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에는 신라시대 유적에 가려서 다소 빛을 보지 못하는 유적들이 주변에 너무나 많다. 조선시대 유적들이 그러한데, 조선시대 역사적인 인물들을 생각할 수 있는 장소들을 소개한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는 최진립 장군의 생가인 충의당이 있다. 최근 최진립 장군 동상 제막식은 지난 4월 27일 있었다. 장군의 기마상 충노 옥동과 기별의 형상이 함께 새겨져 있다. 바로 앞에는 충노 옥동과 기별의 불망비도 있다.
바로 옆 충의당은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장군이 살았던 가옥의 사랑채라고 한다.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이라 했는데 1760년 건물을 수리한 후 충의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오른쪽에는 제향공간이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배치방법을 지니고 있다. 가옥 내에는 각종 석조물들도 많고 '신사명변'이란 현판이 달린 것도 보이는데 주용에서 인용한 듯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는 뜻이다.
입구에는 인조가 내렸다는 사제문이 큰 돌에 새겨져 있다. 조용한 마을로 내남면 사무소를 지나 삼성고등학교 왼쪽골목으로 계속 더 들어가면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정려비각이 있고 그 뒤에 개무덤이라 불리는 큰 고분같은 무덤이 있다.
여기에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경주가 배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무덤의 자리에 돗대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마을이 길할 것이라는 징조로 여겨왔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령스럽게 생각하여 마을에 풍년이 들고 질병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양동리 양동마을에서는 그곳의 못에 이 바위가 비치기만 하면 흉년이 들어서 마을 사람들이 의논하여 이조 마을에 몰래 와서 그만 이 바위를 깨뜨려 버렸다고 한다.
이조 사람들은 애통해 하며 이 바위 조각들을 모아서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고 그 후 사람들은 이 무덤을 개무덤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도 개무덤이라는 진입로 표지석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개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지세에 관한 풍수 이야기인 듯 하다.
정무공의 관련된 유적은 길 건너 인근의 용산서원과 입구의 신도비각이 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숙종 37년(1711)에 '숭렬사'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 구조는 전학후묘로 앞면에는 공부하는 공간인 민고당, 뒷면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숭렬사가 있다. 서원 오른쪽에는 관리사가 있고, 서원 입구에는 신도비각이 있다.
나라에서 사당 묘액을 숭렬사우(崇烈祀宇)로 내려주었고 용산서원 편액은 이서가 썼다고 한다. 현판 흰 바탕에 검은 글씨는 사액된 의미라 하고 오래된 기풍이 느껴진다. 옆에는 현재 전통음식, 한옥 체험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수리뫼라는 식당이 있다. 가격은 다소 비싸도 한정식과 전통음식의 맛을 제대로 이해하고 음미하기에 충분하다.
마을 입구에는 신도비각이 있는데 이 신도비의 발문은 노론 조명겸이 썼다.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다시금 주목 받게된 이 비석에는 밑에 귀부가 기존에 조선시대 귀부가 아닌 통일시라 시대 작품으로 추정하여 최근 발표된 관련 자료에는 통일신라 귀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신도비 건립 내력을 기록한 문루일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석공이 통일신라시대 귀부를 본떠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신도비는 1740년에 함께 만들어졌으며, 글자를 새긴 몸돌은 치술령에서 캐왔고, 귀부는 부근에 있는 남산 백운대에서 구한 것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귀부를 살펴보면 제작 시기를 7세기 후반의 8세기 중반 작품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제 귀부는 조선시대의 모방작이 아닌 통일신라 작품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다.
마을 입구에는 가격도 저렴하고 푸짐한 용산회식당이 유명한 곳으로 알려진 식당이다. 역사 속에 인물에 대해서도 알고 경주 외곽이기는 하나 신라시대 유적이 아닌 조선시대 이런 가옥과 서원들도 한번 찾아 가보면 문화재를 접하는 방법이 달라질 것이다. 주변에 늘 보던 유적보다 새로운 유적현장들도 한 번 찾아 나서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