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키리시탄의 고향 오우라 천주당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을 보고 나서 우리는 오우라 천주당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걸어서 사쿠라마치(樓町) 거리로 나간다. 교차로 앞으로 나가사키 시청이 보인다. 우리는 고카이도마에(公會堂前)역에서 5호선 전차를 타고 오우라덴슈도시다(大浦天主堂下)까지 간다. 그곳에서 전차를 내리면 길은 이시바시(石橋)를 건너 글로버 힐(Glover Hill)로 이어진다. 힐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길은 클로버가든 쪽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다. 길가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상가에서는 물건을 파느라 호객행위를 한다. 우리는 나가사키 카스테라가 유명하다고 해서 한쪽씩 맛을 본다. 국내에서 먹던 카스테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카스테라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빵인 것 같다. 언덕을 따라 오르다 보니 앞에 오우라 천주당이 나타난다. 입구에는 크리스마스를 대비해 천사상을 설치하고 조명등을 연결해 놓았다. 밤이 되면 더 화려하게 빛날 것 같다. 오우라 천주당은 계단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야 들어갈 수 있다.
오우라 천주당은 1864년 12월에 고딕양식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5년 2월 19일 일본 26성인에게 봉헌되었다. 시민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보다 건축학적인 아름다움을 보기 인해 이 성당을 찾았고, 프랑스 절(フランス寺) 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3월 17일 천주당에서 북쪽으로 6㎞ 떨어진 우라카미(浦上)에 살던 농민 15명이 이 프랑스 절을 찾아와서는 자신들이 키리시탄임을 밝히고 성모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250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지킨 잠복 키리시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을 일본 가톨릭에서는 '신도발견'이라고 부른다. 오우라 천주당은 1891년 나가사키 교구의 주교좌성당이 된다. 1953년에는 서양식 건물로는 최초로 국보가 되었다. 1962년에는 주교좌성당이 우라카미 성당으로 변경되고, 1965년에는 신자발견 기념비가 제막된다. 그 후 오우라 천주당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해 1975년 11월 3일 오우라 교회를 지어 모든 전례를 그곳으로 옮겨 진행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오우라 천주당은 역사관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천주당을 보기 위해서는 300¥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이곳 오우라 천주당에서는 고딕식 성당 내부와 제대 그리고 성모자상을 볼 수 있다. 또 천주당 옆으로 주교관과 라틴어학교 건물을 볼 수 있다. 오우라 천주당은 미나미야마(南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가사키항이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오우라 천주당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글로버 가든이 나온다.
글로버, 구라바 일가의 성공 스토리글로버 가든이라는 이름은 1863년에 지어진 글로버(Thomas Blake Glover) 저택 때문에 생겨났다. 1859년 나가사키, 요코하마, 하코다테가 자유무역항으로 개방된 후 1860년 나가사키 미나미야마테 지구에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 후 외국인거류지가 점차 확장되고, 1866년 데지마(出島)까지 외국인 거류지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외국인 기업가와 상인들이 이곳에 저택을 지으면서,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는 일본 근대문화의 발상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때 지어진 집이 링거(Frederik Ringer) 저택, 올트(William John Alt) 저택, 워커형제(Walker Brothers) 저택, 미츠비시(三菱) 제2도크하우스다. 우리 일행은 1시간 정도 글로버 가든을 둘러보기로 하고 각자 글로버 가든 관찰과 탐색에 들어간다. 나는 글로버 가든 안내지도에 따라 제1게이트에서 출발해 미츠비시 제2도크하우스까지 올라가기로 한다. 그리고 제2게이트를 지나 있는 글로버 스카이로드는 포기하고, 스틸(Steel) 기념학교까지 간다. 마지막에는 나가사키 전통예능관을 통해 나갈 예정이다.
계단을 따라 가든으로 올라간 나는 먼저 전망대에 오른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나가사키 항구와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는 어제 밤 올라갔던 이나사야마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조금 전에 살펴 본 오우라 천주당의 지붕과 첨탑이 보인다. 이곳에서 우리는 단체사진을 찍고 헤어진다. 나는 이제 글로버 가든에서 가장 유명한 글로버 저택으로 향한다. 글로버 저택의 주인은 1859년 나가사키 개항과 함께 들어온 스코트랜드 출신의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다. 그는 당시 21살에 불과했다.
