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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병력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지난 22일 오후 민주노총이 입주한 경향신문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
▲ 민주노총 둘러싼 경찰병력 경찰병력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지난 22일 오후 민주노총이 입주한 경향신문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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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인 지난 22일 수천 명에 이르는 경찰 병력이 서울 정동길 초입에 있는 경향신문사 건물을 에워싸고 난입했다. 그 스펙터클한 광경은 영화 <반지의 제왕 3 - 왕의 귀환>의 한 장면을 번뜩 떠올리게 했다.

너무 오래 전에 봤기 때문에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악의 군주' 사우론이 동원한 어마어마한 '어둠의 군대'가 인간의 도시 '이나스타리스 성(城)'을 새카맣게 타고 오르는 그 유명한 전투신은 머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코끼리 부대·투석기·공중을 날며 공격하는 용 등등…. 철갑을 입은 괴물 병사들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꾸역꾸역 성벽을 타고 올랐다.

<경향신문> 출신의 언론인인 내 입장에서는 경찰이 민주노총을 유린했다는 사실보다, 사전 동의는커녕 통보도 없이 언론사 건물에 들이닥쳤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그것도 체포영장 하나 달랑 들고 군사작전을 벌이듯 겹겹으로 포위하고, 현관을 부수고, 한 층계 한 층계씩 점령하고, 저항하는 노조원들을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그곳이 언론사 건물이라는 고려는 전혀 없었다.

노조파괴 작전에 언론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입주한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에 지난 22일 경찰이 투입된 가운데 집입작전 도중 파손한 유리문쪽에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배치되어 있다.
▲ 민주노총 입주 건물 봉쇄한 경찰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입주한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건물에 지난 22일 경찰이 투입된 가운데 집입작전 도중 파손한 유리문쪽에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배치되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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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에는 '소도'(蘇塗)라는 게 있었다. 소도는 공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쫓기는 범죄 피의자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198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는 명동성당이 일정 정도 소도 역할을 했었다. 물론 경향신문사에 그런 소도 역할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시대상황도 그렇고 무엇보다 일개 언론기관이 명동성당이라는 성소(聖所)가 갖는 권위를 누릴 수는 없다.

<경향신문>은 오늘(23일) 아침 지면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경찰이 영장을 발부받았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우려되므로 신문사 건물에 경찰이 진입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이 대규모 병력동원이 아닌 덜 위험한 방안을 마련해 계속해서 정중하게 협조를 요청했다면 경향신문사로서는 끝까지 이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성명서 마지막 부분에 "(<경향신문>은) 철도 노조원들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사무실이 아닌 경향신문 내 다른 공간에서 점거 농성을 벌인 것에 유감을 표시했습니다"라고 사족처럼 밝힌 게 그 증거다.

<경향신문>이, 나아가 언론이 공권력에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존중이다. 언론의 자유를 존중한다면 그 가치를 구현하는 '장소'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공권력은 <경향신문>을 말 그대로 유린했다. 그것은 특정 신문의 언론 자유는 무시하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다. 

공안정국이 한창이던 1989년 7월 어느 날에도 경찰과 안기부 요원 수백 명이 한겨레신문사에 쳐들어간 적이 있다. 서경원 국회의원이 밀입북 혐의로 체포됐는데, 방북 전 그를 취재한 <한겨레> 기자를 '불고지죄'로 걸고, 그의 취재수첩을 빼앗기 위해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편집국 압수수색을 감행한 것이다. 그때 검찰총장은 현재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기춘이었다.

묘하지 않은가. 그때나 지금이나 나름 진보언론(이라기 보다는 정상언론)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신문사들만이 공권력의 공격대상이 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이명박 정권 초기를 발칵 뒤집어놨던 촛불시위 때 '<조선일보>-이명박 정권'이 보여준 우스꽝스러운 정경이 겹쳐보인다.

<조선일보>가 지면을 통해 "(촛불시위대로부터) 청와대만 지키고 태평로는 불법상태로 방치할 것인가"는 식으로 말하자 문화부 장관 유인촌이 허겁지겁 조선일보사로 달려 가 사과하고 경찰력을 풀어 조선일보사를 철통경비했던 해프닝이 있었다. 민주노총이 조선일보사에 세 들어 살 일도 없겠지만, 만일 그랬다면 경찰이 이번처럼 함부로 쳐들어가지는 못 했을 게다.

올해의 사자성어 '도행역시'에 따라오는 건 '민무신불립'

지난 1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지난 1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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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은 지난 1년 노령기초연금, 4대 질병보장, 반값 등록금 등 공약이란 공약은 거의 뒤집었다.

대선 직전 박근혜 후보 측이 '근거 없는 흑색비방'이라며 "박근혜 후보는 국민의 뜻에 반하는 민영화는 추진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입니다"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지금 박 정권은 철도·의료 등에서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기타 다른 공공부문도 민영화할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

교수들이 올해의 4자성어로 뽑은 '도행역시'(倒行逆施·차례를 거꾸로 시행한다는 뜻, 즉 도리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며 상도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가리킴)가 정확히 들어맞는 이유다. 철도노조는 '도행역시'를 맨 앞에서 막으려 몸을 던진 것이고, 민심은 점차 이를 지지하고 있다.

무자비한 공권력 행사는 정권의 강함이 아니라 냐악함을 자백하는 증좌다. 나는 박근혜 정권이 '도행역시'의 반작용에 발칵할 것이 아니라 이젠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을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민무신불립'은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정권이)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 박근혜 정권이 민무신불립을 자초하고 있지 않은가.

숫적으로 턱없이 부족했던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콘도르 왕국은 인간의 세계를 악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똘돌 뭉쳐 '악마의 군대'를 물리쳤다. 로한 군대·나무 부대·유령 부대 등의 연대투쟁이 그것을 가능케 했음은 물론이다. 일단 패색이 짙어지자마자 막강했던 '악마의 군대'는 순식간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영화의 줄거리다.


태그:#민주노총, #경향신문, #공권력투입, #무신불립, #도행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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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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