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요금. 이게 요즘 우리 집 야식를 좌지우지한다. 아내가 한 대, 내가 두 대 총 3대의 휴대폰을 사용한다. 약정된 기본요금에서 만 원씩의 추가 요금이 나오면 치킨 세 번 시킬 거 두 번만 시키게 되고, 배달 족발 먹을 거 편의점 냉장 족발로 바뀐다.
돈 몇만 원을 벌충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심리적 압박이 더 세다. 한 집에서 20만 원 가까이 통신비를 내고 술안주까지 푸지게 먹어서는 안 된다는 소심함이 발동됐다고 할까?
원래 사람은 작은 것에 민감하고, 민감한 게 더 크게 보인다. 김수영 시인도 그러지 않았는가. '왕궁의 음탕'에는 끽소리 못하면서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한다고. 예나 지금이나 벌이에 맞춰 시야가 좁아지고 생계에 눌려 시선이 낮아지기 마련이다.
나는 정치인이 사람을 반푼이로 알고 대놓고 거짓말을 늘어 놓아도 선거부정 같이 거대한 문제에는 둔하다. 하지만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백 원, 이백 원에는 날카롭다.
1588, 1566으로 시작되는 번호... 이제야 유료 사실 알았다그 칼날을 빼들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보통 목소리의 나긋함 정도와 긴요함은 반비례다. 이 전화 처음부터 너무 나긋하다. 영업하시는 텔레마케터분께는 죄송하지만 나도 일을 해야 하니 중간에 말을 끊고 통화를 짧게 마쳤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존재를 잊고 있었던 신용카드다. 이참에 카드도 없애 버리고 개인정보 활용도 못하게 해야겠다 싶어 '1588'로 시작하는 카드회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기업 대표전화 혹은 고객센터(KT 상품안내에 따르면 1588, 1577, 1899로 시작하는 전국대표번호 서비스는 전국의 대리점 번호를 하나의 대표번호로 통합해 고객과 가까운 지역으로 연결하는 서비스로 통화료는 발신자 부담이다)는 무슨 사설이 그리 긴지 모르겠다. 이용시간 안내부터 회사 광고까지 길고도 길다.
긴 머리인사가 끝나고 나면 일단 내선번호 안내 일체를 들어야 한다. 1번부터 0번까지. 다 듣고 선택, 선택, 선택. 이렇게 3단계를 거쳐 카드해지부서 직전까지 도착했는데(가끔 게임 미션을 수행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아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전단계로 돌아가시겠습니까"를 10번쯤 반복해서 들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다시 전단계로 넘어왔고 이번에는 무조건 상담사와 연결되는 0번을 눌렀다. 그리고 원하는 카드 해지 부서 담당자와 연결됐다. 막상 연결은 됐는데 어찌나 "해지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지 정작 내 할 말은 잘 못하고 겨우 개인정보 활용만 못하게 막고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략 7분여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얼마 안 지났는데, 지친다. 기업 대표전화들은 사람의 에너지를 빼내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때 불현듯 '이거 공짜야?'라는 문장이 머리를 훑었다.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아니란다. 우리가 흔히 아는 번호 중 1588, 1577, 1566, 1644 등의 네 자리수로 시작하는 기업 대표번호는 유료고 080 번호가 무료라고 한다.
몇분 동안 성우 목소리와 직원의 하소연, 그리고 반복되는 멜로디를 들어주고 돈까지 냈다. 보통 통화료는 전화 거는 사람이 부담한다. 이번에도 내가 필요해서 전화를 걸었으니 응당 내가 돈을 감당하는 게 맞나?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내가 건 전화비용을 내가 지불한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거다.
1. 대부분의 기업은 대표전화가 유료면 그 사실을 명확히 알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다른 사실임에도 고지를 안 하는 건 문제다. 이건 기업체의 잘못만은 아니다. 일반의 통념이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많은 사람이 1588이나 1566 등의 기업 대표전화로 전화를 걸 때 무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업에서는 그 통념에 편승하지 말고 대표전화가 유료라면 그 사실을 밝히는 게 맞지 않을까?
2. 왜 사람이 바로 전화를 받지 않는가. 복잡한 연결 과정 없이 상담사가 전화를 바로 받아 필요한 부서로 연결하면 이용자는 훨신 편하다. 일일이 번호 안내를 받지 않아도 되고 불필요한 설명은 듣지 않아도 된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는 사람보다는 디지털식 응대가 간편하고 비용도 절약될 것이다. 하지만 기업에서 편하게 비용절감 하느라 발신자는 쓸데없는 시간과 돈을 빼앗긴다. 최소한 첫 단계에서 상담사와 연결되는 번호 안내가 먼저 나오는 게 온당한 순서가 아닐까?
3. 왜 기다리는 시간에도 돈을 내야 하나. 유료 기업 대표전화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연결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고스란히 비용으로 돌아온다. 대기시간은 시간대별로 다르지만 결코 짧지 않다. 기다리다 지쳐 끊고 다시 걸고 다시 끊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을 있을 거다. 서비스를 받기는커녕 기다리면서까지 돈을 지불하다니. 이건 좀 억울하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기업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면 안 될까?(일부에서는 이런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요즘은 통신사마다 휴대폰 무제한 요금제도 많고 전화 요금 정도는 확인도 하지 않고도 무심하게 사는 가정이 많은 줄 안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고 불합리한 불편과 낭비를 감수해야 하는 건 아니다. 기업들은 고객에게 뭐든 잘하라고 억지 부리는 게 아니다. 유료 대표전화가 발신자의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다.
기업에서 이런 문제를 바꾸든 안 바꾸든 나는 앞으로도 통화료를 지불하면서 기업에 문의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도움을 받을 것이다. 개인이 기업과 연결되지 않고 살 방법은 딱히 없고, 전화가 아닌 다른 불편한 방법은 쓰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개인과 연결돼 하는 건 기업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럴 때 상생이란 말을 생각해본다. 비용절감도 좋지만 힘이 있는 쪽에서 소통과 배려의 문제로 접근해서 문제를 풀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또한 나같은 소시민은 통신비 몇푼에 야식을 바꾸기도 하고, 그 야식값 때문에 수백억 광고로 쌓은 기업 이미지에 등을 돌릴 만큼 쩨쩨하다는 사실도 알아줬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캠핑'과 http://blog.naver.com/manandtext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