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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진노랑으로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고목 은행나무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늦가을의 정취로 가득한 이 노거수(老巨樹) 앞에서 마음속 어디엔가에 숨어있었던 유년시절의 당산 나무가 잠수함이 부상하듯 기억 위로 떠올랐다. 그 앞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공을 차며 뛰어 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산 나무가 발치 아래서 재잘거리고 뛰놀며 커가는 동네 아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던 것 같다.

비라도 내리면 웅~ 하는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오곤 했던 동네의 삭막한 송전탑도, 가까이에 당산나무가 있어서 덜 무서웠다. 나무가 서있는 공터에서 가끔씩 개를 잡아 구워먹는 동네 아저씨들, 흥겨운 농악과 달리 들을수록 기분이 신묘해지는 무당의 굿하는 소리··· 당산나무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쭉 살아온 내게도 나무에 대한 추억이 남아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아마도 사람의 유전자에는 나무에 대한 태생적인 그리움이 속깊이 새겨져 있지 않나 싶다.

당산나무는 그 모든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책 표지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책 표지 ⓒ 휴머니스트
나무는 늘 곁에 있지만 사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나무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며 시간의 흔적을, 우리 삶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몸에 새긴다.

이 책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은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해 온 나무들의 특별한 이야기책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한동안 잊고 살았던 추억속의 나무가 떠올라 기쁘고, 오래 전부터 사람들 곁에 사는 나무들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돼 설레기도 한다.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자리 잡고 사람보다 오래 사는 나무에는 사람살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낸 노거수의 줄기에 새겨진 나뭇결에서 사람살이의 자취를 발견하는 건, 사람과 더불어 말없이 살아온 나무의 소중함에 대한 깨우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왜 이 자리에 심었을까? 나뭇결을 한창 바라보면, 나무는 서서히 나무껍질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냅니다." - 본문 가운데

한국의 마을 풍경에서 오래된 노거수 나무는 전설이요 신화였다. 마을 어귀에 어김없이 자리 잡은 당산나무는 때로 귀목으로, 때로 마을의 섬김을 받는 신목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놀랍게도 서울에 그런 나무가 있는데,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신림동에 사는 천연기념물 굴참나무로, 아직도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도시속에서 살아남은 고목 나무를 만나면 경탄과 함께 녹록치 않았을 나무의 삶이 절로 궁금해진다.
도시속에서 살아남은 고목 나무를 만나면 경탄과 함께 녹록치 않았을 나무의 삶이 절로 궁금해진다. ⓒ 김종성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수나무로 성전환을 한 은행나무, 삼월 삼짓날이면 막걸리 스물네 말에 취하는 나무, 스님의 지팡이가 자라나 나무가 된 이야기, 애절한 사랑을 나누던 연인의 넋이 나무로 환생했다는 사연 등 동네 노거수 나무들마다 다양한 전설을 품고 있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매달아 죽게 한 해미읍성의 회화나무, 굶어 죽은 아이들의 무덤에서 자랐다는 전설을 지닌 이팝나무의 쌀밥처럼 피어난 꽃 사진은 보는 이를 울컥하게 만든다. 이렇게 나무에게 사람과 똑같은 대접을 한다거나 전설이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는 것은 나무를 아끼고 잘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저자의 나무 사랑은 시골마을의 오래된 나무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시에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나무의 가치를 알려 지켜낸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이야기, 대규모 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독극물이 주입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전주 삼천동 곰솔 이야기도 함께 들려준다.

나무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

 어떤 나무에서는 동네의 분위기와 사람살이가 엿보이기도 한다.
어떤 나무에서는 동네의 분위기와 사람살이가 엿보이기도 한다. ⓒ 김종성

나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나무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사람살이가 아름다운 곳에서 나무는 그만큼 아름답게 서있고, 사람살이가 고단하고 거친 곳에서는 나무 역시 고단한 표정으로 사람을 맞이한다. 결국 '나무가 아름다운 곳은 사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고, 나무가 죽어가는 곳에서는 사람도 살 수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 본문 가운데

자연과 어울려 사는 법을 잊은 사람들의 사회에서 나무가 살아남는 일은 끝없이 고달프다.때로는 떼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나무가 살지 못할 곳에 옮겨 심는 무지한 이들 때문이다. 2012년 8월에는 4대강 사업 지역인 남한강과 낙동강 수변에 심은 나무들이 말라죽었다. 강가나 습지에 맞는 수종을 심어야 하는데 영산홍·이팝나무 등 일반 공원에 적합한 관목을 심은 게 원인이었다.

수명이 제일 길고 지구에서 산지 3억 년이 넘은 최고참 나무인 은행나무 역시 최근 수모를 겪고 있다. 암나무에서 열리는 은행 열매의 냄새가 불쾌하다는 원성 때문이다. 국립산림과학원은 2011년, 어린 은행나무의 잎을 통해 암수를 조기에 감별하는 'DNA 성감별법'을 개발했다. 이 기술을 이용해 서울시는 세종로의 은행나무를 순차적으로 수나무로 바꿀 계획이다. 대구시도 지난 10월부터 시내 4만7천여 그루의 은행나무 가운데 암나무를 수나무로 바꾸기로 했다. 서울 서대문구는 연세대 앞 대중교통 전용지구 공사를 하면서 아예 거리의 은행나무 60여 그루를 모두 베어냈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심는 나무는 무엇일까?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소나무일까, 아니다 바로 벚나무다. 봄철 벚나무 꽃길을 조성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하는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벚나무로 몰리고 있는 것. 실제로 경기도,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등 관광산업이 먹거리인 지역에서 주로 벚나무를 심고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의 사진을 보면 다들 사람처럼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오래된 노거수 나무 일수록 보는 방향에 따라 혹은 계절에 따라 표정이 전혀 달라 신기한 기분이 든다. 그런 나무들일수록 개성적이라 나무 공부가 쏠쏠하게 잘된다. 대표적인 소나무는 물론 회색빛의 근육질 수피(樹皮)를 가진 서어나무, 세로로 주름진 골이 멋들어진 굴참나무, 껍질이 회오리치듯 굽이치는 예술적인 향나무,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새겨지는 내가 좋아하는 비자나무··· 내성천과 주산지에 여행을 갔다가 물위에서 살고 있는 왕버들나무의 매력에 푹 빠졌던 친구가 떠오른다. 

저자는 풍요로운 열매를 맺어 짐승이나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감나무가 되고 싶단다. 책을 읽으며 난 어떤 나무와 어울리는지 혹은 어떤 나무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도 즐겁다.

덧붙이는 글 | <고규홍의 나무 이야기 특강> | 지은이 고규홍 | 휴머니스트 | 2012-11-26 | 23000원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고규홍 글.사진, 휴머니스트(2012)


#한국의 나무#고규홍#노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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