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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10평 주말농사 3년, 시골에 세 마지기 땅을 마련해 농사 지은지 올해로 3년, 도합 6년이 내 농사 경력의 전부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기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좀 배기긴 했지만, 팔다리의 근육에 의지해 농사를 지어왔다.

1년 내내 내게 필요한 농기구라고 해봐야 낫·호미·괭이·삽 정도가 전부다. 지난해 하도 풀에 치여 올해 고구마 밭에 비닐을 조금 쓰긴 했지만, 나머지 밭에는 비닐은 물론 거름도 거의 주지 않았다. 지난 6월, 호박 잎이 하도 힘이 없어 보이자 보다 못한 장모님이 닭장에서 닭똥을 퍼다 주셔서 그걸 조금 뿌려 줬더니 힘을 바짝 냈던 기억이 난다. 거름을 듬뿍 쓰고, 거기에 화학비료까지 사용하면 작물이 잘 자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요즘 거름은 예전 내가 어릴 때 쓰던 그런 퇴비가 아니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퇴비는 부숙이 덜 된 탓인지 여전히 병균이 살아있기도 하고, 가축에게 먹인 항생제가 그대로 남아있기도 해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작물 성장이 더디든, 가을 소출이 형편 없든 나는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키우는 편이다.

기계도 마찬가지다. 경운기는 예전에 많이 사용하던 기계고, 요즘은 트랙터가 경운기를 대체하고 있다. 이 녀석의 능력은 실로 막강하다. 농사에 있어서 거의 만능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나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트랙터가 우리 밭에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 갈지 않는 땅, 무경운 땅에 트랙터가 들어오면 내가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두둑이 망가지고 트랙터의 무게로 인해 땅 속 동물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 이 '괴물'의 능력을 목격할 때가 있다. 이번에 콩을 털 때가 바로 그때였다. 내가 손수레로 열 번 이상 나르는 걸 단 한 번에 날랐다.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만나고 나니 잊을 수 없는 '기계의 힘'

 말린 서리태를 옮기는 구 이장님 트랙터. 경운기보다 순발력과 마력이 앞서고, 수송력까지 밀리지 않는다(홍천, 2013년 11월 15일)
 말린 서리태를 옮기는 구 이장님 트랙터. 경운기보다 순발력과 마력이 앞서고, 수송력까지 밀리지 않는다(홍천, 2013년 11월 15일)
ⓒ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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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무비료·무거름 그리고 무동력의 농사법을 지향한다고 해도 한 번 기계를 사용하면 그 효율성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올해 콩농사가 그 유혹에 완벽하게 넘어가버린 사례가 돼버렸다.

지난해 가을, 콩을 수확한 땅에 헤어리베치를 심어 땅의 지력을 높이고 질소 고정을 유도시킨 뒤 올해 6월에 춘천 사는 후배와 함께 죽을둥 살둥 땀을 한 바가지씩 흘리며 낫질로 헤어리베치를 베 두둑을 덮어줬다.

그 밭에 아내와 함께 쥐눈이콩과 서리태를 심고, 7월께 무릎 높이까지 올라온 풀을 다시 낫으로 베어줬다. 그렇게 풀과 함께 자란 콩을 10월 말 회사 동료의 대민지원(?)에 힘입어 낫으로 콩을 벤 것까지는 '무동력의 농사'를 실현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영하 5도에서 10도를 넘나드는 강원도의 11월 기온, 회사에서 일을 하며 근심하다가 주말이 돼서야 시골로 향할 수밖에 없는 주말농부의 한계가 겹치면서 이웃에 사시는 구 이장님댁 아저씨의 선의에 나는 그만 '기계의 유혹'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헤어리베치. 보라색 꽃이 아름답다. 동네 벌들은 다 모여들었는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장관이다. 한여름 날씨를 보였던 6월 어느 주말, 후배와 낫으로 베어 두둑을 덮는데, 정말 이보다 힘이 드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홍천, 2013년 6월 15일)
 헤어리베치. 보라색 꽃이 아름답다. 동네 벌들은 다 모여들었는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장관이다. 한여름 날씨를 보였던 6월 어느 주말, 후배와 낫으로 베어 두둑을 덮는데, 정말 이보다 힘이 드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홍천, 2013년 6월 15일)
ⓒ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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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는 전통적인 도리깨로 콩을 털었다. 무동력의 농사는 멀고 험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 일을 하고 나서는 주중 회사에서 노트북 자판조차 두드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우리 아이들은 처음 해보는 도리깨질을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그 녀석들이야 잠깐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끝을 봐야만 하는 나와는 애초부터 마음가짐이 달랐다.

