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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 여름 초입, 때를 살짝 놓쳤는데도 부득부득 콩을 심었던 것은 가을에 콩을 거둬 메주를 쑤려는 당찬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막상 메주 쑬 철이 다가오자 머리가 무거웠다. '아 메주를 어떻게 쑤나.'  재작년과 작년, 친정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메주 쑤는 흉내를 내봤지만 콩 삶기도 어렵고, 메주 띄우기도 어럽다는 것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 

"오늘 송정댁 메주 쑨다는디, 얼른 가서 잘 봐."

내 메주 걱정을 알고 있는 하동댁 할머니가 귀띔을 해줬다.

"뭐, 볼 것이 있간디." 

부뚜막에 걸어놓은 콩 솥단지 앞에 앉아 송정댁 할머니가 흐물흐물 웃었다. 삶는 것이 아니라 시루에 쪄내는 콩이 마침 다 익었나 봤다. 평소에는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송정댁 할머니가 콩시루를 들고 비척비척 마루로 와서 다라이 속에 둔 자루에 부었다. 평생을 해온 일이라 무거운 것을 드는 데에도 다 요령이 있는 듯했다.

"나는 인자 콩을 못 찧은께 발로 밟으요."

팔힘이 없어서 찧는 대신 밟는 것이다. 찧든 밟든 만들어 놓은 메주가 예쁘기도 했다. 할머니는 조금씩 조금씩 이틀에 걸쳐 콩을 삶아 메주 여러 덩이를 만들었다.

"나 혼자 먹을라면 안해도 되는디 아그들이 맹글어주라고 안허요." 

몇해 전 영감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는 송정댁은 겉보기는 혼자여도 실은 이런 식으로 자식들이 끈이 돼 살고 계셨다. 지금 사는 집은 젊었을 적 영감님이 손수 지으셨다고 했다. 돼지우리며 닭장·토끼장, 심지어 다람쥐통·헛간, 나란히 걸린 연장들, 어디 하나 손재간이 뛰어난 영감님 솜씨가 미치지 않은 데가 없다. 며칠 뒤 들러서 보니 메주는 방안에 깔린 짚 위에 있었다. 겉이 마르면 마당에 있는 비닐하우스 속에 갖다둔다고 했다.  

"어째 그렇게 몰라... 들은 건 있을 텐디"

메주 만드는 송정댁
 메주 만드는 송정댁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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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지나면서 이집 저집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메주가 눈에 들어왔다. 짚으로 묶고 그 위에 다시 양파망을 씌워서 매달아 놨다. 파리나 벌레도 막고 특히 고양이가 못 먹게 하려는 장치인 모양이다. 김씨 아저씨네 옥상 비닐하우스 속에도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이 보였다. 나는 이번에도 내맘대로 연심이네만 믿고 있었다. '연심이네가 메주를 쑬 때 그 옆에서 따라서 해야지.'

"아니, 어째 그렇게나 몰라. 아무리 일을 안해봤어도 들은 것은 있을 텐디."

마을회관에 모여앉은 할머니들이 드디어 내게 포문을 열었다. 나이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김장도 혼자 못한다, 메주도 못쑨다, 만날 할 줄 모른다고 쩔쩔 매고만 있으니 답답하다 못해 이상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제가 그동안 외국에서 많이 살았잖아요. 한국에 잠깐 들어와도 정신없이 있다가 또 외국으로 가고요. 그래서 통 뭘 몰라요."  

나는 할 수 없이 내 살아온 이력을 핑계로 내세웠다. 아무리 이리저리 다니며 살았어도 하려고 들었으면 왜 못했을까. 그동안 게으르게 살아온 핑계일 뿐이다.

"오, 그렇기도 허겠네. 긍께 한국에 잠깐 오먼 친정집 온것 마냥 그랬것네."

할머니들은 다행히 내 핑계를 해석까지 해가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농사철에는 다들 바빠서 사람구경 못하는 마을인데, 겨울이 되니 뜨뜻한 마을회관에 모여서 점심도 같이 해먹고 저녁도 같이 먹는다.

"낼 연심이네 메주 쑨다는디."

저녁을 먹고 나자 누군가 큰소리로 귀띔 했다. 웃기 잘하는 연심이네는 웃고만 있다. '그까짓 메주 쑤는 것을 뭣하러 남한테 말을 해야' 하나…. 회관에 모여서도 늘 뒷전에 말없이 얌전하게 앉아있기만 하던 송정댁할머니가 처음으로 앞으로 나앉았다.

"내가 한마디 할라요. 연심이네 메주씀서 저 집 메주도 같이 쒀.  불 땔 나무는 내가 주께 연심이네 나무 쓰지 말고 우리집에서 가꼬가서 때고." 
"그래 좋은 일 한다하고 저 집 것도 같이 쒀."

송정댁할머니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거들고 나섰다.

