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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안녕할 수 없음을 깨달아 안녕하지 못합니다' 철도민영화를 비롯한 현 시국을 비판한 고려대 학내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를 읽고 뜻을 모은 학생들이 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시국촛불집회에 참석해 자신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적은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 '혼자 안녕할 수 없음을 깨달아 안녕하지 못합니다' 철도민영화를 비롯한 현 시국을 비판한 고려대 학내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를 읽고 뜻을 모은 학생들이 지난 14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시국촛불집회에 참석해 자신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적은 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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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대륙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뒤 황제의 칭호를 처음 썼다고 하여 진시황을 아십니까? 불로초로도 잘 알려진 진시황, 그러나 진시황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수명을 다하고 죽습니다. 죽음 앞에서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수많은 자식 중에서 영민한 부소를 새로운 황제로 지명합니다. 그러나 환관 조고라는 자가 진시황의 조서를 조작하여 부소의 동생인 호해를 새 황제로 옹립하고 부소는 죽게 합니다. 이제 세상은 환관 조고의 것이 되었습니다. 조고는 이제 황제의 자리를 넘봅니다. 이때 사용한 방법이 바로 지록위마(指鹿爲馬)입니다.

조고가 사슴을 황제에게 바치며 "폐하, 천하의 명마를 한 마리 바치오니 부디 거두어 주시오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황제 호해는 "승상, 저건 사슴이 분명한데 어찌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라고 되묻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말을 보고 사슴이라 하니 삼척동자라도 이를 말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환관 조고는 매우 엄중한 표정을 지으며 "저건 분명히 말입니다. 폐하께서만 어찌하여 사슴이라고 하십니까?"라고 말하며 주위를 둘러봅니다. 사슴이라 하는 신하도 있었지만, 이미 조고의 위세에 눌린 신하들은 말이라고 맞장구칩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나중에 계략을 씌워 죽이고 호해마저 죽여 버리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사슴을 말이라니... 지록위마의 한해

저는 2013년 한 해 박근혜 정권을 돌아보며 이 지록위마의 고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지난 1년은 사슴을 들어 말이라고 강변한 말장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국정원 및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을 처음에는 국정원 여직원에 대한 인권 탄압이라 호도하더니, 검찰의 추가수사로 국정원 심리전단의 조직적 개입이 밝혀진 이후에는 사소한 실수니, 개인의 일탈이라고 우겼습니다. 국군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의 조직적 댓글에 대해서도 직속 상관인 사이버사령관은 보고만 받았을 뿐 대선개입 댓글은 달라고 지시한 바는 없고, 국방부장관도 이러한 대선개입 댓글에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언제부터 우리의 군대가 이런 당나라 군대가 된 것인지, 국정원이 언제부터 직원 개인의 일탈에 그토록 관대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최근의 코레일 민영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회사든 뭐든 황금노선 운영을 지금의 코레일이 아닌 다른 곳에 맡기고 그 수익마저 코레일이 아닌 다른 곳에 귀속 시키는 것이 바로 민영화입니다. 그런데 검찰의 총수는 총리와 주무장관이 민영화가 아니라고 하는데 철도노동자가 민영화라고 주장하면서 파업하는 것은 불법행위라면서 엄단을 외칩니다(그런데 정작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공기업이, 공공부문이 운영하기 부족한 경우에 민간이 들어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는데, 민영화가 아니라는 총리와 검찰총장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심지어 민영화 반대가 소신이었다는 코레일 사장은 철도노동자를 직위해제해 길거리로 내몰면서 회초리를 든 엄마의 심정을 운운합니다. 그 회초리 두 번만 맞았다가는 숨을 거둘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난 6월 남재준 국정원장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하면서 국민적 논란을 종식 시킨다고 억지를 부렸지요. 그러나 국민적 논란이 종식되기는커녕 이후 극심한 국론분열이 뒤따른 것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전교조에겐 노조 아님, 통합진보당엔 정당 아님