'조금만 늦어 눈이라도 맞으면 어쩌나…', 서울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불안했다. 결국 지난해 12월 3일, 가까스로 콩을 털었다. 콩을 털어버린 뒤 내린 함박눈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으로 콩농사가 끝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예상치 못한, 길고 지루한 콩 선별작업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쟁반에 콩을 깔고 돌과 찌꺼기들을 걸러내는 작업, 이건 서울 한복판의 고층 아파트 실내에서 있을 법한 풍경과는 사뭇 이질적인 모습이다. 이 일이 어찌나 더디던지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올 지경이어다. 흰콩이야 콩이 크니까 그래도 좀 낫다. 이놈의 자그마한 쥐눈이콩을 큼지막한 성인 손으로 하기에는 폼도 나지 않거니와 능률도 빵점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값으로 끝내는 콩 고르기

 눈과 손으로 하는 쥐눈이콩 선별작업. 말 그대로 인내과 끈기를 요한다(서울, 2012년12월 9일).
 눈과 손으로 하는 쥐눈이콩 선별작업. 말 그대로 인내과 끈기를 요한다(서울, 2012년12월 9일).
ⓒ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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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앞둔 11월 중순의 어느 목요일. 늘 선의를 베풀어 주시는 이웃집 아저씨로부터 회사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날 밤 비 소식이 있어 우리집 콩단을 모두 당신의 앞 마당으로 옮겨와서 천막으로 덮어 놨다는 것이다. 또 콩 터는 기계가 있으니 내가 올 수 있으면 좋고 없으면 혼자서라도 털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하시는 게 아닌가. 혼자 그 일을 하게 하실 수는 없는 일, 급히 연차를 내고 금요일 시골집으로 달려와 그 다음날까지 내가 심은 쥐눈이콩과 서리태 모두를 기계로 털어버렸다.

그리고, 지난 23일. 콩을 깔끔히 선별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지난 겨울 내내 했던 지난한 작업을 단 하루만에 끝냈다. 기계의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주인공은 콩 선별기라는 녀석이다. 홍천농업기술센터에 이 기계가 석 대 있는데, 한콩용으로 두 대, 검정콩 용으로 한 대가 있었다. 이 '괴물'은 주중 회사에 다니는 내가 3개월 동안에 걸쳐 해야할 일을 불과 30분 만에 해치웠다. 콩농사를 짓는 많은 동료 농부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2시간가량 기다리긴 했지만, 그 기다림은 충분히 달콤했다. 거기다가 콩 네 자루(약 150kg)를 선별한 댓가로 지불한 금액이 불과 프렌차이즈 커피집에서 사 마실 수 있는 아메리카노 한 잔 값보다 싸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기계로 하는 콩 선별, 콩의 크기에 따라 세 종류로 나온다. 오른쪽이 가장 큰 놈. 서리태는 사진처럼 큰 녀석이 가장 많지만, 쥐눈이콩(약콩)은 반대로 가장 왼쪽 칸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온다(홍천농업기술센터에서 2013년 11월 23일)
 기계로 하는 콩 선별, 콩의 크기에 따라 세 종류로 나온다. 오른쪽이 가장 큰 놈. 서리태는 사진처럼 큰 녀석이 가장 많지만, 쥐눈이콩(약콩)은 반대로 가장 왼쪽 칸으로 거의 대부분이 나온다(홍천농업기술센터에서 2013년 11월 23일)
ⓒ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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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년에도 이 녀석을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록 내가 무동력 농사를 지향하지만, 이 기계만큼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편이 낫겠다. 그만큼 콩선별기는 강력하고 위대했다.

그렇지만 내가 석유 없는 농사, 무동력 농사를 아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나는 다시 도리깨를 부여 잡고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어깨가 빠지도록 콩을 털고, 추운 겨울 내내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하나하나 멀쩡한 콩만을 골라내는 작업을 할 것이다. 그 옆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언젠가 전업 농부를 꿈꾸는 내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완성될 게다. 아마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석유는 유한하니까 말이다.

 기계로 하는 콩 선별. 뒷편으로는 잘라진 녀석이나 불필요한 덤블이 나온다(홍천농업기술센터에서 2013년 11월 23일)
 기계로 하는 콩 선별. 뒷편으로는 잘라진 녀석이나 불필요한 덤블이 나온다(홍천농업기술센터에서 2013년 11월 23일)
ⓒ 이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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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서리태보다는 쥐눈이콩이 농업기술센터에서도 인기만점이다. 작고 윤기나는 이 녀석을 보더니 촌로의 어르신들도 연신 어떻게 키웠는지 어떻게 먹는 것인지 물어본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거의 찌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다들 기특한 듯, 잘 키웠다고 덕담을 해 주신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http://www.oh-moo.com/)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주말농부#쥐눈이콩#서리태#콩 선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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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 대로 살자!" 주중에는 서울에서 회사다니고, 주말에는 홍천에서 농사 지어요. 근래에는 정년 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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