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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봉에서 바라본 거문도 모습. 가운데 보이는 섬이 고도라 불렸던 거문리다. 서도와 다리로 연결됐지만 내년이면 동도도 연결돼 아름다운 세 섬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불탄봉에서 바라본 거문도 모습. 가운데 보이는 섬이 고도라 불렸던 거문리다. 서도와 다리로 연결됐지만 내년이면 동도도 연결돼 아름다운 세 섬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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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는 고흥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40㎞ 떨어져 있는 섬이다. 고도(0.83㎢). 동도(3.4㎢), 서도(7.77㎢)의 3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위에 소삼부도와 대삼부도가 있다. 고도는 거문리라고도 부른다.

거문도에는 동도의 망향산(247m)을 비롯해 서도의 음달산(237m), 수월산(128m) 등 비교적 급경사 기복이 심한 산지로 이뤄져 있다. 동도의 남쪽 해안은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거문도는 1885년 영국 동양함대가 불법점거하며 '해밀턴 항'이라고 불리며 유명해졌다.

영국군 묘지. 영국군 주둔 당시 죽었던 수병들이 묻힌 자리다.
 영국군 묘지. 영국군 주둔 당시 죽었던 수병들이 묻힌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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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은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당구장이라고 하지만 지원영 이장은 고증이 되지 않아 확답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주인장은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당구장이라고 하지만 지원영 이장은 고증이 되지 않아 확답을 할 수 없다고 한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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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1845년 당시 2000여 명이 살고 있던 거문도를 처음 발견한 영국 함대가 붙인 이름이다. 해밀턴은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의 이름이다. 십여 년 뒤인  1854년에는 러시아 해군이, 1867년에는 미국 해군이 거문도에 기항했다.

1885년 4월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며 영국 해군 군함 여섯 척과 상선 두 척이 거문도를 무단 점거했다. 이것이 유명한 거문도 사건이다.  지리적으로 거문도는 일본 규슈와 164㎞, 대마도와 168㎞, 부산과 197㎞ 떨어져 있다. 일본이 부산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 일본 어부들이 하룻밤 뱃길로 거문도까지 와서 조업을 했다.

거문도 사람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인데도 불구하고 옛날부터 주민의 학문 수준이 높았고, 우리나라 어느 곳보다 빨리 전기가 들어왔으며 테니스와 당구도 가장 빨리 보급된 섬이라는 것이다.

일본과 청나라를 연결했던 해저 케이블 모습. 거문도는 강대국들이 탐낼 만큼 교통과 전략적 요충이었다.
 일본과 청나라를 연결했던 해저 케이블 모습. 거문도는 강대국들이 탐낼 만큼 교통과 전략적 요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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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일본의 신사터이고 뒤에 보이는 거문초등학교 자리에는 영국군 막사가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일본의 신사터이고 뒤에 보이는 거문초등학교 자리에는 영국군 막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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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라는 명칭에는 내력이 있다. 구한말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 휘하에서 북양수사제독을 지내던 정여창이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사건의 내용을 조사하러 섬에 도착했다. 주민 중에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필담으로 주고받는데 정여창이 '국화발(菊花發)'이라는 세 글자를 내밀자 아는 이가 없었다. 이때 주민 중에 김유라는 사람이 곶감 한 상자를 중국 배에 보내도록 해 정여창이 놀랐다. "이런 작은 섬에 거유가 있는 것을 미처 몰랐다"며 "섬의 이름을 거마도라고 부르기 보다는 큰 학자가 있는 곳이라는 뜻의 거문도(巨文島)로 바꿔 부르자"고 주장했다.

거문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일본인은 고야마 미쯔다사라는 사람이지만 거문도를 어업 전진기지로 만든 이는 기무라 추타로다. 당시(1906년) 35세이던 그는 아내와 셋째 아들을 데리고 거문도로 이주해 정치망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 무렵 조선의 망어법은 달이 없는 밤중에 고기잡이 불을 피워 정어리 등의 고기를 모은 다음 작은 배 2척이 망을 잡고 있으면 요선이 대나무 장대로 수면을 두드리고 돌을 던져 고기를 그물로 몰아넣어 잡는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당시 거문도산 정어리는 교토와 오사카 등 간사이의 요정에서 '기름이 배어나오지 않고 윤기가 좋으며 항상 은색으로 빛나고 맛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아 다른 정어리의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렸다.

지난 주말(11월 30일) 거문도를 방문한 길에 거문도가 지닌 수난의 역사 현장을 보고 싶었다. 때마침 여수시의회 의원을 지냈고 현재는 거문리 이장을 맡고 있는 지원영씨와 연락이 닿아 거문리에 있는 일제 유적과 영국군 유적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거문도에 와서 조업을 하고 거문리를 개발할 때까지는 거문리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어요. 일본인들이 살고 정어리 가공 공장이 있어 조선인들이 돈 벌러 거문리에 들어갔었죠. 당시 조선 사람들은 거문리를 왜섬, 또는 이(異)섬이라고 불렀죠. 지금은 거문도의 중심이고 행정기관도 여기 있습니다."