처음 그는 쟈르댕(Jardine)과 마티슨(Matheson) 상회에서 일했다. 1861년 이 상회가 중국으로 철수하자, 글로버는 이 상회가 하던 일을 떠맡아 글로버 상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서양의 최신 기술을 일본이 도입할 수 있도록 중개역할을 할 뿐 아니라, 상품 교역을 통해 이익을 창출한다. 더욱이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토대로 사업을 계속 확장해 나간다. 그가 주력했던 사업은 무기 수입, 조선기술 도입, 채탄, 차(茶: Tea)의 제조와 판매였다. 1866년에는 사쓰마번(薩摩藩)의 무사였던 고다이 도모아츠(五代友厚)의 중매로 아와지야 쓰루(淡路屋ツル)와 결혼했다. 그녀는 당시 아와지야 조선소 사장의 딸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딸 하나(Hana)와 아들 구라바 토미사부로(倉場富三郞)가 태어났다. 토미사부로는 나중에 나가사키의 실업계와 사교계 거물로 활약한다. 특히 그는 어선의 수입과 제조, 어로법의 개선 등을 통해 일본 수산계(水産界)에 혁명을 일으킨다. 그는 또한 대학 때의 전공인 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1933년 『구라바어보』라는 어류도감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들 부자 두 세대에 걸친 유산이 이곳 글로버 저택에 남아 있다.
아버지 글로버는 1870년대까지 사업을 확장했으나,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과 불평사족(不平士族)의 난(1874-1877)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가 거래한 번으로부터 자금이 회수되지 않아 결국 글로버 상회는 도산하고 만다. 그 후 그는 미츠비시의 고문이 되었고, 기린맥주회사의 설립에 관여한다. 1897년에는 아주 도쿄로 거처를 옮겨 미츠미시 고문으로 여생을 보낸다. 그는 또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글로버 저택 돌아보기
글로버 저택은 목조기와로 이루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재료가 일본의 것이라면, 내외부 구조는 서양식이다. 건물에 덧대 회랑을 만들었고, 앞쪽으로 정원을 배치했다. 그 정원 앞마당에서 보면 나가사키 항구가 완전하게 조망된다. 나는 정원의 꽃밭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간다. 응접실에는 서양식 둥근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이곳을 지나면 거실로 이어진다. 거실에는 아들 구라바의 흉상이 있다. 아버지 글로버의 흉상은 저택 바깥마당에 있다. 거실 앞쪽으로는 식물원이 있다. 이곳에는 아열대식물들이 재배되고, 난이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이제 식당으로 가 본다. 식당은 두 개인데, 하나는 평상시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회를 위해 좀 더 크게 만들었다. 평상시 사용하는 식당에는 식탁 위에 도자기로 만든 그릇이 놓여 있다. 가구나 그릇이 양식이고, 창문도 크게 내서 내부가 아주 밝은 편이다. 연회용 식당에는 성찬이 한상 차려져 있다. 식탁보를 덮은 길고 큰 식탁에 햄, 베이컨, 치즈, 닭고기 등 서양음식이 가득하다. 벽에는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 피아노까지 있다. 피아노 위로는 글로버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나는 이제 침실을 지나 부엌으로 가 본다. 부엌 역시 서양식으로 되어 있다. 벽돌을 쌓아 화덕을 만들고 그 위에 조리용 그릇을 올려놓도록 했다. 이곳 침실 중 하나가 글로버의 아내 쓰루가 사용하던 방인데, 이곳에는 메이지 초기 왕조부활을 위해 애썼던 지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글로버 부부가 이들 왕당파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명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 사카모토는 사쓰마번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성사시켜 에도막부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무라이다.
글로버 저택을 나오니 레이스가 화려한 서양식 복장에 모자를 쓴 여성들이 보인다. 이들은 정원과 회랑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도 찍는다. 이들은 가까운 곳(나가사키 지방법원장 관사)에 있는 레트로 사진관에서 의상을 대여해 입고 온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또 연인으로 보이는 두 커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보았다. 이들의 복장을 통해 나는 잠시 한 세기쯤 뒤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글로버 가든은 역시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서양요리의 발상지 지유테이글로버 저택에서 계단을 오르면 미우라 다마키(三浦環) 동상 앞 광장이 나온다. 광장 왼쪽으로 지유테이(自由亭)가 있고, 길은 워커 주택 쪽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지유테이가 바로 서양요리의 발상지다. 에도시대 말 쿠사노 조키치(草野丈吉)가 이라바야시(伊良林) 신사 앞에 일본 최초로 서양요리 전문 레스토랑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는 데지마에 살고 있던 네덜란드 사람 밑에서 요리수업을 받은 다음 개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공사가 진행중이다. 12월말에나 공사가 끝난다고 해서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이 건물 2층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지나 잠시 워커 주택에 들어가 본다. 워커 주택은 잉글랜드 출신 로버트 네일 워커가 살던 집으로 그의 아들까지 2대에 걸쳐 70년을 살았다고 한다. 워커는 1898년에 워커상회를 건립하였으며, 일본 해운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사이다와 레몬에이드 같은 청량음료와 맥주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