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릉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한글 이름이 같은 데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자락의 좌우에 있어 세종대왕의 영릉만 기억하기 쉽다. 세종대왕릉을 돌아본 후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며 산책길을 걸으면 가까운 곳에 꾸미지 않아 순수하고 소박한 효종대왕릉이 있다.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쌍릉으로 세종대왕릉과 함께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효종대왕은 북벌이라는 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41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지만 대동법 실시와 화폐단위 개혁은 물론 양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바로잡는 기틀을 마련한 업적 또한 적지 않다.
효종대왕은 16대 임금인 인조의 차남으로 맏이인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죽자 세자로 책봉되어 1649년부터 1659년까지 재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찧는 굴욕을 당하였다.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대왕도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가 청나라에 8년간 머물렀다. 이때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청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신하들과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매표소를 지나면 시골마을의 양반주택을 닮아 빗자루를 든 하인이 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할 것 같은 재실(보물 제1532호)이 입구에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왕릉의 재실 가운데 원형이 잘 보존되고, 건물의 공간 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집안에 수령 300여 년으로 수형이 좋은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 노거수, 키가 큰 향나무가 있어 재실의 역사성을 높여주는데 한몫한다.
홍살문에서 능을 바라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비교적 거리가 짧은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속세와 신성한 지역의 경계가 되는 작은 개울 금천(禁川)이 흐른다. 정자각과 비각 뒤편으로 인선왕후릉이 가깝게 보인다.
정자각에는 신이 오르는 신계(神階)가 있고, 신계 첫 계단 양쪽에 태극무늬를 새긴 석고(石鼓)가 있다. 이곳의 정자각 주위에 제사 음식을 만들고 제기에 나누어 담는 수라간,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복방, 효종의 영릉비가 서있는 비각 등이 있다. 효종대왕릉은 세종대왕릉과 달리 정자각 옆 수라간을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정자각 뒤편으로 가면 왼쪽에 사각형의 석함이 있다. 이것을 예감 또는 망료위라고 하는데 제례가 끝나고 제례음식을 치울 때 축관이 축문을 불태워 묻는 곳이다.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가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으로 풍수지리적 이유 때문에 상하열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했다. 이런 쌍릉 형식을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 하는데 효종대왕릉 영릉이 조선 최초다. 석물의 배치가 똑같은데 왕릉의 봉분에만 있는 곡장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알려준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원래는 효종대왕이 승하한 1659년에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거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지자 현재의 위치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다.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영릉은 천장하고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4일 효종대왕릉에 다녀온 기록입니다. 이 기사는 제 블로그 '추억과 낭만 찾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