그를 따라 거문리 중심을 돌자 일본식 주택이 보인다. 대부분이 이층 목조 가옥이다. 현재는 개축하거나 리모델링했지만 겉모습은 일본식 구조를 한 가옥이 여럿이다. 현재의 '고도민박'도 일본인 상대 요정이었다. 현재 우체국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요정→ 파출소→ 우체국으로 변신해 오늘날 주민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행정 기관이 됐다.

삼산면 사무소 옆의 석조 건물은 현재 자료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자유당 시절 삼산면 의사당 건물이다. 현재 '통안(통처럼 생긴 안쪽이라는 뜻)'에는 풍랑이 심할 때면 작은 선박의 피항지다. 이 통안을 끼고도는 도로변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지은 집들이 상가나 민박집으로 사용된다.

'샘물 노래방'은 일제 강점기 시절 가옥의 지붕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황토민박'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 이층으로 올라가니 다다미 바닥을 장판으로 바꾼 것 빼고는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인장의 얘기다.

지원영 이장의 뒷편에 일제 강점기 시절 지어놓은 일본식 가옥들이 여러 채 보인다. 대부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지만 겉모습은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원영 이장의 뒷편에 일제 강점기 시절 지어놓은 일본식 가옥들이 여러 채 보인다. 대부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했지만 겉모습은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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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민박' 집 내부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방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다만 관광객을 위해 에어컨과 TV를 설치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잠을 잤던 일본인들은 환호성을 지른다고 한다.
 '황토민박' 집 내부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방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다만 관광객을 위해 에어컨과 TV를 설치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잠을 잤던 일본인들은 환호성을 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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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곳에 살았던 일본인 후손들이 거문도를 찾아와 이 방을 보고는  환장해부러요. 옛날 일본식 가옥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고요."

일제 강점기 시절 신사터를 둘러싼 난간은 철제 울타리로 보수해 당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안내하던 지원영 이장은 "어린 시절 이 울타리는 대나무로 둘러쳐져 있었어요. 패전 위기에 처한 일제가 철근이 부족해 여기 둘러쳐진 철제 울타리까지 뜯어갔기 때문입니다"라며 어린 시절 모습을 회상했다.

신사 건너편 거문초등학교는 영국군이 주둔했던 자리이고 바로 옆은 테니스장이라는데 고증할 길이 없단다. 다만 신사 바로 아래에 소재한 개인 소유의 테니스장에는 풀만 나뒹굴고 있었다. 이 테니스장을 영국군이 만든 것이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이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으로 추정되는 테니스장 모습.  사용하지 않아 잡초만 자라고 있다. 이 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인지 고증이 안돼 있어 확답을 줄 수 없다는 지원영 이장의 설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으로 추정되는 테니스장 모습. 사용하지 않아 잡초만 자라고 있다. 이 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테니스장인지 고증이 안돼 있어 확답을 줄 수 없다는 지원영 이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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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었던 식당 바로 옆에는 당구장이 있다. 주인은 "이 당구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당구장입니다"라고 말했지만 고증이 안 됐다고 한다. 골목길을 따라 거문초등학교 앞을 지나면 신선바위가 보인다. 바로 옆에는 영국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할 당시 죽은 아홉 명의 수군 묘비가 있었지만 현재는 두 기의 묘비만 보인다.

일본인들이 만들었다는 방파제를 따라 100여m쯤 가면 쓰레기 소각장 뒤편에 철근을 꼬아 만든 전선줄을 기념해 만든 '거문도 해저케이블 육양지점'이 나온다. 이곳에서 청국과 일본 등으로 전선을 연결한 곳이니 거문도는 육지의  어떤 곳보다도 더 빨리 근대화의 물결을 맛본 곳이다.

거문도 선착장 건너편에는 '불탄봉'이 있다. 서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 30분쯤 올라가면 정상 부분이 보인다. 이곳에 서면 태평양을 오가는 모든 선박을 감시할 수 있는 일본군 감시초소가 있다.

하늘을 향한 채 건조되고 있는 물고기가 어촌임을 실감케 한다
 하늘을 향한 채 건조되고 있는 물고기가 어촌임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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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봉에 있는 일본군 관측소. 안으로 들어가면 포탄을 피하기 위해 ㄱ자로 꼬부라진 넓은 방이 있다. 거문도에는 일본군이 시설한 군사시설물 17개가 있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볼 수 있다.
 불탄봉에 있는 일본군 관측소. 안으로 들어가면 포탄을 피하기 위해 ㄱ자로 꼬부라진 넓은 방이 있다. 거문도에는 일본군이 시설한 군사시설물 17개가 있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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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2월말 일본군총사령부는 연안을 중심으로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당시 일본군이 구축한 시설물로는 동도리 해안가의 동굴 7개, 음달산 군사시설물, 불탄봉 관측시설, 거문리의 참호와 교통호 등 17곳에 달한다. 

불탄봉 정상에서 바라본 거문도. 툭 터진 바다와 아름다운 거문도의 모습에 황홀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아픈 역사를 돌아볼 수가 있었다. 저 멀리 동도와 서도를 연결하는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이면 완공된다고 하니 3섬을 걸어서 돌아볼 날도 머지않았다.

거문도에 가면 아름다운 섬 거문도·백도와 우리의 문화유산을 돌아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거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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