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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 마을과 선착장  물이 빠지면 모래 사장이 나타난다.
손죽도 마을과 선착장 물이 빠지면 모래 사장이 나타난다. ⓒ 이재언

여수에서 오전 7시 40분에 거문도 가는 쾌속선에 올라 뭍을 떠난 지 1시간이 지나면 고흥 나로도에 닿는다. 여기서 30분 정도 바다 촘촘히 떠 있는 섬들 사이를 미끄러져 간 여객선은 손죽도 선착장에 여행자들을 내려놓았다.

손죽도는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순국의 섬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꽃다운 스물두 살. 그는 현종 때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1591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충무공 이순신이 큰 인물을 잃어 크게 손해를 보았다 해서 이 섬을 손대도(損大島)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일제강점기 하인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손죽도(損竹島)로 개명되었다.

이렇게 손죽도는 슬픈 역사가 있고, 사납고 험한 바다를 개척한 바다의 사나이들이 살던 유명한 섬이 손죽도이다. 손죽도는 고흥군 '외나로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섬. 여수에서는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그만큼 손죽도가 먼 거리에 있는 '오지의 섬'이란 의미다.

손죽항으로 들어오는 여객선 오가고호 선창에 대기중인 배는 섬사랑호
손죽항으로 들어오는 여객선 오가고호선창에 대기중인 배는 섬사랑호 ⓒ 이재언

실제로 여수 시내에서 약 74㎞, 면소재지인 거문리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28.3㎞ 떨어져 있다. 여객선이 손죽항 입구에 닿으면 왼쪽으로 여객선이 접안하는 바지선이 있는데 그 옆에 인근의 작은 섬인 소거문도·광도·평도 주민들의 고마운 발노릇을 하는 순회선 섬사랑호가 대기하고 있다.

손죽도는 섬의 모양은 삼각형이다. 선착장은 바다에서 봤을 때 왼쪽에 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선착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깨끗하게 만들어진 손죽여객선터미널. 건물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였다. 북쪽을 향해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는 섬으로 선착장에서 바라보는 호안은 U자형으로 깊숙이 파여 있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포구를 이루고 있다.

청년 장군 이대원을 아는가

청년 이대원 장군 사당 마을 한 복판에 있다.
청년 이대원 장군 사당마을 한 복판에 있다. ⓒ 이재언

터미널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역시 마을 입구 쪽에 쉼터 역할을 하는 팔각정을 만나게 된다. 그 뒤편 파출지소 뒤에는 붉은 벽돌로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있는데 노인회관이다. 가정집처럼 보이는 건물에 손죽리사무소가 있고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몇 그루의 큰 소나무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 전통한옥이 보인다. 바로 이대원 장군 사당인 '충렬사(忠烈祠)'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1587년(선조 20) 2월 17일 손죽도 앞바다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당시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이곳 손죽도 해전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 순국하였는데 1637년(인조 15) 사당이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초가 건물로 된 사당에서 손죽도 주민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동안 퇴락과 수리를 거듭해오다가 1983년 마을 주민들의 정성이 담긴 성금으로 대지 60평에 건평 5평의 목조 기와집으로 현재 사당 건물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음력 3월 3일에 이대원 장군 '숭모제(崇慕祭)'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어촌 생활에도 주민들의 성금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동상'도 세웠다. 22세의 나이로 남해안을 침입한 왜구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처참하게 순국한 이대원 장군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녹도만호 이대원(李大源, 1566~1587) 장군은 1566년(명종 21)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하여 18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21세에 녹도만호(현 고흥군 녹동읍)로 부임했다.

이듬해 2월 10일 왜적이 고흥 연안 섬에 출몰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전라좌수사는 이 장군을 출전시켰다. 이대원 장군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배로 적을 추격․대파하자 그 전공을 가로채고자 전라좌수사가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직속상관 이었던 수사 심암은 이를 거절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좌수사가 왜적이 또 침입하자 손죽도 앞바다에 나가 싸울 것을 명하니 장군은 이 전투에서 지원군 없이 3일 동안 악전고투 끝에 왜적에 붙잡혀 처참히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80년 역사의 학교  

마을 앞에는 모래사장이 200미터가량 형성되어 있는데 맨발로 다니고 싶을 생각이 들 정도로 모래가 참으로 가늘다. 이 모래밭을 낀 해안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학교가 보인다. 학교는 주변에 심어 놓은 나무들과 잘 조화되어 아담하고 예쁘다. 150평쯤 되어 보이는 학교 건물 앞에 400평 정도의 잔디밭 운동장이 펼쳐져 있다. 바로 손죽분교이다. 1937년에 문을 열었으니 손죽초등학교는 거문도의 여느 학교들보다 역사가 깊은 셈이다. 그러나 학생 수의 감소에 따라 이후 분교로 격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밀조밀 아담한 학교의 운동장에는 불과 세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선생님은 이 학교에 학생이 3명뿐인데 그중 한 명이 딸이라고 했다. 어려운 지역 실정을 감안한 선생님의 대단한 결단력과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을 심어 주려는 아빠 선생님의 배려심이 엿보인다. 1970년도에는 최고 360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91가구만이 살고 있는 손죽도의 학교는 폐교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30년 만에 복원된 전통 화전놀이

