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비행을 꿈꾸던 바랜 잎들이 바람 대신 맞닥뜨린 빗물의 무게를 떠안고 슬프게 스러진다. 윈도 브러시를 1단으로 놓자니 빗방울의 엉김이 만만치 않고, 2단으로 올리니 그 경박한 움직임이 괜히 눈에 거슬린다.
대학 졸업 후 13년 만에 신문반(교지편집위원회) 후배들을 만나러 가는 길, 딱 그만큼의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점차 굵어지고, 시야가 흐려지는가 싶더니, 때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돈규의 <나만의 슬픔>이 그 시절로 나를 역주행시킨다. 어느새인가 나는 대학 시절 신문반의 동아리 방에 앉아 있다.
신문반의 정식 명칭은 '봉아 편집위원회'. 학교의 상징이었던 봉황과 우리 과의 상징인 치아가 합쳐진 '봉아'라는 이름이 오래전부터 교지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학생 수 500명 남짓의 단일학과 단과대학 교지 편집부였지만, 그 기세만은 위풍당당해 동아리방 한쪽 벽에 붉은 글씨로 '언론이 침묵하면 돌들이 일어선다!'라는 날선 구호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봉아편집위원회, 그 기억을 건져 올려 본다.
<우리들의 죽음>, 이 노래를 아십니까
20년 가까이 흐른 뒤에도 그 장면 그대로 생생하게 그리고 절절하게 가슴 속에 남아있는 첫 번째 기억은 한 곡의 노래를 듣던 장면이다. 곰을 닮아 곰탱이라 불리던 선배의 곰 같은 손에 들려있던 작은 카세트.
재생 버튼이 눌려지기 전까지 우리는 스피커를 통해 전해질 노래의 내용을 짐작조차 못하고 재잘거리고 있었다.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책상 한가운데 놓여진 카세트의 버튼을 누른다. 정태춘 선생님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그 노래의 제목은 <우리들의 죽음>. 노래가 흐르는 동안 편집실 안은 침묵에서 한숨으로 그리고 눈물로 바뀌었다(
노래 듣기).
정태춘 7집. '아, 대한민국'에 수록된 <우리들의 죽음>. 1990년도에 발매됐으나 불법음반으로 낙인 찍혀 정식 발매되지 못하다가, 19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합법적인 앨범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그 노래를 듣던 1994년도에 그 앨범은 불법음반이었던 셈이다.
복제된 불법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그 노래에는 맞벌이 부부가 문을 잠그고 일 나간 사이 집안에서 성냥을 가지고 놀던 남매가 불이 나서 질식사로 죽은 실화가 담겨 있다. 그날, 노래에 충격을 받고 눈물 흘리던 일곱 명의 대학 새내기들은 저마다의 삶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들의 죽음'을 각인시켰으리라. 요즘도 간혹 그 노래를 듣게 되면 간주 부분부터 울음을 참아야 한다.
신구 갈등도 있었지만, 잊지 못할 순간들두 번째 기억으로는 일 년에 한 번 만들어 내던 교지를 제작하고자 보름간 합숙하던 시간들이다. 선배들에게 물려받은 실무적 경험도 거의 없고, 편집이나 글쓰기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말 그대로 유에서 무를 창조하던 그 시절. 몇몇 골수 선배들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세대 신입생들의 의견 충돌.
지금 생각해보면, 인터뷰라는 것을 생전 처음 해보는 신입생들에 의해 작성된 인터뷰 질문들은 오금이 저리고, 편집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짜깁기 문서들은 낯간지럽다. 그런 생짜 아마추어들에게 저널리즘을 기대한다는 건 죽은 나무에 꽃 피우기였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들에게는 밤새 토론하고 교정하여 얻어낸 예술 작품이요, 나아가 퓰리처상 부럽지 않은 땀의 열매였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곤 했었다. 볶은 김치에 콩나물국으로 끼니를 이어가도 함께 뒹굴며 쓰고, 수정하고, 편집하던 그 순간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마지막 회상 장면은 소위 편집실이라 불리던 동아리방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이다. 4층 건물 꼭대기 후미진 구석방이었지만, 햇볕만큼은 왕의 정원 못지 않던 곳. 칙칙한 강의실과 따분한 강의에 대해 자체 휴강으로 맞불을 놓고 나서, 행여나 다른 교수님들 눈에 보일까봐 쥐새끼처럼 몰래 스며들던 그곳. 그곳에서 우리들은 불온서적(?)을 눈동냥 하고, 전공 서적과 소설책을 맞바꾸고, 방명록에 낙서 따위 끼적이며 하루를 보냈다.
