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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난 지 넉 달이 돼간다. 이번엔 송년회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1박2일로, 인천 을왕리에서. 지난 주말이었다. 서울, 오산, 인천, 수원, 천안, 진해, 부산 등지에서 사는 친구들이 토요일, 을왕리에 펜션을 잡고 모였다.

며칠 전부터 들떴던 나는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려고 마음 먹었다.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다가 값도 저렴하고 이왕이면 내실있는 걸 하고 싶어서 '책'으로 하기로 했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인 월간 <작은책>! 내가 <작은책>을 정기구독하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이다. 주변 사람들이 '재밌고 좋은 책'이라고 했지만 정작 구독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작은책> 선물로 줬더니... "나랑 잘 안 맞는 것 같애"

처음 <작은책>을 봤을 때의 기억이다. '이 조그만 책에 도대체 뭐가 써 있길래 재미있다고 하는 걸까? 집회에 가면 꼭 <작은책> 부스가 있던데…' 궁금해 하면서 책장을 펼쳤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딱 생각날 정도로 책이 알찼다. 일하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그 책에는 바로 옆집 아줌마, 아저씨들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냥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 대부분이 겪는 비정규직의 설움이나 아픔이 있었고, 학교와 가정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소연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더 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가끔 시리즈로 글이 올라오는 경우도 있다. '특집' 코너에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정기 공개강좌의 속기록이 들어 있다. 직접 강연을 들은 적이 몇 번 있지만 대부분 다른 약속과 겹쳐서 가지 못하는데, 그러면 다음 달 <작은책>에 그 강좌 내용이 그대로 적혀서 나온다. 청력이 안 좋아 잘 듣지 못하는 나에게 안성맞춤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작은책>을 정기 구독한 지 10년이 넘었다. 이 재미있고 유익한 책을 초등학교 동창생들 송년회에 가서 선물하고 웬만하면 정기구독을 권하고 싶었다. <작은책>은 아직도 독자가 그리 많지 않아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송년회 몇주 전에는 한 녀석에게 좋은 책이니 읽어 보라며 <작은책>을 불쑥 내민 적도 있다. 친구는 '작은' 책을 받자마자 주머니에 쏙 집어넣더니 다시 술을 마셨다. 며칠 후, 책을 읽은 소감이 어떠냐고 카톡으로 물으니 답이 왔다.

"아침에 3분의 1 정도 읽었는데 나한테는 정서적으로 잘 안 맞는 것 같아. 노동, 인권, 투쟁 뭐 이런 내용들 위주인데 탄압, 차별은 분명 개선되어야 하는 데는 동의해. 하지만 책의 내용은 그냥 억울한 내용 천지네. 나도 가난하게 살았고 억울한 역경도 많았어. 읽긴 하겠는데 정기구독은 '노' 할래."

허탈했다. 분명히 포용력도 있고 이해심도 많고 나름 진보적이라고 자처하길래 기대를 했는데 이런 답을 들으니 말이다. '30년이란 세월이 길긴 길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은 그냥 주어지는게 아니구나'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일이었다. 일단 그 친구의 의견은 존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친구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꿋꿋이 <작은책>을 주문했다.

송년회에 올 친구가 몇 명쯤일까, 대략 짐작하고 대표격인 친구의 사무실로 20권을 배달시켰다. "송년회 때 내가 차를 안 가져가니, 미안하지만 책을 받아서 가져 오면 고맙겠다"고 하면서.

"이 책에는 세경이 글이 없단다"... 아뿔싸!

초등학교 동창생들 을왕리 펜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들을왕리 펜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문세경

드디어 전국 각지에 사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40대 중반에 모처럼 지루한 일상을 떠나 인천 앞바다에 모일 수 있다는 건 운일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바빠 하루하루를 되돌아 볼 겨를도 없이 살아왔다. 이 하루의 '일탈' 쯤은 얼마든지 용서받아야 한다.

인천에 사는 한 녀석은 해물을 한 자루 꽉 채워서 등장했고 다른 녀석은 1++ 한우 등심을 가져와서 무한정 구웠다. 한 친구는 내가 무심코 내뱉은 "음식 중에서 떡볶이를 제일 좋아해"라는 말을 잊지 않고 떡볶이 재료를 사왔고, 직업군인 녀석은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에게 비싼 양주를 들이밀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두런두런 사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카톡이 왔다.