"그래야 쓸랑갑네. 그럼 저녁에 콩 가꼬(가져) 와보쇼이. 당가놓게(물에 담궈놓게)."   
"그께요이."

드디어 떨어진 연심이네 말에 나는 옳다구나 얼른 대답했다.

"그 집 메주 걱정에 새벽 세시에 일어났어"

마을회관에 모여서
 마을회관에 모여서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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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잉~. 콩이 이게 뭐여."

되를 빌려다가 넉넉히 석 되를 되어서 부지런히 가져간 내 콩을 보고 연심이네가 펄쩍 뛰었다. 콩 절반 검불 절반이었다. 콩 타작 후 키질을 해야 하는데, 키질에 자신이 없는 나는 메주 쑤면서 씻을 때 하나하나 추려내리라 하고 검불을 그대로 뒀던 것이다.

"에구 이 사람아. 미리 말이라도 허제."
"씻음서 추려낼라고 했는디…. "
"그것이 되간디."

연심이네는 키를 꺼내와서 이미 깜깜한 밤중이 돼 잘 보이지 않은 허공에 대고 키질을 했다.

"안되겄어. 방에 가서 골라내야제." 

대강 검불을 골라내고 바깥 수도간에서 콩을 씻어 물에 담가 두는 것으로 그날 일은 끝났다.

"내일 아침 몇시에 올까요." 
"뭐 맘대로 와. 여덟시나 아홉시에 오면 되겄지."  

이튿날 아침 일어나서 밖을 내다보니 연심이네 집께에서 연기가 솟고 있었다. 이제 콩을 삶는구나, 얼른 가봐야지 하는데도 시간이 금방 아홉시를 향했다.  누가 문을 쿵쿵 두들겨서 열어보니 연심이네다.

"아니 왜 아직도 안와."
"지금 갈라고요."

나는 번개같이 옷을 입고 연심이네로 달려갔다. 불린 콩 가지러 연심이네 거실로 들어가니 내 콩은 없고 메주 다섯덩이가 채반 위에 있다.

"그 집 콩 벌써 솥에 넣었어."

연심이네는 연신 밖에 걸린 솥 앞에서 불을 땐다.

"그 집 메주 쑬 걱정에 나는 새벽 세시부터 일어나서 우리집 메주 다 쒀놨어."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부지런할까. 새벽에는 영하 4도까지 내려갔는데 . 

"송정댁에 가서 나무 가져올까요?"
"냅둬. 할매가 해다 둔 나문디 그것을 어찌께 가꼬와. 우리도 있어."  

불 때는 데에도 요령이 있다. 콩이 끓을 때까지는 불을 세게 때고 끓기 시작하면 시나브로 때야 콩물이 넘지 않는다.

콩 삶기는 연심네 맡겨두고 나는 잔칫집에...

콩삶는 연심이네
 콩삶는 연심이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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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는 눈발이 오락가락 했다. 옆집 김씨 아저씨가 땔 거리를 들고와서 망치로 쪼개주고는 청첩장을 보여줬다. 강건너 송정마을에 혼인잔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내가 간단다. 불앞에 앉아있는데 이번에는 논갓집 할머니가 담을 돌아들어온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역시 혼인잔치에 간다고 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여자 셋이서 간단다.

"어떻게 가셔요?" 
"걸어가제." 

논갓집 할머니는 걸음걸이도 시원치 않은 데다 날도 춥고, 강건너 마을이라 해도 걸어가려면 거리가 만만치 않다.

"제가 차로 모셔다 드릴께요." 

앞뒤 생각없이 불쑥 말이 나왔다. '아차 콩이 삶아질 때까지 불을 때야 하는데…. '

"말을 했응게 헐 수 없제, 차로 얼릉 모셔다 드리고 와. 내가 불 때고 있을랑게." 

논가집 할머니. 제수네. 이장댁을 태우고 강건너, 큰길건너 송정마을 잔치집에 내려드리고 되돌아오려니 이번에는 셋이서 부득부득 나를 붙잡는다.

"여기까지 왔응게 같이 들어갔다 가. 연심이네한테 우리가 말해줄 텡게."     

내 콩 삶는 것은 연심네에게 맡겨두고 나는 잔치집에 가서 떡에 잡채에 가오리회에 돼지편육에 꼬막에 떡국에…, 한상 잘 먹고 온 셈이 돼버렸다.

메주 삶기는 이웃에 맡겨놓고 나는 잔칫집에서.
 메주 삶기는 이웃에 맡겨놓고 나는 잔칫집에서.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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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푹삶아진 콩을 큰 대야에 부은 뒤 찧어 메주 다섯 덩어리를 만들어 창가에 가져다놨다. 우리집 메주는 연심이네 덕에 쑤었을 뿐 아니라 온 동네사람들이 함께 쑨 것이나 다름없는 메주가 됐다.

드디어 완성된 나의 메주
 드디어 완성된 나의 메주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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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귀촌 , #섬진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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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두계마을에서 텃밭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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