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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3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지난 대선에서 발생한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등 정치 현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 먼저 철저한 진상 조사를 실시하고 사법부 판단이 나오는 대로 불편부당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또 국가기관의 정치적 중립 준수를 위한 재발방지책 마련도 약속했다.

되풀이된 입장 표명... 국가기관 선거 개입 의혹 인정 부분은 주목

박 대통령의 이날 언급은 그동안 밝혀온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박 대통령의 의중을 대독했다는 평가를 받은 지난 27일 정홍원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 내용 또한 되풀이 됐다.

박 대통령은 "엊그제 국무총리가 강조했듯이 현재 재판과 수사 중인 여러 의혹들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확실히 밝혀 나갈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국가기관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의혹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민들께 정확히 밝히고 책임을 물을 것이 있다면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박 대통령의 발언 중 주목되는 부분은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의혹을 사실상 인정한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정부는 모든 선거에서 국가기관은 물론이고 공무원 단체나 개별 공무원이 혹시라도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지켜나갈 것"이라며 "특히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런 일련의 의혹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대한민국의 선거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권선거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재발 방지를 약속함으로써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뤄진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 등의 인터넷을 통한 특정 후보 지지·비방 활동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박 대통령, 재보선 압승으로 자신감 얻었나

야당의 숱한 입장 표명 요구에도 침묵을 지켜오던 박 대통령이 이날 정치 현안에 대해 전격 언급하고 나선 것은 야권의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박 대통령의 '침묵의 리더십'에 대해 야당은 물론 보수 언론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묵살하고 장기간 해외 순방을 떠날 경우 오히려 사태가 악화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내달 2일부터 8일간 프랑스·영국·벨기에로 이어지는 서유럽 순방에 나선다.

특히 10·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예상 보다 큰 압도적 격차로 승리하면서 야권이 제기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심판론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점도 박 대통령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했다는 평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는 원래 매주 월요일 열리는 게 관례지만 청와대는 한달여 만에 열린 이날 회의 날짜를 재보선 다음 날인 목요일로 잡았다. 재보선 승리를 발판 삼아 대통령 메시지의 효과를 극대화를 염두해 뒀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 대통령의 자신감은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야당의 공세를 사법부 흔들기로 규정하고 역공을 취한 것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단을 정치권이 미리 재단하고 정치적인 의도로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법부의 판단과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더 이상 국론 분열과 극한 대립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전한 유체이탈 화법... 채동욱 찍어내기 등 수사 외압 의혹에는 묵묵부답

하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에게 불리한 현안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유체이탈' 화법을 선보였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찍어내기', 검찰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 직무배제 등 국정원 사건 수사 축소 및 외압 의혹 등 현 정권에서 일어난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거리 두기에 급급했다. 명확한 해명이나 구체적 설명 없이 자신의 입장이나 막연한 믿음만을 강변하는 화법은 이번에도 되풀이 됐다.

박 대통령은 "저는 사법부의 판단과 수사결과가 명확하고 국민들께 의혹을 남기지 않도록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며 "그 책임을 맡고 있는 분들이 그렇게 하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야권이 제기하고 있는 민주주의 후퇴 논란에 대해서도 "요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저는 정치를 시작한 이후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정당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며 동문서답 격의 이야기를 내놨다.   

박 대통령은 또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라며 "인터넷으로 모든 상황들이 공유되고 실시간으로 많은 정보들이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이날 밝힌 선 진상 규명, 후 책임자 처벌 및 재발방지책 마련이라는 원칙에는 야권의 비판을 일부 수용한 일부 진전된 내용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야권이 요구하고 있는 사과 표명이 없고 일부 핵심 현안에 대해서는 외면하는데 급급해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으로 촉발된 '소용돌이' 정국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평가다.


태그:#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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