오래된 철제 책장은 중간부위가 찌그러져 학원 탄압의 증거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듯했고, 주워온 지 10년은 돼 보이는 소파는 희한하게 등만 기대면 잠이 쏟아졌다. 그러다가 이심전심 마음이 통한 선배라도 들이닥치면, 자리를 박차고 낮술의 방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가는 술잔은 여전히 돈독하지만...
건너편 차선의 상향등이 기능을 잠시 망각하고 있던 시신경을 요란하게 깨운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를 방금 전 지나쳤다. 이제는 유턴을 해 후배들 사이로 걸어들어 갈 시간이다.
1년에 한 번, 재학생들과 졸업생들과의 만남의 자리. 대학을 졸업하고 아마 처음이지 싶다. 13년 만에 만나는 후배들, 역시 그들도 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쭈뼛거리며, 17년 후배에게 존댓말로 인사를 건넨다. '이 초라한 행색의 중년은 누구인가?'라는 얼굴의 표정과는 달리 "안녕하세요, 편집위 선배님이시지요?"라는 예의 바른 인사가 돌아온다. 걱정했던 만큼 초면의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후배들 틈바구니에 끼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 본다. 20대의 고민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성과 취업. 주제는 단순하지만 그 열정과 애절함의 다양성 때문에 대부분의 청춘은 아파 보이는 것이다. 선배들의 척박한 치과 개원 환경과 경영난 등을 듣고 있는 후배들의 얼굴에 예전 세대만큼의 생기가 없다.
한 후배가 말한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공부하는 애들도 있어요." 새벽 다섯 시까지 술을 마셔본 적은 많아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공부한 기억이라고는 글쎄다. 또 다른 후배도 거든다.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전공서적 외에 정치나 사회 관련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심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지요." 책값 받아 술 사 먹고, 방학 내내 도서 대여점 문턱이 닳도록 소설책을 쥐고 살았던 나에게는 역시 글쎄다. 그나마 전문직에, 어느 정도 안정이 보장된다는 우리 과 후배들이 이 정도니, 취업을 준비 중인 다른 학과 학생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명색이 언론 관련 동아리인데 점점 메말라가는 후배들의 감성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넘치는 술잔 속에 싹트는 연대감은 변함없지만, 이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부분이라도 길을 제시해 주기에는 그 시간과 개인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들을 다양한 사고와 철학적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 사각의 지대로 점점 몰아넣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길들여져 고분고분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후배들에게서 희망과 기대를 엿볼 수 있었던 건, 이번에 만들었다는 신문과 공모전 당선 작품집을 건네받고 나서였다.
함께 새벽 열어주지 못해 미안해
사전에 포스터까지 제작하고 나름 공을 들여 진행한 글쓰기 공모전과 그 결과물. 꽤 그럴싸하다. 그리고 29년째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봉아통신>의 제작까지. 선배들보다 학업과 실습에 치이느라, 시간이 부족했을 그네들의 노력이 곳곳에 묻어난다. 연극반·풍물패·노래패가 방을 빼고, 그 자리에 취업 준비 동아리·스펙 동아리가 들어선다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도 그나마 편집위원회의 명맥을 유지해주는 후배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의 후배들이 전공에만 파묻히지 말고 여러 분야에 오지랖을 넓히기만 바랄 뿐이다.
금주를 핑계로 자정 즈음해 자리를 뜰 당시 담금주용 소주 대병이 슬슬 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불어터진 짜장라면에 과자 부스러기 그리고 냉동만두가 안주의 전부였지만, 선후배 화합의 난장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겪어본 사람은 잘 알고 있다. 폭탄이 터지기 전 그 자리를 피하는 게 현자의 선택이듯. 다음날 내게 도착한 현장 사진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함께 새벽을 열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 전하는 것으로 갈음하려 한다.
일주일 전쯤인가. 전 KBS 사장이셨던 정연주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연세 걱정이 무색할 만큼 열정적인 강의가 고무적이었다. 강의 후 한 고등학생이 정연주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다. '기자가 되고 싶은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어떤 자질을 키워야 하는가?'라고. 이 질문을 들은 정연주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빠지셨다가 입을 뗐다. 그 답변이 후배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옮겨 본다.
"많이 읽고, 많이 쓰십시오. 소설이든 만화책이든 많이 읽고, 일기든 편지든 많이 써보고, 사소한 메모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갖는 겁니다. 기자의 눈은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호기심은 모든 분야에서 필요한 것입니다만, 특히 기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햇볕이 잘 들던 그 편집실 창가에 앉아 반쯤 졸며 월간 <말>지를 읽고 있던 그 순간, 내 안에 있는 시민기자의 작은 씨앗이 발아되기 시작했다. 후배들이여, 비록 우리가 하찮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세상을 바꿀 진실의 힘으로 커 나갈 수 있음을 잊지 마시게나. 나라가 이 꼴인데, 언론이 침묵하면 돌들이 일어선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