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배꼽 잡는 책 하나 소개해드립니다. 모두 실화로 구성돼 엄청난 몰입도를 제공하지요.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실제로 있었다'란 조건이 붙으면 빠져들기 마련이니까요. 거기다가 어지간한 예능 프로그램 뺨치는 유머감각까지 겸비했습니다. 이 어찌 안 읽을 수 있겠습니까. 제목부터 말씀드릴게요. <권력과 필화>에요.
글이나 노래와 같은 창작물을 통해 범법행위가 일어나는 사건을 필화라고 하는데요. 외국에서는 주로 필화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등의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합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안보 관계법을 위반한 시국사범의 성격을 띠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군부 독재 시기에 이런 일이 많았지요.
책에 나온 사건들은 모두 한승헌 변호사가 실제 맡았던 것들입니다. 17건의 필화 사건이 소개돼 있는데요. 하나하나 주옥같습니다. 아마 이때 '창조경제'가 화두였다면 '창조논리'상은 모두 안기부와 보안사, 검찰청이 싹쓸이했을 겁니다. 더불어 신춘문예까지요. 소설 쓰는 솜씨가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거든요.
몇 가지 소개해 드릴게요. 참, 미리 경고하지만 예비 소설가분들은 읽지 마세요. 천재 소설가들의 솜씨에 낙담하다 스스로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거든요. 전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원망 마세요.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사람은 모두 간첩이냐"월간지 <한양>은 국내의 이름난 문인 논객들이 기고하던 잡지였습니다. 그런데 긴급조치 1호가 터진 직후에 이 잡지에 기고한 문인 5명이 구속됩니다. 뜬금없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혐의로 말입니다. 우연일까요. '반유신 문학인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이 포함돼 있네요. 하루아침에 이들은 이름하여 '문인간첩단'이란 거대한 용공조직으로 둔갑합니다. 이들이 <한양> 발행인에게 돈을 받고 국가를 전복하려 했단 겁니다.
당연히 기소 논리는 부실했습니다. 밀리던 검찰은 비장의 카드를 꺼냅니다. "어느 간첩이 '내가 간첩이다'라고 정체를 드러내겠느냐"는 해괴한 논리를 펼칩니다. 한승헌 변호사는 "그렇다면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사람은 모두 간첩이냐"라고 맞받았지요. 법정에는 쟁쟁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나와 결코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언했습니다. 더 웃기는 사실은 <한양>의 창간호에는 '5·16 혁명공약'이 실려 있었단 거죠.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승헌 변호사가 직접 옥고를 치른 사건입니다. 1975년 2월,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강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절대다수가 찬성해 유신헌법의 국민적 지지를 확인했다며 이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석방했지요. 무슨 논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일단 차치하고요.
이때 김지하 시인도 풀려났죠. 그러나 <고행-1974>란 글을 신문에 기고해 다시 재수감됩니다. 김 시인을 변호하려 했던 한승헌 변호사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사임 요구를 받습니다. 두 번에 걸친 협박성 요구를 거절했지요. 그러자 갑자기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됩니다. 재판을 서두르는 게 심상치 않았던 변호인단은 판사에 대해 기피신청을 냈지요. 이를 기각하며 내세운 법원의 논리가 걸작입니다.
"모든 국민은 헌법에 의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으므로 재판 강행은 피고인에게 이롭다."(본문 56쪽)'가난'에서 '용공'으로 진행된 기소 논리물론 반공법이란 틀에 박힌 논리만 사용된 건 아니었습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죠. 굉장히 참신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존의 곡에다 가사를 바꿔 노동현장에 불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허병섭 목사는 이미자씨의 <울어라 열풍아>라는 곡에 <돌아라 미싱아>란 가사를 붙여 비매품으로 배포했습니다. 그러자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기소를 당해 실형까지 선고받습니다. 항소심에서 증인과 한승헌 변호사가 나눈 대화입니다.
