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일상적인 인사말에 형식적으로 "네"하고 대답하지 않고, "이래서 안녕하지 못합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응답한다. 그러자, 그 일상적인 인사조차도 불경시하고, 그 배후를 케겠다고 눈이 벌개서 안달들이다.
그런 안달스러움은 불안감과 초초함의 표현이다. 어쩌자고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이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조차도 불경시하는지, 그런 시대라서 "안녕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는가?
이 안녕하지 못한 시대에서 마음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살아야겠기에 일상에서의 안녕하지 못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는다.
어제(12월 15일) 아침에는 하얀 백설이 켜켜이 쌓여있는 퇴촌의 들판을 서성였다. 강변 주변에 눈꽃도 제법 예쁘게 피어나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내가 걸었던 그 길은 그렇게 찬란하게 눈꽃이 빛나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걸었던 그곳은 평지보다도 2도씨 정도는 낮은 듯하다. "춥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지만, 아침 햇살에 비치는 곳마다 눈은 조금씩 녹아내리고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한다.
추위에 눈이 각지게 얼었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아니라, 잠시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은 것이다. 성에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가만 들여다 보니 눈 결정체와는 다른 모양이다. 사각으로 켜켜이 탑을 쌓아가는 듯, 혹은 나뭇잎결을 키워가는 형상이거나 부채모양으로 자라나는 형상이다.
성에의 결정체를 보면서 겨울을 생각한다. 나는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간혹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이런 것들로 인해 겨울을 견딘다. 그리고 엄동설한의 겨울이 끝나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봄도 좋아서 겨울을 견딘다.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사건이 터진 지 일년이 지났다. 속전속결, 빠름이라면 서러워할 한국사회도 이 문제만큼은 질질 끌며 일년이 지나도록 책임자도 그로인해 이득을 본 자도 책임을 지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년동안 역사의 계절은 거꾸로 돌아 겨울공화국이 된듯하다.
그렇게 역사가 거꾸로 흐르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빛은 존재했다. 미미하지만 면면히 이어졌고, 다양한 형태로 국가의 '안녕'을 빌며, 서로에게 '안녕'을 물었다. 그런데 그것이 불경한 짓이라 하고, 종북과 연결을 시켜야만 되겠다는듯 난리법석을 떠는 이들도 있는가 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희망, 다시 시작이라는 다짐, 겨울이 깊을 수록 혹은 어둠이 깊을 수록 봄은 가깝고, 빛은 더욱더 빛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슬 수 없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살아간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 속에서도 빛나는 것들을 찾는다. 그리고 간혹은 그 마음을 다치지 않고 지키기 위해 이런 소소한 풍광들에 빠져보기도 한다. 조금 더디더라도,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더 나은 나라가 될것이라는 희망. 그래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인사에 "안녕하고 말구요!"라고 답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추위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밝힌 거리에서 본다.
겨울이면 겨울대로 빛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동설한에도 "안녕하십니까?" 묻는 것이며,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인사와 대답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그것만 잘 알아듣고, 안녕하지 못한 상황들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위정자들에게 있다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안녕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사조차도 불경시하는 것을 보면 아직 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안녕하지 못해서 거리로 나서는 이들이 많아진다는 소식이다. 그가 그들의 안녕을 앗아갔는가?
"안녕하지 못합니다."
무릇 제대로된 정치를 하려면 그 작은 외침들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권력이라도 가진 이들이라면, 그 권력의 남용으로 인해 안녕하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성에의 결정체, 그냥 볼 때에는 그냥 흰눈인줄로만 알았다. 가만 들여다보니 눈의 결정체와는 다르고 그들만의 모습이 있다. 안녕하지 못한 이들의 외침, 그냥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로만 듣지 말고 가만 들여다 보면, 이 안녕하지 못한 세상을 안녕하게 만들 수 있는 해법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