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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쿠사 섬의 크리스천관을 찾게 된 연유

 아마쿠사 지도
 아마쿠사 지도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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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에 있는 예성문화연구회는 일본의 구마모토 일한문화교류연구회와 7년째 교류를 하고 있다. 이들 두 민간단체는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학술대회를 열고 문화유산 답사를 한다. 금년에는 우리가 일본을 가는 해다. 지난 6월초 일본으로부터 학술대회 일정과 주제에 대해 구체적인 통보를 받았다. 11월 23일부터 26일까지 아마쿠사(天草)에서 '일본과 한국의 기독교 수용사'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은 '나가사키와 아마쿠사의 천주교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학술대회를 겸하고 있어 더 의미가 크다.

지난 23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으로 갔다. 그곳에서 구마모토 일한교류연구회 멤버들이 우리 일행 9명을 픽업해 아마쿠사로 데리고 간다. 아마쿠사는 1566년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된 섬으로 유명하다. 아마쿠사 섬은 크게 세 개로 이루어져 있다. 오야노시마(大矢野島), 아마쿠사 가미시마(天草上島), 아마쿠사 시모시마(天草上島). 우리는 큐슈 고속도로를 통해 마츠바시(松橋)까지 간 다음, 266번 지방도를 타고 우토(宇土)반도로 들어선다. 이 길은 해안을 따라 나 있어 경치가 참 좋다.

 미스미 서항 풍경
 미스미 서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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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반도의 마지막 마을이 미스미항(三角港)이다. 이 항구에서 다섯 개 다리를 건너학술대회장인 아마쿠사 시모시마의 혼도항(本渡港)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혼도는 아마쿠사의 시청이 있는 곳으로, 이곳 국제교류회관에서 24일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우리는 24일 오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 혼도항에 있는 기온바시(祗園橋), 크리스천관(切支丹館), 묘도쿠지(明德寺), 마루오(丸尾燒) 도자기 공방을 찾았다.  

가메코(龜子) 박물관장 통해 아마쿠사 시로의 이야기를 듣다

 아마쿠사 시로 진중기
 아마쿠사 시로 진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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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쿠사 크리스천관은 성산공원(城山公園)에 있다. 성산이라는 이름을 통해 이곳에 옛날 아마쿠사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가메코 관장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천관은 시립박물관으로, 아마쿠사 기독교의 전래와 수용, 수난과 잠복, 부활의 전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먼저 다목적실에 들어가 아마쿠사의 기독교 역사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본다. 다행히 우리말 녹음이 있어 내용을 훨씬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말 더빙은 이곳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는 충청대학교 관광학과 학생이 했다고 한다.

영상을 보고 나서 우리는 2층 전시실로 향한다.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깃발이 모셔져 있다. 이것이 크리스천박물관의 상징인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 진중기(陣中旗)다. 아마쿠사 시로는 1637년 일어난 아마쿠사 시마바라(島原) 반란을 이끈 대장이며, 진중기는 그 전쟁에서 사용하던 깃발을 말한다. 이 진중기는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이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유물이다.

 아마쿠사 시로 조각상
 아마쿠사 시로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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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역사는 161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실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천주교 금지령을 내린다. 이후 외국인 신부들을 추방하고,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개종을 강요한다. 더욱이 1635년과 1636년 아마쿠사 사람들은 태풍과 흉작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아사지경에 이르게 된다. 천주교 탄압과 과도한 세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1637년 10월 25일 당시 16세에 불과하던 아마쿠사 시로를 총대장으로 봉기를 일으킨다.

봉기에 참가한 사람은 37000명이었다. 그는 봉기군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거늘 어째 우리가 소나 돼지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는 목숨이나 쌀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평등하게 사는 세상입니다. 신의 깃발 아래 새로운 나라를 세웁시다."

이때 사용한 진중기에는 '성체는 찬미 받으소서'라고 쓰여 있다.

 시로의 난 이야기
 시로의 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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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에도(江戶)의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는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重昌)를 대장으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한다. 봉기군은 아마쿠사의 시마고(島子: 현 有明町), 혼도(本戶: 현 本渡)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토미오카(富岡)성까지 공격을 했다. 그리고 12월 바다를 건너 시마바라의 하라(原)성으로 들어가 장기전에 대비한다. 1638년 1월 1일 진압군 대장 이타쿠라가 전사했고, 막부에서는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信綱)를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처음 마츠다이라는 심리전을 편다. 먼저 '크리스천이 아닌 자는 성 밖으로 나와라. 그러면 목숨을 보장하고 세금도 줄여주겠다'는 화살편지를 보낸다. 이에 아마쿠사는 '우리는 전원 크리스천이다'라는 답신을 보낸다. 그러자 마츠다이라가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아마쿠사 시로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항전의지를 다진다. 이에 마츠다이라의 막부군(幕府軍)은 1638년 2월 28일 12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 총공격을 감행한다. 그리고 다음날 성은 함락되었고, 포로가 된 자들은 모두 참수되고 말았다.