변호인: "방송에서도 지정곡에다 노래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증인: "예. 텔레비전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변호인: "그런 경우에 가사 바꾸어 부르기를 잘한 사람에게는 상품을 주던가요, 벌을 주던가요?"증인: "푸짐한 상품을 주는 것으로 압니다. 벌 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본문 59쪽)80년대에도 이런 코미디는 계속 됐는데요. <민중교육>이란 부정기간행물에 실린 현직교사의 글 두 편이 용공이란 이유로 필자와 주간이 기소당합니다. 공소장의 논리전개는 현란했습니다. '가난-불만-현실비판-용공'으로 진행되더니, 근거는 '두 필자의 가정형편이 어렵다'네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울고 갈 논증입니다. 재판에서도 가공할 만한 코미디의 대향연이 펼쳐집니다. 검사는 피고인을 몰아붙입니다.
검사: "피고인은 북한 공산집단이 대남적화통일을 목표로 하는 반국가단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피고인: "모릅니다."검사: "아니, 북괴의 대남적화전략도 모른단 말이오?"피고인: "북한의 신문을 볼 수도 없고 방송도 못 듣게 하는데 어떻게 북한의 대남전략을 알 수가 있단 말입니까."검사: "구체적인 것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대략적인 것은 알고 있을 것 아니오?"피고인: "대략적인 것은 좀 압니다."검사: "방금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더니 대략적인 대남전략은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피고인: "예비군훈련 가서 들었습니다."(본문 63쪽)다른 피고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사의 허를 찌르는 매서운 심문에 벌벌 떨며 솔직히 털어놓네요. 이 검사에게 '심문 대마왕'이란 칭호를 선사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리 최첨단 심문 기법을 동원하셨는지.
"예, 언젠가 텔레비전 뉴스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나와서 검사님께서 반국가단체라고 하는 곳의 우두머리를 가리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 각하'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듣고 보았습니다. 그때 문득, 아하, 대통령이 저렇게 주석 각하 어쩌고 하는데 어떻게 반국가단체가 되겠느냐, 이젠 틀림없이 반국가단체는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일 반국가단체라면 대통령부터 국가보안법 딱지를 붙여야 될 것 아니겠어요?"(본문 64쪽)'진달래꽃'이 '적화통일'을 상징한다는 작품해석너무 음울한 사건만 나열할 것 같은데요. 미학적인 사건도 있었어요. 예술가들과 국가의 예술적 견해가 정면으로 부딪힌 사건입니다. 검사는 예술혼을 불살랐어요, 새하얗게. 회화에 조예가 굉장히 깊으셨나 봐요. 문외한인 저는 그의 심미안에 그저 감탄만 나옵니다.
미대를 다니던 두 학생이 그린 그림이 발단이었지요. 8·15를 기념해 가로 6미터에 세로 3미터의 대형 걸개그림을 그렸는데요. 전시 도중 작품은 경찰에게 탈취당하고 그린 이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됩니다. 그림 전체에 진달래꽃이 그려져 있는데, 이게 '북괴의 상징'이며 '적화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본 거죠. 경찰 의견서에는 진달래꽃이 북괴의 국화라고 적시돼 있었다는군요. 매우 창조적인 작품 해석이지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검사는 육법전서를 읽을 게 아니라 화가를 했어야 됐다고 봐요.
이에 한승헌 변호사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애송하는 사람은 모두 용공이냐"고 반문했답니다. 거기다 심리종결 직전에 입수한 한 잡지에서 북한의 국화는 목란이란 사실도 알게 됐지요. 그러나 둘은 유죄를 판결 받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올 때까지 항소를 포기한다"는 말을 남기고요. 뭐, 모르긴 몰라도 아직 항소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테고, 상대적으로 젊은 분들은 "이런 일이 있었어? 말도 안돼"라고 반응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공통적으로 '설마 앞으로 그럴 일이 있겠어?'란 판단을 내리고 계시지는 않나요. 저도 그래요. 안 일어나겠죠.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에이, 설마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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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화는 있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없다고 다행한 것도 아니다. 전자가 의당 해야 할 비판과 저항의 살아 있음의 증좌일 수도 있고, 반면에 후자는 압제 앞에 항복한 침묵과 굴종의 반사적 현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1972년 봄 한 강연에서 한승헌 변호사 - <권력과 필화>에서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권력과 필화>, 한승헌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13.11, 2만3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