"혹시, 오늘 범국민 시국대회에 갔어요?"

같이 활동한 적이 있는 선배다.

"아뇨, 초등학교 친구들이랑 송년회 하느라 인천 을왕리에 있는데요. 왜요?"
"오늘 그 집회에서 행진을 하는데 물대포를 쏘고 난리가 났다고 하네요. 혹시 가셨으면 몸조심하라고 카톡했어요."

너무 미안했다. 지금 시국이 말이 아닌데, 머릿수라도 채우러 가야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한가하게 먹고 놀기나 하다니, 좌불안석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내 심정을 알기나 할까? 슬쩍 얘기를 꺼내볼까? 몇분을 망설이다 끝내 말하지 못했다. 내 마음은 집회 현장에 가 있었고, 친구들의 대화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 한 켠에서는 삐딱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 봤다고 서로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과연 30년이란 '세월의 골'이 메워질 수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대표격인 친구가 술이 더 취하기 전에 할 말이 있다며 일어났다.

"얘들아, 우리 친구 중 한 명이 이번에 <한국산문>이라는 잡지에 수필로 등단을 했단다. 안타깝게도 그 친구가 이번 송년회에 오지 못한다면서 나한테 책을 보냈어. 자, 다들 받으렴."

아뿔싸! 내가 주문한 <작은책>을 주려나보다, 내심 으쓱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문으로 등단한 친구의 책이라고? 김이 좀 샜다. 이어지는 친구의 말.

"깜박 잊을 뻔 했는데, 세경이도 너희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면서 이 책을 보냈어. 이 책에는 세경이 글이 없단다."

<작은책>이 초라해 보였다. 쪽팔렸다. 하필 이럴 때 등단한 친구는 뭐람? 이럴 줄 알았으면 <작은책> 이번 호에 글 하나 보낼 걸 그랬다는 뒤늦은 아쉬움이 몰려왔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 붉어진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술은 웬만큼 마셨으니 노래방에 가자는 의견이 대세다. 한밤중에 12인승 승합차를 타고 우르르 노래방으로 몰려가는 친구들, 어릴 때 시골에서 덜컹거리는 경운기 타고 꼴 베러 가는 아이들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친구에게 다시 한 번 축하를 보낸다

<한국산문>과 <작은책> 친구가 등단한 <한굯산문>과 내가 선물한 <작은책>
<한국산문>과 <작은책>친구가 등단한 <한굯산문>과 내가 선물한 <작은책> ⓒ 문세경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친구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두어 명이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를 한다. 나도 어슬렁거리며 "뭐 도와줄 거 없니?" 했지만 답이 없다. 그 틈을 타서 <한국산문>를 편다. 등단한 친구의 글을 읽는다. '두 가지 화두'라는 제목, 불교를 믿는 자기의 신앙심과 일상의 번거로움을 대비시킨 내용이다. 남은 친구들이 "해장국이나 먹으러 가자"고 부른다.

해장국을 다 먹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생각했다. <한국산문>이 내 정서와 잘 맞지 않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작은책>을 전해줬을 때 친구가 느낀 것도 지금 내 마음과 비슷했을까? 입장이 다르다는 게 이런 걸까? 그럼 우린 공감대가 없는 걸까? 그런데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나야 하는 걸까?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어젯밤 친구들이 보여준 따뜻한 정성이 고맙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중반에 이렇게 다시 만나 허물없이 서로를 대하고 이해하며 걱정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넉넉한 마음으로 더 많이 대화하면서 차이를 좁혀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녀석은 자기가 사는 곳이 진해라며, 내년 봄 진해 벚꽃 축제에 꼭 초대한다고 했으니 내 어찌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며칠 후 등단한 친구의 기념식이 한 호텔에서 열렸다. 동창생들 세 명이 의기투합해 축하해 주러 가기로 했다. 어느새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는데도 꿈을 잃지 않고 '등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친구가 대견해 보였다. 기념패를 받는 순간에는 마치 내가 상이라도 받는 양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책을 내면 더 많은 친구들이 축하해 주러 오겠지.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상상만 해도 내 얼굴엔 미소가 한 가득이다. 평생 단 한 번뿐인 그 자리, 친구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더욱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축하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작은책> 홈페이지에도 실을 예정 입니다.



#초등학교 동창생#송년회#을왕리#작은책#한국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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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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