이 정권이 지록위마의 행태를 보인 것은 무수합니다. 전교조 보고 노조 아님 통보한 것, '절두산성지'를 '결전성지'로 녹취록을 거짓으로 작성하여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 기껏해야 유럽의 기준으로 사민당 수준의 강령을 가진 통합진보당을 위헌정당이라 하여 해산청구한 사건.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를 총괄하던 검찰총장에 대하여 혼외자 의혹을 불러 일으켜 직무감찰을 명하고도 총장이 사표를 내자 사안의 본질이 '검찰의 독립성'이 아니라 '공직자의 도덕성'이라면서 사표수리를 미루었던 일도 생생합니다. 그러면서 야당이 검찰총장의 혼외자 사태의 문제를 지적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당의 검찰총장인데 왜 그렇게 야당이 난리를 치세요. 민주당 검찰총장입니까?"라고 했다죠. '말이 안통하네트'의 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백미에 해당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러면서 박근혜 정권은 자신들의 말장난에 동조하지 않으면 눈을 부라리면서 겁박했습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에 대하여 진상규명과 박근혜 정권의 사과(처음에는 '사퇴'가 아닌 사과였습니다)를 요구하던 사람들을 겁박했습니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지적하면서 개혁을 요구하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영화 저지를 주장하던 철도노동자들은 대량 직위해제됐습니다. 전교조도 법외노조의 문턱에까지 갔다가 사법부의 결단에 간신히 법외노조 신세를 면하였습니다.

내란음모와 위헌정당해산의 공세 앞에 통합진보당 사람들은 삭발과 단식, 노숙투쟁을 이어갔었습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실'을 보도하고 당사자의 주장을 전달하였다는 이유로 jtbc의 손석희 앵커를 '경고 및 관계자 징계'의 내용으로 징계하고 그보다 더 수준 미달의 막장 방송을 보여주는 다른 종편은 모르쇠로 넘어갔습니다. 이러한 장면장면들에서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는 사람을 노려보던 환관 조고의 매서운 레이저 광선이 2013년 대한민국에서 재현됐습니다. 채동욱 찍어내기, 윤석열 징계, 박창신 신부에 대한 수사 착수, 장하나·양승조 의원에 대한 징계안 상정도 마찬가지 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매서운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는 것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점입니다. 통합진보당은 물론이고, 박창신 신부, 장하나, 양승조 의원에게도 종북의 굴레를 씌웁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가 한창이던 무렵, 대검청사나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는 '종북검사 척결'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사슴을 사슴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환관 조고에 의하여 무참히 죽음을 당했듯, 대선개입이 잘못이고, 민영화를 민영화라고 부르는 사람들, 심지어 그러한 주장을 그대로 소개하고 전달한 방송사 앵커마저 종북으로 몰려 감옥에 가고 거리로 내몰리고 징계를 당하고 있습니다. 2013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지록위마'인 까닭입니다.

지록위마의 끝을 기억합시다

 국정원 시국회의와 민주노총 주최로 지난 2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번개' 행사 참가자들이 "안녕하지 못합니다"를 외치며 철도파업 지지와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국정원 시국회의와 민주노총 주최로 지난 2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번개' 행사 참가자들이 "안녕하지 못합니다"를 외치며 철도파업 지지와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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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의 끝은 어땠을까요? 환관 조고는 권력을 대대손손 누리고 호의호식했을까요? 잘 알고 계실터이지만, 지록위마의 끝은 결국 조고의 비참한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사필귀정의 진리는 여기서도 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그렇게 강요하고 겁박한다고 사슴이 말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간명하고도 평범한 진리가 환관 조고의 죽음이라는 사필귀정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고 겁박하는 자의 말로가 어떤지는 우리 헌정사에 등장하는 독재자들을 통하여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로 패배하고 잠시 후퇴했을지라도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해 왔습니다. 4·19,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은 그 투쟁을 대표하는 영예로운 이름입니다. 그 영예로운 이름의 투쟁으로 우리는 독재자를 축출하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켜왔습니다.

제18대 대선이 치러진 지 1년이 되는 지난 19일 시청광장에 운집한 3만의 민주공화국의 시민들 역시 그 혹한의 추위에도 오직 박스떼기, 스치로폼 한 장에 의지하여 엉덩이를 냉동의 땅에 맞대고 그 촛불집회의 현장을 묵묵하게 지켜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저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서서 발을 동동 굴러도 견디기 힘든 추위에 그 차가운 땅에 앉아 집회를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민주공화국 역시 그 혹한의 추위에도 시청광장을 지키던 그 시민들의 힘으로 지켜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슴을 말이라 우기면서 국민을 겁박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이 정권 사람들이 지록위마 고사의 시종(始終)을 찬찬히 성찰해 보기를 진심으로 권고드립니다.


#이광철#지록위마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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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딱 한뼘씩만 사회가 진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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