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8시, 전북 전주에서 가장 붐비는 시내 '걷고 싶은 거리'.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상권이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쇼핑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거리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서있다. 한 친구는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은 그 주위에서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보니 다른 2명의 여학생 발에는 '스무 살, 첫 선물 민영화?' '눈과 귀를 막으면 안녕할 거라 믿었습니다'라고 적힌 피켓이 놓여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어요. 시위를 하려고 하는데, 인원은 4~5명 정도인데, 해도 되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전화를 받은 분이 담당자를 바꿔줬어요. 그분이 48시간 전에 접수를 해야 할 수 있다며 불법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못하는 것 아닌가 해서 조마조마했어요."전주 A고등학교 3학년 이준희(가명)씨의 말이었다. 이들이 준비한 피켓은 모두 세 개. 같은 곳에서 이 피켓을 모두 들고 있으면 불법이라는 사실에 이들이 고안한 방법은 대표로 한 명이 피켓을 들고 서 있고, 다른 피켓은 발에 놓는 방식이었다.
고려대학교에서 처음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로 시작한 물음에 대한 답이 전국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안부를 묻던 게 익숙했던 12월, 2013년 한국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묻는 '정말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더 자연스러워졌다.
이날 여고생 다섯 명도 그 안부 인사에 답했다. 이준희씨는 "요즘 철도 민영화 문제가 뜨겁고, 그것 때문에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물음이 호응도 크잖아요"라며 "우리도 가만히 있을 게 아니고 전주 시내에서 이렇게 시위를 해보자고 한 친구가 제안해 시작했어요"라고 설명했다.
"따뜻한 응원, 두려움이 사라졌어요"
그들은 시위라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의 모습은 '프리 허그'에 가까웠다. 삶에 지친 사람이라면, 아니 그냥 사람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든 와서 포옹을 할 수 있도록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 그들은 그런 마음으로 자신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봐주기 바랐다.
오후 8시부터 시작한 이들의 시위는 평화로웠다. 이들의 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지나가는 이들은 따뜻한 음료와 사탕 그리고 핫팩 등을 건넸다. 어떤 이는 따뜻한 장갑 다섯 켤레를 이들의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시위 20분도 안 되서 이들이 받은 '마음'은 손에 다 쥘 수 없을 정도였다.
"솔직히 이렇게 하기 전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어요. '쟤들이 뭘 알고 저렇게 하나?' 아니면 '그렇게 한다고 뭐가 바뀌나?' 이런 시선을 받을까봐 계속 걱정이 됐죠.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생각보다 응원을 많이 해줘서 무척 기뻐요."
사실 나도 '그래! 맞다, 이 친구들은 고3이지, 정말 뭘 알고 이렇게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품었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본격적으로 이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국민과의 소통 고리 끊어져..."첫 질문은 당연히 '민영화에 대해 알고 있느냐'였다.
"민영화에 대해 알고 있어요. 충분히 논의가 돼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있잖아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꼭 이 민영화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쌍용차, 밀양 송전탑, 코레일도 다 이와 비슷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명쾌한 대답이다. 이어 이준희씨는 "정부가 소통을 해야죠, 그런데 언론도 통제하고 국민과 소통의 고리가 끊어졌는데 다시 그 고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라며 대안까지 제시했다.
사실 이들이 들고 있는 피켓의 내용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사회 첫 발을 내딛는 이들의 세계는 '민영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기관은 권력의 편을 들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보다 인터넷 댓글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노동자·농민·서민들의 삶은 점점 추락하고 있고, 작은 몸부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눈과 귀를 막으면 안녕할 거라는 믿음'은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생존 방식일 수 있지만, 취업난·경제 위기 등 사회적 난제들은 더 이상의 침묵으로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청소년 자살률 1위, 밀양 송전탑과 노동자들의 잇단 자살은 생존 방식의 전환을 이 사회에 요구하고 있다.
"어리니까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에 반대해요. 대한민국 교육이 잘못된 것 아닌가요? 사회에 관심이 없던 친구가 사회로 나온다면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익혀야 하는데, 학교는 공부만 시키려하고 나머지는 다 차단해요. 이것은 악습이고, 편견이라고 생각해요."이들의 해명 속에 담긴 질문들에 대해 이 사회는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답하는 다른 대자보들은 곳곳에서 뜯기고 있다. 대전과 군산에서는 용기 있는 학생들이 실명의 대자보를 교내 게시판에 붙였지만, 대자보의 생존 시간은 불과 10여 분.
A고등학교도 2학년 후배들이 대자보를 준비했지만, 공부가 먼저라는 선생님의 만류에 미처 게시판에 걸지도 못했단다. 그나마 이들이 거리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수능을 본 3학년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도 부모님의 허락과 함께 학교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선생님들이 걱정을 하시기 때문에 학교에 그런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소위 '헛바람'이 들 수 있다는 걱정이죠. 수능과 공부에 집중할 아이가 시위를 한다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것이 학교 입장에서는 손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학교 이미지를 실추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아요. 그런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가 하는 것은 사회 변화의 첫걸음이라고 봐요. 그리고 누군가 해야 하는 것이고요. 처음 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죠. 이미지 실추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학교가 오히려 인권이 숨 쉬는 곳으로 인정받을 수 있잖아요. 대자보를 붙였다고 바로 떼는 것이 오히려 억압적인 모습으로 보이고 이미지를 실추하는 것이 아닐까요?""금기요? 그건 깨라고 있는 거예요"
일부 시·도에서는 어렵게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존중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 현장에는 이들의 목소리와 발목을 잡는 '금기'는 가득하다.
