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되기도 전에 '구두 디자이너'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신사동에 숍을 두고 있는 스물여덟의 젊은 여성. 그런 여성이라면 다들 그렇게 생각지 않을까? 부모 만나 호강하고 사는 게 아니냐고. 여행 다니고 그림 그리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여성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 온 삶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10년 이상 병상에 누워 지냈고, 그녀가 수능시험을 마치던 날 저 하늘로 떠나가셨다. 엄마는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을 키우느라 노점에서 분식을 팔았다. 그러니 학창시절부터 그녀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서너 대학에서 낙방하고서 그나마 힘겹게 입학한 대학에서도 2개월도 채 다니지 못했다.
김진향이 쓰고 그린 <스물여덟, 구두를 고쳐 신을 시간>에는 그녀의 이력이 들어 있다. '두 발을 내딛고 살아 온 삶의 여정'이 이력서(履歷書)의 참 뜻인데, 그녀가 살아 온 28살 인생은 실은 구두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 책 흐름을 '구두'와 '여자'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첫'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20대가 되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다양한 '첫'을 경험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20대에 첫사랑을 경험할 것이고, 첫 직업을 가져볼 것이고, 첫 월급을 탈 것이다."(본문 19쪽) 그렇다. 다들 열아홉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에 대학을 가고, 스물네 살엔 대학원에 진학가거나 직장을 취직하는 게 정 코스다. 사회적인 구조와 흐름도 그렇고, 기성세대들도 그렇게 바라본다. 혹시라도 1년이나 2년 더 늦는다면, 행여 다른 길을 간다면, 다들 큰 일 나는 줄 안다. 그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불어 닥친 인생길은 그렇게 정해진 코스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20대 때에 피팅모델을 해야 했고, 곧이어 바리스타를 해야 했고, 음악방송 CJ와 보험설계사(FP) 그리고 학교 강사 등을 거쳤다. 그야말로 다양한 이력이다.
어디 그뿐이랴? 서울에서 다단계 유혹에 넘어갈 뻔 했고, 2000만 원이 넘는 사채를 쓰다가 두려움과 눈물로 날을 지새워야 했고, 살던 집도 무너져 내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구장 아르바이트나 보험재무설계사는 그나마 평범한 경험에 속할 것이다.
"구두 공부는 공장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홍대 반디앤루니스 서점에 매일 같이 드나들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 가면 서점 구석에 가서 구두 관련 책들을 뒤적거리고, 읽다가 중요하다 싶은 것은 아이패드로 찍어가곤 했다(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걸 알긴 했지만, 책 도둑은 아니라고 한다고 괜한 변명을 해 본다). 물론 진짜 소장해야겠다는 책들은 서사 카페 책꽂이에 꽂아두고서 손님이 없을 때마다 짬짬이 읽어갔다."(본문 69쪽)이 부분을 읽다가 괜히 내 마음이 아려왔다. 마치 20대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27살 늦깎이 대학에 들어갔던 나도, 돈이 없던 그 시절, 큰 책방에서 짬짬이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을 종이에 옮겨 적었으니, 그녀의 도둑책 읽기에 내 마음이 쏠린 것이다.
누군가는 책 천 권을 읽으면 대학 졸업장을 받는 것과 같다고 했던가? 그녀가 그만큼의 책을 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미 대학을 졸업한 것과 같을 것이다. 이른바 '구두대학' 말이다. 서울로 올라와 '피팅모델'을 하던 그녀는 구두 디자이너보다 더 많은 구두를 신어봤고, 잘못 만들어진 구두를 신는 고충도 누구보다 잘 안다. 더욱이 구두 디자이너보다 구두를 더 잘 만들기 위해 동교동 카페를 마치고 끼니까지 거르며 성수동 공장으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물건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어도 살 수는 없는 경험에 투자하는 것이다. 사실 그 비싼 물건들을 살 때의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은 정말 무궁무진하다. 모자란 공부에 투자하거나,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는 책을 사서 읽을 수도 있고, 구석구석 여행을 다닐 수도 있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이렇게 차곡차곡 경험이 쌓이다보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긴다."(본문 198쪽)그녀가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비록 절박한 인생 터널을 거쳐 터득한 깨달음이지만, 그녀는 요즘의 청소년들이 모두 불나방처럼 하나의 불빛으로 모여드는 걸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녀는 이 땅의 청소년들이, 검은 구두와 같은 단 하나의 삶의 방식보다, 빨간 구두처럼 자기만의 색깔 있는 이력서를 써내려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도 그녀는 1킬로미터 어플리케이션안에서 '탑팸'(Top Family)이라는 소모임의 리더로 다양한 재능기부자들과 함께 곳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또한 구두 디자이너에다 강사 그리고 바이탈 커뮤니케이터로 최선을 다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세이캐스트에서 '김진향의 힐링 멜로디'까지 진행하고 있다.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빨간 구두를 신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에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