하지 않을 때도 많다.
"아이엠에프(IMF) 오고부터 노임 단가가 뚝 떨어졌어, 지금은 일반 근로자들하고 품삯이 똑 같아, 타지를 가도 숙박비에 담뱃값도 우리가 내야 돼. 근래엔 발굴하는 곳이 부지기수로 늘어나서 발굴작업도 대부분 직접 해, 하는 것 보면 다 엉망이고 우리 눈에 안차지…….우리도 나이도 있고 인자 그만해야지." (박홍래씨)"석장리 땜이 품 팔아 애들 가르치고 어려운 시절 잘 보냈어, 고마운 일이었지, 근데 마을 농지가 대부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이면서 재산권행사에 제한이 많아, 4대강 공사한다고 금강변 농지 보상할 때도 다른 사람들보다 보상금이 한창 적게 나왔어, 땅값 시세도 옆 동네하고 평당 20만 원씩 차이가 나, 석장리 문화재가 주민들 발목을 잡으니 원……" (전은성 씨) 살구쟁이, 열네살 때 들었던 생생한 총소리이들이 왕촌 살구쟁이 유해발굴에 뛰어든 것은 지난 2009년이다. 당시 발굴단장을 맡은 박 교수의 요청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유해수습만을 위한 발굴은 처음이었다.
"고인돌 주변이나 구석기 동굴에서 문화재 발굴을 하다 유해를 찾아낸 적은 있지, 그치만 이번처럼 유해만 무더기로 찾는 발굴을 한 것은 (2009년) 그때가 처음이야." (박홍래씨)옆자리에 앉은 김씨가 소주잔을 벌컥 들이켰다. 목소리도 가라 앉았다. 그때의 꺼림칙하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말도 마, 처음 유골을 파내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기분도 안 좋고… 한참동안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고, 근데 박 교수님이 데려온 젊은 여학생들이 얼굴색 하나 안변하고 척척 유골을 만지는 거야, 어린 학생들한테 우리가 배웠지 많이 배웠어."
이들에게 공주 살구쟁이는 어린 시절부터 넘어설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시선조차 둘 수 없는 금기의 땅이었다.
"전쟁 나던 해니까 중학교 다니던 14살 때였어. 아침부터 요란하게 총소리가 나는 거야. 끊겼다 또 나고 끊겼다 또 나고… 우리 동네하고 여기 살구쟁이가 강을 건너면 바로 거든. 어른들 말이 빨갱이들을 총살하는 거라고 했어.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박홍래씨)"예전에는 공주 읍내를 가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거든. 배 타고 강을 건너면 바로 살구쟁이 앞에 닿았어. 무서워서 살구쟁이 쪽으로는 고개를 못 돌렸어" (전은성씨)"수백 명이 죽어 묻혀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무서워서…" (김희환씨)"평생 피해다니던 땅... 우리 손으로 땅팔 줄 꿈에도 몰랐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다시 말한다.
"평생을 피해 다니던 땅을 우리 손으로 파서 유해를 수습할 줄을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 이번에는 하나도 안 무서웠어."유물 발굴과 유해발굴 작업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른 유물 발굴 작업보다 힘은 덜 들어, 대신 신경을 무지 써야 해, 살짝만 잘못 건드려도 뼈가 부서지거든, 머릿속으로 뼈 조심, 뼈 조심하면서 일을 해.""가장 기억에 남는 유해? 2009년에 발굴 때 의족을 한 유해가 나왔는데 어찌나 안쓰럽던지, 첫 번째 구덩이 맨 오른쪽에서 나왔어." 유해발굴을 끝낸 이들은 살구쟁이 매장지가 있던 맨 위쪽에 투박한 솜씨로 솟대를 만들어 세웠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긴 장대 꼭대기에 날지 못하는 나무새를 조각해 올려놓았다. 무릎 높이 만한 키 작은 솟대도 있다. 땅 속 구덩이에 오랫동안 묻혀있던 희생자 혼백들과 쉽게 다가가기 위한 배로 보였다. 새의 머리가 향하는 곳은 석장리 박물관이 있는 마을 쪽이다.
"땅속에 있던 억울한 혼령들이 하늘도 올라갔으면 하는 거지 뭐… 우리 마을도 잘 되게 해주고… 유물발굴은 못하더라도 유해발굴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