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 후 30년 만에 동창들을 만났을 때였다. 6학년 담임선생들께 선물을 드리고 다 같이 교가를 불렀다. 따라 부를 수 없었다. 노랫말이나 가락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노랫말을 기억하는 동창들을 보면서 신기하고 낯설게 보였다.
6학년 여름방학에 전학을 간 면소재지 초등학교였다. 졸업을 해 모교가 되었으나, 삼십년 후에도 여전히 전학생인 듯하였다. 생각해보면, 학교 뒷산 봉우리와 지역 이름이 들어간 전형적인 교가였으나, 노래 하나가 집단의 공통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돌이켜 본 자리였다.
80년대와 민중가요
사회 변화가 빠른 한국 사회에서 팔십 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민중가요'는 세대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촉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심리학자 김태형은 신간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주로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를 '민주화 세대'라 하여 전후 50년대 생을 다수로 하는 '좌절세대'와 70년대 생을 주축으로 하는 '세계화 세대'와 구분하였다. 그만큼 80년 5월은 세대를 가를 만한 '사건'이었다.
격동의 80년대에는 제한된 공간에서 소리죽여 부르던 노래들이 대규모 집회를 통해 학생과 일반 대중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 무렵에 비로소 '민중가요'가 민중의 정서를 갈무리하고 시대적 갈망을 담지 하는 수단으로써 사회적 생명을 획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민중운동'의 성장은 노래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활동 가능성을 부여했다. 노래패가 조직되었고, 녹음테이프와 음반 그리고 공연을 통해 폭넓은 대중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러 노래패 중 민중문화운동연합 음악분과 '새벽'은 대중성 확보라는 점에서 선도적이었다.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사계', '선언', '철의 기지', '잘 가오 그대' 등 수많은 새벽의 창작곡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와 같은 '새벽'의 대표곡들을 불렀던 대표적인 가수가 바로 '윤선애'였다.
새벽의 해체와 러시아에 관한 명상 윤선애는 대학에 입학하여 노래패 '메아리'에 가입했다. 그녀가 대중 앞에 처음 선 무대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총학생회가 출범하는 기념식이었다. 작은 체구에 수줍은 몸집이었지만 맑고 힘찬 목소리로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 산다는 일 고달프고 답답해도"로 시작하는 '민주'를 노래하면서 삼만 청중을 사로잡았다. 노래의 강한 울림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멈춰서 귀를 기울일 정도여서 지금껏 원망 아닌 원망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가끔 만나는 사람 중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그때 그 소리 때문에 아직도 활동하고 있고,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책임지라고 떼쓰는 분들도 있습니다."윤선애는 1986년부터 민중문화운동연합 산하 '새벽'에서 활동하면서 그날이 오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저 평등의 땅에,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등 주옥같은 대표곡들을 불렀다.
특히 민중가요 사상 역사적인 음반으로 꼽히는 '민문연 12집'에 실린 노래 '새벽, 저 평등의 땅에'(1988)는 대중에게 윤선애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이 밖에 윤선애는 '노찾사' 공연에도 객원으로 자주 참여하면서 관객들을 만났다.
그러나 민문연 음악분과 '새벽'은 1993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해체되던 무렵 노래극 <러시아에 관한 명상>을 끝으로 구성원들이 하나 둘 노래 현장을 떠나면서 해체되었다. 가수 정태춘은 이 시절을 <사람들>이라는 노래에서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문승현이는 쏘련으로 가고거리에 황사만이 그가 떠난 서울 하늘 가득 뿌옇게, 뿌옇게 아 흙바람(중략)새벽의 대표 작곡가 문승현이 쏘련으로 가던 그 무렵을 윤선애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새벽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 휑한 사무실에 홀로 남았을 때 피아노, 신시사이저, 녹음기 등 말없이 구석에 박혀 있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나도 노래를 정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윤선애는 새벽이 해체된 이후에도 노래의 끈을 아주 놓아 버리지는 않았다. 십여 년 '정가(正歌)'를 배우고 불렀다. 긴 호흡으로 느리게 '시조(時調)'를 부르며 편안함을 얻었다고 한다.