왜 이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지를 확인하는 물음은 자연스럽게 이 '금기'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12년의 학교생활, 거리로 나서기 전 이들은 '금기'가 일상이 된 삶을 살았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찬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학생들 말고 또 있을까? 민영화 등 국가 정책에 반하는 파업은 '불법'이고, '금기'라는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는 철도노동자들의 투쟁. 어쩌면 학생들은 12년 동안 그 금기를 견디며 살아온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나이는 어릴지라도 '금기'에 도전하는 노동자들보다 이들이 더 선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금기는 깨라고 있는 거예요.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옳은 것이에요. 그래서 철도노동자들을 응원하고 힘내기를 바라요. 철도노동자들은 우리를 지키려고 그렇게 투쟁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철도노동자들에게 지켜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금기에 견뎌온 선배라고 생각하고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니 겸손하게 고맙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
"언젠가는 흔들릴 거예요. 불씨만이라도 살리면서 버텼으면 좋겠어요. 불씨를 살릴 수 있는 여지와 희망을 남기는 것이라면 변화가 당장 되지 않더라도 좋아요. 꺼지지 않기를 바라요. 그래서 끝까지 했으면 좋겠어요." 아픈 이들과 함께 저항을 했던 동료들이 세상을 등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기업의 이윤을 위한 횡포에 고통 받아온 이들에게 나와 같은 사람들은 감히 '견뎌라' '저항하라'라는 말을 꺼낼 수 없다. 그러나 꽉 막힌 학교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부 노동에 시달렸던 이들이라면, 차별적인 사회를 더 많이 살며 견뎌야 할 이들이 말하는 '희망' '여지' '불씨'가 충분히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주의 청소년들이 벌인 '민영화 반대' 피켓 시위. 제법 추운 날씨였지만, 이들은 예정된 1시간 30분을 넘긴 오후 9시 30분 이후에도 시위를 이어갔다. 그동안 서로 들고 있던 피켓을 바꿔가며 추위를 견뎌냈다.
"원래 각자가 다른 곳에서 1인 시위를 하려고 했어요. 그러면 피켓 하나에 많은 표현들을 넣어야 하는데, 어려워서 이렇게 모여서 하기로 했어요.(웃음) 이렇게 모여서 하니 힘도 나고 전달력도 커지잖아요. 이 사회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까, 앞으로 더 많이 함께하면 좋겠어요."지나는 사람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또래 친구들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니 힘도 나는 것 같다. 시위 시작 전에는 텔레비전 뉴스에 자주 나오는 험악한 아저씨들이 와 뭐라고 할까 겁도 났을 터. 하지만 시위 내내 밝은 분위기는 계속 됐다.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시위 사진은 '좋아요'가 500 건을 넘겼다.
이들의 평화시위, 정말 불법일까요?그럼에도 '금기'에 익숙한 이들에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함께 참여한 이선진(가명)씨는 "부모님이 공무원인데,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닌지 걱정이에요, 저 때문에 피해를 볼까요?"라며 "그동안 고생하신 게 제 행동으로 다 무너지는 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하나하나 하면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참 슬퍼요"라고 말했다. 한 친구가 말을 걸었다. "학교는 가명으로 해주세요. 학교에 피해가는 건 싫으니까요."
내가 지켜본 1시간 30분의 시위.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위가 최근 유행하는 '종북 낙인찍기'에 이용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왜 그런 것일까.
"이기주의? 잘 모르겠어요. 왜 이런 사회 분위기인지. 너무 오래 전부터 일부러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편견을 심어온 것 같아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그런 친구들을 보고 괜히 나대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또래 친구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민영화를 반대하는 청소년들의 시위 소식을 접하고 그들을 만났다. 현장에서 민영화를 반대하는 이유보다 청소년들의 발언과 행동을 함부로 재단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과 헤어지기 전, 단체 사진을 요청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기사에 담아야겠다고 말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피켓을 단체로 들고 있는 사진이 경찰이 말하는 불법시위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의 시위는 불법이고, 금기일까? 이들이 응원하는 철도노동자들의 민영화 반대 파업이 불법이고, 금기일까? 밀양·쌍용차·강정마을·한진중공업·삼성전자서비스·현대차 비정규직·재능교육·전북 버스파업·아데카코리아·용산 등 수많은 노동자·서민들의 저항이 불법이고, 금기일까? 그에 대한 판단은 기사를 읽는 독자가 해주길 바란다. 불법이, 금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저항을 누르려는 폭력 앞에 함께 나서주길 바란다. 세상과 독자를 믿으며 경찰이 운운한 '불법시위'의 증거를 남기고 이들의 평화 시위 취재기를 마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인터넷대안언론 참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