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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창동의 카페 '해거름'
마산 창동의 카페 '해거름' ⓒ 이상옥

     해 질 무렵
     창동 '해거름' 불이 켜지면
     추억이 그리운 이 하나 둘
     추억의 계단을 오르고
              -이상옥의 디카시 <SUN SET>

며칠 전 동료 성재표 교수가 내게 취재할 곳 한 곳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성 교수는 그곳에서 LP음악을 듣고 매료된 듯했다. 50대 후반으로 가는 그도 젊은 시절에는 통기타를 치며 멋과 낭만을 구가했던 터라, 아마 그곳에서 젊은 날의 추억에 잠겼나 보다.

경남 마산 창동 소재 해거름 카페. 어제 성 교수와 나는 해질 무렵 '해거름'을 찾았다. 마산은 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 등으로 경남 최대의 중심상권을 형성하며 그 중심에 창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마산에 창동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창동은 경남의 심장부로 언제나 젊은이들로 출렁거렸다. 그러나 인근 창원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언제부턴가 마산 도심지는 서서히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마산의 명물 불종거리와 창동도 추억의 공간으로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서울에 명동이, 마산에는 창동이 있었다

마산, 진해, 창원이 창원시로 통합되면서 창원시는 '글로벌 명품 메가시티, 창원' 시대를 열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지만, 마산은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창원시에서 창동예술촌 만들기 프로젝트를 기획해 예전의 창동의 명성을 회복하고자 애를 쓰고 있지만, 해거름의 창동은 아직은 한산했다.

창동은 유독 정겨운 골목길이 많다. 차를 해거름 인근 주차장에 세우고 골목길을 따라 조금 가니 해거름 카페는 벌써 불을 켜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2층 계단으로 오르니, 먼저 온 손님 두 분이 있고, 해거름 지킴이 고굉무 사장이 우리를 맞아 준다.

우리는 가자마자 바로 추억을 노래를 몇 곡 신청했다. 정미조의 '개여울', 이필원의 '약속' 등을 성급하게 들려달라고 했다. LP판으로 듣는 음악은 역시 요즘 디지털음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해거름 지킴이 고굉무 사장이 음반을 고르고 있다
해거름 지킴이 고굉무 사장이 음반을 고르고 있다 ⓒ 이상옥

해거름 지킴이 고굉무 사장. 그는 풍채가 좋고, 넉넉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1980년 문을 연 창동의 해거름은 경남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인 카페의 효시라고 알려져 있다. 고굉무 지킴이는 해거름의 2대 주인장이다.

해거름은 '해질 무렵'이란 순우리말이다. 아이들이 해질 무렵이면 친구들과 놀다가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듯이 언제나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해거름이다. 해거름을 창업한 분은 정의교 사장이다. 정 사장 당시 해거름은 100가지 종류의 칵테일과 50가지의 위스키 등 각종 술을 구비하고 1500장의 레코드판을 보유하여 명실상부한 음악과 추억의 카페로써 마산 창동의 명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경남 카페의 효시 해거름의 2대 지킴이 고굉무 사장

그러던 정의교 사장이 불의 사고로 카페를 운영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서 뜻하지 않게 2대 사장 고굉무 지킴이가 정의교 사장이 앉았던 턴테이블 앞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고굉무 사장 역시 해거름의 단골이었는데, 농담으로 해거름 카페를 저희들에게 물려 달라고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우연찮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고굉무 사장은 2008년 해거름을 인수하여 지킴이로 해거름의 2대 주인으로 1대 주인의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하며 해거름을 지키고 있다.

고굉무 사장 역시 단골손님이 좋아하는 곡을 기억해두었다가 틀어준다. 손님이 들어온다고 말로 인사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그냥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80년에 첫발을 내디딘 해거름은 제1대 지킴이 정의교 사장이 27년, 2대 지킴이 고굉무 사장이 7년으로 34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뜻하지 않게 해거름을 맡게 된 고 사장은 이제 경제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해거름 운영만으로는 생활하게 힘들기 때문에 낮에는 의류업을 하고 있다.

고굉무 사장은 생활은 의류업으로 하고, 창동의 문화적 상징인 해거름 경영은 봉사활동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걸 기사로 써서 판넬로 하여 해거름에 게시해두자고 해도 굳이 사양한다. 인위적으로 해거름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것. 

가톨릭 신자인 고굉무 지킴이는 해거름만큼이나 융숭 깊어 보였다. 세상살이에 찌들고 지친 이들이 해거름으로 찾아오면 말벗이 되어주며 LP판으로 추억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보람으로 느낀다. 고 사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다보니, 그걸 책으로 묶어도 될 정도이다. 조만간 해거름 이야기를 책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정호 LP음반자켓. 해거름에는 희귀음반이 된 LP음반을 1,500장 소장하고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수장되는 바람에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억의 명반들이 아직 즐비하다.
김정호 LP음반자켓. 해거름에는 희귀음반이 된 LP음반을 1,500장 소장하고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수장되는 바람에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억의 명반들이 아직 즐비하다. ⓒ 이상옥

 LP판 옆으로 술병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술병 대신 LP음반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것이 고굉무 사장의 꿈이다.
LP판 옆으로 술병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술병 대신 LP음반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것이 고굉무 사장의 꿈이다. ⓒ 이상옥

해거름 한창 전성기에는 LP판이 1500장이나 되던 것이 수장(水葬)되는 사고를 만나 절반이 넘게 유실되어서 아쉬움이 크다. 그걸 안타깝게 여긴 단골손님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LP판을 기증해주어 그 빈자리를 메우는 중이다.

지금 LP판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술병이 자리한 것보다 부피가 적다. 고 사장의 꿈은 술병 전시 자리에 LP판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LP플레어도 손님이 기증한 것이다. 고굉무 사장은 "해거름은 추억의 계단을 오르고 싶은 사람들 모두의 것으로, 개인의 소유물을 이미 넘어섰다"고 말한다.

빤히 불을 켠 해거름 2층 계단으로 올라 LP음악을 들으며

정보화 시대, 모든 것이 빠르게 소통하고 하루만 지나도 새로운 것이 출현하여 어리둥절한 오늘을 견뎌내기가 만만찮다. 가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천천히 창동골목길을 산책하다가 추억이 그리우면 빤히 불을 켠 해거름 2층 계단으로 올라 LP음악을 들으며 고굉무 지킴이와 담소를 나누며 지난날을 그리워해도 좋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이제는 채호석 교수가 쓴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에 새로운 시문학의 한 장르로 소개되어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순간 소통을 지향한다.



#디카시#카페#해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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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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