음반 '하산' 발매와 노래 활동 재개하는 윤선애
윤선애의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계기는 2005년에 나온 음반 '하산(下山)'이었다. 단출하게 5곡만을 담고 있었으나 노래들은 모두 시인 김정환이 노랫말을 쓰고 문승현이 소련으로 떠난 후에 '새벽'의 작곡을 담당한 이현관, 박정호 등이 작곡한 것이었다. 형식은 연가(戀歌)이나, 바탕에는 역사의 향방에 대한 담론이 깔려 있어 대체로 무거웠다.
음반 '하산'은 분명히 회고적 성격이었으나 가수 '윤선애'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해부터 소소한 무대에 모습을 비추더니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에는 서울시청 앞 광장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처럼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옛 친구들이 하나둘 윤선애의 주변에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곡가 김의철 선생을 만나서, 함께 두 번째 음반 <아름다운 이야기>, 2012년에 <2012 윤선애, 그 향기 그리워>를 발매하였다.
필자가 윤선애를 만난 것은 3년 전 불교문화역사관에서 열렸던 <윤선애씨 어디가세요?2>라는 콘서트였다. 어느새 수백 명으로 불어난 팬 카페가 생기고 이들의 후원으로 열린 17년만의 단독 공연이었다. 윤선애는 이 공연에서 어린 시절부터 새벽이 해체될 때까지, 그리고 작곡가 김의철 선생을 만나기까지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가며 다시 노래하고 있는 자신을 보니 기쁘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가수 '윤선애'의 노래 연대기는 '민주화 세대'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그녀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를 부를 때 필자의 마음이 기억의 바닥 깊이 가라앉고, '저 평등의 땅에'를 들을 때는 눈길이 먼 안드로메다 어딘가를 헤매는 경험을 하였다. 노래와 기억이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느낌은 관객으로서 큰 감동이었다.
결혼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공연, <윤선애와 친구들>
청년시절, 윤선애에게 노래패 '메아리'와 '새벽'은 노래 활동의 시작이자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학을 마치고 서울의 어느 여중에서 한동안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노래 활동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그때도 윤선애는 "한반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수업을 하면 목소리가 망가져 노래를 할 수 없으니까 차라리 잘 되었다고 여겼다"고 한다.
윤선애가 다시 노래 활동을 시작할 때도 '새벽'에서 인연을 맺었던 선후배와 팬들의 도움이 컸다. 특히 '저 평등의 땅에'를 작곡한 새벽의 작곡가 류형수는 팬 카페를 주도해서 만들었고, 노래를 다시 할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새벽을 중심으로 한 후배들이 '중년시대'라는 중창단을 만들어 윤선애의 노래를 뒷받침해주기도 하고 후원회도 만들어 정기적인 공연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해주었다.
자기 이름을 건 음반을 하나 둘 발매하고, 해마다 공연무대를 열면서 윤선애의 얼굴이 밝아지고 소리는 더 깊어졌다. 그녀의 변화는 꼬마 관객들이 먼저 알아차렸다. 작년 고양 '새라새극장'에서는 아빠를 따라 온 어린 남자애가 "어떻게 노래를 그렇게 잘 하세요?"라고 눈을 동그랗게 모으던 일을 윤선애는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했다. 필자의 일곱 살 막내딸도 공연이 끝나고서 진지한 얼굴로 윤선애 이모의 음반을 사주면 안 되냐고 묻기에 놀란 일이 있다.
올해는 얼굴이 밝아진 만큼 가수 윤선애에게 축하할 일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오랜 독신 생활을 정리하고 대금연주자 '노부영'과 백년가약을 맺은 일을 꼽을 수 있다. 반려자와 함께 새로운 반평생을 준비하면서 윤선애는 오랜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다시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12월 첫 주말인 7일 오후 5시, <홍대베짱이홀>에서 '윤선애와 친구들'이란 공연을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열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윤선애는 작곡가 겸 기타연주자 김의철의 반주에 맞추어 자신의 대표곡들은 물론 노래 친구 조경옥, 김은희, 해민과 함께 맑은 화음을 들려 줄 생각이다. 그리고 신랑 노부영의 대금에 맞추어 정가(正歌)도 부를 생각이다.
이번 윤선애의 2013년 공연 <윤선애와 친구들>은 박근혜의 집권으로 독재와 망령이 되살아나는 이즈음 다시금 민중 승리의 기억을 윤선애의 노래에 포개면서 역사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민중의 소리>에 송고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