 그림으로 표현된 아마쿠사 시로
 그림으로 표현된 아마쿠사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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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으킨 천주교인들의 봉기를 아마쿠사 사람들은 '시로의 난 이야기(四郞亂物語)'라는 필사본을 통해 전하고 있다. 크리스천 박물관 전시실은 시기별로 유물과 전시패널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를 보여준다. 1600년 전후의 유물로는 돌 십자가, 막새기와, 전투에 참가했던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의 편지 등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 만들어진 아마쿠사 시로의 조각상과 초상이 눈에 띈다. 한마디로 시로는 미소년으로 표현되어 있다.

19세기 중반에야 천주교 신앙의 부활이 이루어지다

아마쿠사 시마바라 반란 이후 220년간 천주교는 지하로 잠복(潛伏)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 잠복 기독교도를 일본 사람들은 카쿠레 키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라 부른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불교도로 가장해 살았다. 선재동자의 시중을 받는 관음보살을 성모자상으로 변형시켜 그를 대상으로 기도했다. 이것을 마리아 간논(觀音)이라 부른다. 그들은 또한 다락방에 숨어 몰래 합동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천주교도들은 매년 행하는 후미에(踏繪)라는 탄압도 이겨냈다. 후미에는 성모 마리아상을 새긴 목판이나 동판을 밟게 하는 행사로, 이를 통해 천주교 신자를 가려냈다고 한다. 그림을 밟지 않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고, 처벌이 두려워 그림을 밟은 사람은 방면되었다. 그러나 그림을 밟은 사람들 대부분은 돌아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신앙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들은 또한 병과 거울 등 생활용품에도 은밀하게 십자가를 새겨 넣었다. 예를 들어 병에 산(山)타(田)마루(○)야(屋)라는 말을 표기하기도 했다.

1805년 아마쿠사 서해안의 4개 마을에서는 5200명의 천주교인이 발각되어 '아마쿠사 잔당'으로 불렸으나, 다행히 시마바라 촌장이었던 우에다(上田) 덕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종교에 대한 관용정책이 취해지기 시작했다. 1873년에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잠복했던 천주교는 지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1876년 마르본 신부가 아마쿠사의 오에(大江)를 찾아 천주당을 짓기 시작했고, 1880년에는 페리에 신부가 사기츠(崎津)에 천주당을 짓기 시작했다. 1884년 오에 천주당이 완공되었고, 1886년에는 사기츠 천주당이 완공되었다.

 오에 천주당
 오에 천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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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츠 천주당.
 사기츠 천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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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5월 가르니에 신부는 오에 천주당을 로마네스크식으로 다시 짓기 시작했고, 이듬해 3월 천주당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었다. 사기츠 천주당은 1927년 부임한 신부에 의해 토지가 매입되고, 1934년 하르부 신부 때 데츠가와 요스케(鐵川與助)의 설계와 시공으로 지어졌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사기츠 천주당은 일본의 멋진 풍경 100선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현재 이들 천주당을 찾는 신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게 바로 현재 일본 천주교가 겪는 어려움이다.     

크리스천관을 떠나며

 아마쿠사 크리스천박물관
 아마쿠사 크리스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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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구경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2층 전망대로 나가게 된다. 이곳에서는 아마쿠사의 중심도시 혼도 시내와 항구를 조망할 수 있다. 동쪽으로 보이는 항구에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남쪽으로는 아마쿠사 상도와 하도를 잇는 세토(瀨戶)대교가 보인다. 그리고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저 멀리 운젠(雲仙) 화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이들을 보고 나서 우리는 박물관 옆 순교공원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천주교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사람들의 뼈가 묻혀 있다.

그리고 이들 무덤을 알메이다(Luis de Almeida) 신부와 예수 그리스도가 지키고 있다. 알메이다 신부는 1566년 아마쿠사를 지배하던 5인방 중 한 사람인 시키 린센(志岐麟泉)의 초청으로 아마쿠사에 왔고, 포교와 교육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는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1569년에는 이곳의 지배자인 아마쿠사 요시타네(天草尙種)가 세례를 받았고, 이후 천주교가 빠른 속도로 확대 보급되었다. 1577년 아마쿠사 지역에는 교회수가 30개를 넘었다고 한다.

 알메이다 신부
 알메이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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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년 알메이다 신부는 고우치우라(河內浦: 현재 가와우라 河浦)에서 선종했다. 그래서 이곳 크리스천관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이다. 아마쿠사의 콜레지오(Collegio)관, 로자리오(Rosario)관을 방문하면서 우리는 아무사에 천주교를 전한 알메이다 신부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더 듣게 되었다. 그의 포교 덕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경 아마쿠사 지방에는 60개의 교회와 33000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쿠사#크리스천박물관#아쿠사 시로#알메이다 신부#카쿠레 키리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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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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