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이 진행 중인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관련,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지난 11일 '1991년 분신한 고 김기설씨 유서의 필적이 강기훈씨 것이 아니라 김씨 본인의 것으로 보인다'는 감정결과를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12일 오후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권기훈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재심 공판에서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회보서'가 변호인 측 증거로 제출됐다. 그러나 당초 이번 필적 감정을 추진했던 검찰은 이 결과를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다.
검찰이 증거로 제출하지 않은 이유는 '국과수 내부규정과 어긋난 방식의 결론'이란 것이다. 국과수는 현 규정상 '동일 필적으로 사료됨' '동일성 여부를 논단하기 곤란함' '상이한 필적으로 사료됨' 등 단정적인 방식으로 필적감정 결과를 기술하는데, 이번 감정결과는 이런 내부규정에 따르지 않은 방식으로 결론을 기술했기 때문에 증거물이 되기 어렵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감정 결과는 내용상 검찰 측에 불리한 내용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감정 대상은 1991년 김기설씨 분신 당시 발견돼 검찰과 사법부가 강기훈씨가 대필한 것으로 결론냈던 '유서'와 김씨가 쓴 것으로 인정된 '전대협노트' '낙서장'이 동일 필적인지 여부였다.
국과수 감정결과는 '유서'와 '전대협노트' '낙서장'의 필적을 동일인의 것으로 단정 짓진 않았지만, 이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동일성이 있다는 내용인 것으로 전해졌다. 변호인 측은 감정결과 회보서 내용에 대해 "국과수가 두 필적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동일성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감정 결과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재심에서 '무죄'나면 1990년대 대표적 공안조작사건 될 듯
필적 감정 대상이 된 '전대협노트'와 '낙서장'은 1991년 유서대필 사건 재판 당시엔 필적감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지난 2005년 경찰청과거사위원회가 입수했던 김기설씨의 필적 자료다. 김씨와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한아무개씨가 1997년 책 정리 중 발견해 보관해오다 경찰청과거사위원회에 제출했다.
지난 2006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유서대필 사건을 조사하면서 이 자료들을 입수, '유서'와 함께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의뢰했는데, 당시 국과수는 '유서'와 '전대협노트' '낙서장'은 동일 필적이라고 결론냈다. 이번에 법원에 제출한 감정내용도 이 같은 결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재심을 맡고 있는 재판부가 김기설씨의 유서가 김씨 본인이 쓴 게 맞다는 감정결과를 받아들인다면, '유서를 대신 작성해 김기설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강기훈씨의 누명이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재심 결과 무죄가 선고되면, 1990년대의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재심 선고는 2월 중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강경대 명지대 학생 치사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분신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1991년 5월 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국 부장으로 일하던 김기설씨가 두 장의 유서를 남긴 채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한 뒤 투신해 숨진 일이 계기가 됐다.
당시 검찰은 김씨의 유서를 대필한 이로 김씨와 같이 전민련에서 일하던 강기훈씨를 지목,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같다는 국과수 필적감정결과를 근거로 기소했다. 결국 법원이 유서대필을 인정,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고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 지난 2007년 국과수의 필적감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고,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던 점 등을 밝히면서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