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4강이라는 기염이 지나간 덕분일까? 그해의 수능은 한파가 찾아오지 않았다. 11월이니 춥긴 하였으나 다른 수능 때와는 비교 불가한 훈훈한 겨울 날씨. 모든 친구들은 명성여고로 시험을 보러 갔는데 유독 나만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한양여고라는 엄청나게 긴 이름의 학교로 시험을 보러 왕십리로 가야 했다.
03학번이란 타이틀을 달 그 날의 수험생들은 어찌보면 역대 가장 불쌍한 수험생이었다. 전국민,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이 국내에서 열렸으나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다. 거기다 한국전이 열리는 그 순간에도 부모님과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경기장은 커녕 브라운관 앞으로도 가지 못했다. 다만 주변이 시끄러워지면 문을 빼꼼 열고 "골 넣었어?"한마디 던지는 수밖에. 스페인전 홍명보의 마지막 킥이 골문에 꽂히는 그 순간은 브라운관 앞으로 뛰어나온 것이 암묵적으로 용서되기는 하였으나, 태극전사들이 그라운드에 엎드려 미끄러지는 순간 들은 말은 "이제 안들어가니?"였다.
그 중에서 나는 가장 불쌍한 수험생이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시행한 5월의 1학기 1차 수시에서 첫 번째 낙방. 가장 자신만만했던 2학기 수시에서도(모든 선생님들이 당연히 붙을 거라고, 너무 낮춰 쓴 것이 아니냐고 했었다) 이해할 수 없게 낙방. 수험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이미 재수를 결심하고 있었다.
이미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수험생 꼴로 지하철을 탔는 데도 그 누구도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는 그 현실이 '아, 나는 올해 안되는가 보다'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고 있었다. 거기다 학교 교문을 들어섰을 때, 동아리 후배 하나 응원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좌절감까지 맛보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후배가 전해주는 캔커피라도 하나 들고 들어가는데 내 손에는 내 도시락 가방 뿐이었다.(후에 알게 되었지만 선배 한명이 들어간 수험장이라 남자 후배 한명이 왔는데, 결국 날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선배가 수험장에 들어가는 걸 보지 못한 후배는 우리 집에 전화까지 했었다고 한다. 선배가 수험장에 안 왔다고) 더 우울해졌다. '올해는 정말 안 되나 보다'.
내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험장에 들어섰는데 시계가 없었다. 왜 시계가 없냐고 묻자 수험장에는 시계를 가져다 놓지 않으니 손목시계 갖고 와야 하는 거 몰랐냐고 주변 수험생들이 말해주었다. 수능 전날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지병이 발생하셔서 학교에 오지 못하셨고, 우리는 공지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우리 반 친구들 대부분이 손목시계 없이 수험장에 갔다가 당황했다고 하는 후문이 전해졌다) 일단 그 학교 교무실로 달려가 아무 선생님이나 붙잡고 손목시계를 빌릴 수 있냐고 물었지만 그 어떤 선생님도 빌려주길 꺼려 하셨다. 어른들의 시계는 대부분 고가였기에. 무작정 교문밖으로 뛰어나가 알지도 못하는 다른학교 후배 학생에게 제발 손목시계를 빌려달라고 하소연했다. 그 친구는 주저없이 시계를 풀어주고 내 핸드폰 연락처를 받아갔다. 나는 감사하다고 몇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은 나에게 초콜릿 까지 주며 시험 잘 보시라고 했다. 그때 약간의 한줄기 빛이 보였다. '어쩌면 올해 대학문을 밟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란 시간 동안 어떤 색을 칠할 수가 있을까?......" 시험이 끝났다. 무려 10시간의 시험이 끝났다. 학교에서 준비한 노래였는지, 교육부가 준비한 노래였는지는 알 수 없다만 토이의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고 난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몇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못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의고사 보던 만큼은 보았다고 생각했다. 터덜터덜 교문을 나서자 저 멀리 처연한 얼굴의 내 엄마가 보였다. 다시금 왈칵 눈물이 났으나 씩씩한척 엄마에게 "재수해도 되지?"라는 철없는......엄마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한마디 던졌다.
간이 작은 나는 채점을 하지 못했다. 언니는 인터넷을 켜 놓고 나에게 맞추라고 했지만 난 도무지 못하겠으니 언니가 해달라고 했다. 언니의 채점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고, 난 케이블 방송에서 하는 월드컵 스페인 vs. 대한민국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물론 경기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은 언니가 펜으로 긋고 있는 동그라미와 작대기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채점을 마친 후 언니가 말해준 점수는 생각 이상이었다. 솔직히 이정도면 원하는 곳은 어디든 써도 될 점수였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난리가 났고 아빠에겐 자랑하는 전화를 걸었다. 무얼 먹고 싶냐는 엄마의 말에 나는 칼국수라 말했고 셋이서 칼국수를 실컷, 평소라면 엄마가 시켜주지도 않았을 만두까지 먹었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는 길에 교복을 입다 화장대에 풀어놓은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참...... 손목시계......' 빌려주었던 그 모르는 친구가 내 핸드폰에 문자를 보내기로 했는데 문자가 없었다.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는데 이를 어쩌나 싶었다. 기억을 반추해보니 교복이 분명 대원여고 학생이었는데 싶어 대원여고에 전화를 걸었다. 수험장에서 한 친구에게 손목시계를 빌렸는데 찾아줘야 겠다고. 도움을 주실 수 있냐고 물었지만 전화를 받았던 그 행정실 직원은 야멸차게 전화를 끊었다. 곧 기말고사가 시작되고 있었고, 시험이 끝나고 다시 주인을 찾아주자 싶었지만 곧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있었다. 결국 그 시계는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채 책상 서랍 안에서 고이 잠을 자게 되었다.
2004년. 이제 한 때 잘나갔던 03학번이 되며 새로 '잘 나갈' 04학번 후배를 받는 날이 되었다. 연극 동아리에서는 후배를 모집했고, 첫 대면식이 있던 날. '저 친구 참 위 아래 안 맞게 입고 왔네'하며 쳐다본 한 후배의 얼굴에 2002년 11월 수능날의 손목시계 주인 얼굴이 떠올랐다.
웨이브 펌을 하고 어색한 화장을 했지만 분명히 그녀는 그날의 손목시계 주인이었다. 일부러 그 맞은편 자리로 가 앉아 혹시 대원여고 나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맞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능시험 날 선배들 응원하러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한양 여자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맞다고 한다. 그럼 그날 손목시계를 모르는 여자 수험생에게 빌려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맞다고 한다. 하는 동시 "어?"라고 하며 "아!"라고 한다.
그렇게 손목시계는 주인을 다시 찾았다. 대학생이 되어 좋은 새 손목시계를 선물 받았다고 하며 다른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그녀에게 더이상 그 날의 손목시계는 필요치 않았지만 그 손목시계는 인연의 끈이 되어 그녀를 나의 가장 좋은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인조가죽에 자주 끼던 구멍이 주욱 늘어나 있는 낡디 낡은 시계였지만 모르는 수험생에게 주저 없이 그것을 풀어주었던 그녀의 마음은 지금도 감사히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다.
"유정아, 그 날 네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린 같은 학번으로 만났을 지도 모르겠다. 정말 너무너무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덧붙이는 글 | '입시가 뭐길래' 공모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