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 고장 충남 태안의 대표적 자랑거리로 두 가지를 꼽아왔다. 하나는 천혜의 자연환경이고, 하나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은 만고불변이 아니다. 언제든지 침탈과 훼손,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그것은 시시각각 현재진행형 상황일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우리 고장의 동학농민혁명사는 만고불변이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우리 고장을 얘기할 때는 동학농민혁명을 들며 한껏 자랑을 한다. 우리 고장에 역사적인 자랑거리가 있음을 큰 다행으로 여기며 동학혁명 선열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北接) 동학군의 최초 기포지(起泡地)였고 처절한 최후 항전지였던 우리 고장 태안에서 3·1만세운동 당시에는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의아히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던 주민들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거나 만주와 해외, 외지로 도피를 하였기에 우리 고장에서는 만세운동을 주도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 동학농민혁명군이 거세게 기포했던 곳이라 일제의 사전 감시도 심한 탓이었다.
그런 조건 가운데서도 우리 고장 태안에는 항일감정과 민족정신이 면면히 흘러 일본인들이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 고장으로 남았다. 일본인들이 크게 행세하지 못한 큰 동네는 개성이요, 중간 동네는 강화요, 작은 동네는 태안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동안 우리 고장을 대표하는 이름 있는 광복지사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원북면 방갈리 출신으로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옥파 이종일 선생,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외로 도피하여 미국에서 항일광복운동을 하신 남면 출신 우운 문양목 선생, 또 안면읍 승언리 출신으로 대한광복군 서산군지단장을 지낸 이종헌 선생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분들 외로 또 한 분, 원북면 방갈리 출신이신 문병석(文秉錫) 선생이 우리 고장 항일광복투쟁사의 큰 별로 떠오르게 됐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을 기점으로 무려 94년 만의 일이다.
지난 12일치 <태안신문>은 제8면의 '인물'란에 문병석 선생 관련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최근 주일한국대사관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서류뭉치를 주일대사관이 외교통상부를 경유하여 본국 국가기록원에 이관함으로써 밝혀지게 된 사항이다. 국가기록원은 서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3·1만세운동 피살자 명부 안에 들어 있는 이름들을 지역별로 상세히 발표했다.
<태안신문>의 김동이 기자는 국가기록원이 발표한 명단 안에 우리 고장 출신 문병석 선생이 들어 있음을 알고 발 빠르게 취재를 하여 자세히 보도를 한 것이다. 김동이 기자가 발휘한 신문기자로서의 기민성, 남다른 감각과 안목에 감사와 상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북접의 접주로서 원북면 갈머리(방갈리)에서 최초로 기포한 동학농민혁명군의 지휘자였던 문장로(文章魯)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난 문병석 선생은 3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장남인 문구석(文龜錫) 소년은 도피 중인 부친을 위해 자진 체포되어 총살형을 당했다.
장남을 잃은 문장로 선생은 어린 차남과 남은 가솔들을 이끌고 1895년 1월 배를 빌려 원산도로 피신했다가 광천을 거쳐 공주 마곡사와 천안 광덕산에서 숨어 살았다. 또 예산 무한천변 갈대밭에서 숨어 살기도 했다. 16년간의 풍찬노숙, 눈물겨운 도피생활 중에 국권을 상실하는 경술국치(1910년)를 겪어야 했다. 그렇게 조국이 일본에 병탄된 이후 일제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 정착하게 된다.
예산에서 성장한 문병석 선생은 20대 청년 시절에 3·1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3월 1일과 10일 예산에서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직접 낭독하고 시위를 이끌었다. 그 기세로 11일에는 아산에서, 15일은 서산에서, 16일에는 해미에서, 18일에는 홍성에서, 19일에는 태안에서, 20일에는 광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4월초까지 산발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문병석 지사는 1919년 4월 말경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3·1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예산경찰서에서 20여 일 동안 물고문을 당하고 손톱과 발톱이 뽑히고 한쪽 귀가 찢어지면서 청각까지 잃었다. 사망 직전 가족에게 인계되어 민간요법으로 간신이 치유되었으나 불구상태로 연명을 해야했다.
그는 고문후유증을 겪는 불편한 몸으로도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해방 이후 오랫동안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으며 살다가 1970년 79세로 별세했다. 3·1만세운동 당시와 항일광복투쟁 당시에 순국한 것은 아니지만, 고문후유증을 앓다가 별세했으니 순국인 것은 마찬가지다.
문병석 지사의 아들인 문원덕 선생은 선친과 조상들의 고향인 태안으로 돌아와 동학농민혁명 계승 사업을 전개하여 백화산 '교장(絞杖)바위' 아래에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을 건립함으로써 고장 동학혁명기념사업의 기초를 닦았고, 문원덕 선생의 딸인 문영식씨가 그 유업을 이어받아 현재 고장에서 동학혁명기념사업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17일 오전 11시 태안군청 브리핑 룸에서는 뜻 깊은 기자회견 행사가 있었다. 문병석 지사의 항일광복투쟁의 전모를 밝히면서 향후 현창 계획과 추모사업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내포지역동학농민혁명유족회, 동학농민혁명태안군기념사업회, 태안향토사연구회, 태안군관광해설사협의회, 태안시민자치참여연대, 태안문학회 대표 및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우리 고장 출신 항일광복지사의 위업과 민족정신의 계승을 알리는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