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발자국 따라 계단 올라 굽이돌면 백악기로 가는 거다 - 이상옥의 디카시 <공룡나라 고성 1>김열규 교수님이 별세(10월 22일)하고 나니, 새삼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인 수필집 <빈손으로 돌아와도 좋다>가 떠오른다. 이 책은 1991년에 서울에서 고향 고성으로 귀향하고 1993년 출간한 귀향기이다. 출간 당시 그의 "홀연한 귀향은 서울 내지 물질적 풍요의 세계를 떠났다는 점에서 금의환향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좇은 고향으로의 '야반도주'일 것이다"라고 운위될 만큼,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인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누구나 떠나야 한다. 평생일 것 같은 직장도 떠나야 하고, 궁극에는 이 세상도 떠나야 한다. 나도 1985년도에 교편을 잡아 교사노릇 9년여 하고 시간강사로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도 근 5년여, 대학교수 노릇도 14년여 어느덧 30년이 멀지 않았다.
나도 조만간 귀거래사를 써야 할지 모른다. 고성 하일면 공룡발자국 화석지에 가면 지금도 발자국이 바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다. 공룡의 발자국을 따라 계단을 올라 곧장 가면 공룡들이 살았던 백악기로 갈 수는 없을까. 내가 꿈꾸는 '백악기'는 어떤 곳일까.
김열규 교수님이 별세 하루 전까지 글을 쓰다가 다음날 책상 위 못다 쓴 원고를 남겨두고는 홀연히 세상을 떠나신 걸 두 눈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목격하고, 이제 열흘 가까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 도대체 이렇게 시간만 보내고 매너리즘에 빠진 생활을 하다가 나 또한 느닷없이 세상을 끈을 놓친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작금에 그동안 방치해두었던 고성의 시골집을 리모델링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김열규 교수님이 19년 귀향하여 매년 1권 이상의 명저를 남겼듯이, 나도 시골집에 기거하며 '책 읽기', '글 쓰기'에 매진하고 싶기 때문일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니, 입신(立身)하여 양명(揚名)하면 되는 것인가.
<효경(孝經)>에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이 나온다. 몸을 세워 이름을 높여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를 낳아준 부모에게도 존경심을 갖게 하는 것이 사나이 대장부의 할 일인 것처럼 가르친다. 이것이 동아시아 유교사회의 지식인의 가는 길이었다. 학문으로 지식과 인격을 연마하여 과거급제하고 출세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
그러면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진정한 선비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지는 않았다. 난세를 만나 협잡과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바른 뜻을 성취해 낼 수 없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벼슬길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신의 양심을 지키며 후학들을 가르쳐 후일을 도모했던 것.
도연명은 출처진퇴(出處進退)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출처진퇴는 사마광의 말로, 군자란 직책을 내리려 해도 사양해서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말아야 하고, 자리를 떠나도록 지시받으면 지체하지 않고 물러나는 것, 즉 출처진퇴가 깨끗해야 군자이다. 도연명은 구차하게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도연명 시대는 천하가 어지러운 때여서 선비들은 스스로 초야에 묻혀 지내려 했다.
도연명은 자연을 좋아하고 세상 벼슬을 멀리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궁핍하여 친척이 말단 관직을 하나 알선해주었는데, 오늘의 면장쯤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하루는 상사가 순시를 나가니 관아를 정돈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대기하라는 통지를 받고서는 저 유명한 "오불능위오두미절요(吾不能爲五斗米折腰!)", 즉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있으랴!" 하고는 사표를 내고 귀향하여 귀거래사를 썼던 것이다.
도연명은 작은 고을 수령이라는 공직에서조차 지조를 굽혀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연과 시와 더불어 무위자연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 좁쌀만 한 명예와 권세를 탐하다 망한 사람이 한둘 아니다. 정약용은 헛된 명예가 다가 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여 '도명(逃名)'을 말하였고, 오지 않는 명예를 찾아 좇아 다니는 '요명(要名)' 또한 삼가라 했다. 물론 양명(揚名)으로, 이름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오면 순리대로 받으라 했지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투 하나 쓰고 우쭐대면 그건 양명이 아니라 오명(汚名)이 될 것임을 경계한 것이다.
며칠 전에는 시골집 서재에서 젖가슴 같은 산 위로 반달이 떠오는 걸 보았다. 한 편의 시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단번에 '시골집 서재에서'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얻었다.
나도 2, 3년만 지나면 김열규 교수님이 고성으로 귀향할 무렵의 나이가 된다. 그 무렵에는 나 또한 '귀거래사'를 써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이제는 채호석 교수가 쓴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에 새로운 시문학의 한 장르로 소개되어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순간 소통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