학교에서 화전놀이 장면  30년만에 복원된 전통 화전놀이
학교에서 화전놀이 장면 30년만에 복원된 전통 화전놀이 ⓒ 이재언

지금은 91가구만 사는 손죽도, 이 섬의 최고봉은 '깃대봉'으로 섬 중앙에 있는데 그 높이는 242m라고 한다. 깃대봉을 중심으로 산줄기가 양팔을 벌리듯 뻗어 있는데 왼쪽 끝에는 쌍봉, 오른쪽 끝에는 구릉이 평평한 댄머리(배들이 들어와 정박하는 곳)봉이 있어 낙타 등허리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때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이 진을 치고 방위하면서 봉화를 올렸다고 하는 '봉화산(彼火山)', 섬 오른쪽 끝부분에 두 개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마음에 들었다. 두 개의 봉우리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바위였다.

깃대봉의 남쪽에는 '지지미재'라는 곳이 있어 예로부터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화전인 지지미를 부쳐 먹으며 놀이를 했다고 한다. 2011년에 이촌향도 현상과 주민 감소로 명맥이 끊긴 여수 손죽도 화전놀이가 30년만에 복원되었다. 화전놀이는 예전에는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강남갔던 제비가 날아오고, 나비가 날아 들며, 진달래가 만발하는 시기에 제액(除厄)의 의미로 동천에 나가 제비 맞이, 화전 즐기기 등으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손죽도에서는 주로 부녀자들이 마을 뒷산 지지미 고개에서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으면서 춤도 추고 잔치를 했다. 진달래 꽃잎을 찹쌀가루를 버무른 위에 올리고 쇠판에 기름을 둘러 지진 전(煎)을 만들어 먹으면서 봄맞이 놀이를 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풍물로 춤곡을 벌리고, 여성들은 지지미고개에서 화전놀이를 한다.

화전놀이를 할 때 부르던 노래는 주로 쓰인 뒷소리 '제화(諸花) 좋소 제(諸) 제화(諸花)가 좋음도 좋소, 명년(明年) 춘삼월에도 화전놀이를 합시다'이지만, 이것이 지루할 때 쯤에는 '산아지타령'이나 청춘가, 쾌지나 칭칭나네 등도 곁들엿다. 뒷소리는 '에야 데야 아헤헤해야 에야라 디어로 산아지로 구나', 혹은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얼씨구나 절씨구' 또는 '얼씨구나, 좋네 저절씨구, 아니, 놀지는 못하겠네'가 쓰인다. 뿐만 아니라 '강강술래' '꽤지나 칭칭나네' 등이 모두 동원되어 여성들의 심신에 살풀이가 이루어지고 되살이가 주어졌다.

화전놀이가 펼쳐졌던 지지미재는 바닷가에서 손죽마을을 바라볼 때 중앙에 있는 야트막한 산등성이로 깃대봉의 남쪽에 있다. 올해로 네 번째로 운영되는 이번 프로그램은 삼산면 신석기 조개더미 유적지 방문, 지지미재 화전놀이, 사난이타령 등의 프로그램으로 꾸며졌다. 여수매구진흥회 회원들도 현지민과 함께 화전놀이, 봉기 길굿놀이, 밤굿 가면놀이 등 전통문화를 재현한다.

물 반 고기 반, 풍요로운 바다와 중선배

안강망 어선  안강망에서 고기를 따고 있는 모습
안강망 어선 안강망에서 고기를 따고 있는 모습 ⓒ 이재언

화전놀이가 일주일씩 이어지고 수백 년간 충신 이대원 장군을 추모하며 제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섬주변의 바다가 주는 풍요로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손죽도는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 할 정도로 어족 자원이 풍부했다.

재래식 어구법을 벗어나 기계화된 어업이 시작되었던 일제강점기 손죽도의 경제는 중선배에서 시작되었다. 중선배란 이름은 우리나라의 전통어구인 중선망을 이용하여 이름 붙여진 고기잡이 방법으로 바다에 닻을 내려 어선을 고정시킨 뒤에 양쪽 현(舷)에 딸린 어망 2통을 펼쳐 조류를 따라 움직이는 어류를 잡는 것이다. 밀물과 썰물의 흐름을 이용한 어법이므로 주로 서해안에서 사용되었으며 주요 어획물은 조기와 새우였다.

이 방법이 개량화 된 것이 안강망이란 어구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아귀를 뜻하는 한자인 안(鮟)자와 강(鱇)자를 사용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물속에 아귀의 입을 벌린 것처럼 고정된 닻에 큰 입을 벌린 그물로 고기를 유인하여 잡는 방법 때문에 안강망이라 이름 붙여진 일본식 이름이다. 손죽도의 중선배가 가장 많았던 때는 일제 후반 해방 직전으로 알려진다. 1920년대부터 도입된 신식 어구가 1940년대에는 절정을 이루어서 손죽도지에 55척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선원들의 대우가 좋아서 많은 사람이 몰려와 300여 가구에 500여세대가 살았고 1가구에 2~3세대가 사는 집이 많을 정도였다.

육지에서 먼 섬에 위치해 있다 보니 손죽도 사람들은 일찍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풍선을 타고 서해의 위도와 연평도까지 진출하여 뱃길을 열고 어장을 개척했다. 농사가 최고인 시절에 전답이라곤 하나 없고 육지의 한 사람의 땅도 안 되는 작은 섬에서 천여 명이 살았으니 오직 바다 개척만이 살 길이었다. 그때는 동력선은 상상도 못했기에 바람 따라 물때 따라 가는 풍선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조류를 이용하여 항해를 하여야만 고생을 덜 하고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험한 바다를 누비고 다녔던 그 시절 사람들은 봄에는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불고 겨울에는 샛바람이나 높새바람이 불어오기에 계절에 따라서 항해를 하고 고기를 잡아야 했다. 일기예보도, 해도(바다 지도)도 없고, GPS(위성항법장치)는 당연히 없었을 그때 사람들은 오로지 나침반 하나에 의지하여 안개와 암초와 파도와 풍향을 꿰뚫어 보고 지형지물을 숙지하여 바다로 나섰다. 그렇게 생존 전략 차원에서 항해술을 익히며 살았지만 지리적으로 워낙 풍랑이 거센 먼바다의 섬이기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섬과 섬의 교류 역사를 가진 손죽도

그럼에도 삼산면에 있는 먼섬 손죽도와 초도와 거문도가 다른 지역과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삼산면지(2000. 12,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보면 울릉도와 거문도의 교류는 1970년대까지 이어져 오징어 어획 철이면 많은 배들이 울릉도 어장에 진출하여 오징어를 잡았다. 이러한 어로 행위는 조기 철이면 황해안의 위도, 군산까지 진출하였으며 멀리는 황해도 장산곶까지도 다녀왔다고 전해진다.

특히 황해안까지 출어 한 것은 중선배가 많았던 손죽도에서 주로 이루어 졌는데, 손죽도의 중선배 조업은 설을 지내고 나서 흥양바다(손죽도 주변바다)의 조기잡이부터 시작되었다. 아랫역(흥양바다)에서 조업을 할 경우에는 조금 때를 맞추어 며칠씩 고향에 돌아올 수 있지만 웃녁(연평도, 칠산 앞바다 등)에 출어할 때는 몇 개월씩 고향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영광 법성포 앞바다, 칠산 앞바다로 이동하면서 조업하고 조기들이 산란하는 연평도 부근까지 출어하였다.

봄철에 조기들이 산란을 마치고 회유할 때부터 손죽도를 향해 남하하면서 조업을 하고, 흑산도 근해에서 강달이 조업을 마친 후 조금이 되면 신안군 비금도에서 손죽도 배들이 서로 만나 회포를 풀었다. 이렇게 올린 수확으로 보리 등 생필품을 구입하여 음력 6,7월경 손죽도에 귀향하면 약 반 년이 걸렸다. 이후 1개월 정도 휴식과 정비를 마치고 가을철에는 진도 조도 앞바다, 추자도 근해, 부산 가덕도 등에서 갈치 잡이를 하였는데 이때 올린 수입으로 생필품과 볏집 등을 구하여 가옥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업 구역은 1960년대까지 지속되다가 1960년대 중반 평화선이 한일 어업협정으로 없어지고 연평도 조업이 묶이면서 동지나해로 출어 구역을 변화시켰다.

슬픈 바다 역사를 가진 섬마을 

요즈음처럼 선박의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절 그래서 여느 섬이 그러하듯, 손죽도에도 슬픈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1950년대 말 2월에 손죽도와 초도 사이에서 노 젓는 배로 낚시를 하는데 갑자기 부는 샛바람 때문에 대부분 초도로 대피항하였으나 그중에 배도 크고 경험이 많은 여섯 명이 탄 배 한 척이 손죽도로 오다가 그대로 수장되고 말았다.

1959년 9월 추석 무렵, 8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라호 태풍 때 부산 근해로 갈치 잡이를 갔던 손죽도 배 두 척이 침몰하였다. 한 배에 일곱 명씩 탔는데 한 명은 구조되고 나머지 열세 명 모두 사망했다. 그리고 1960년대 초에는 연평도에 조기잡이를 갔다가 배가 침몰하여 여섯 명 중 한 명이 살아남고 다섯 명은 수장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에는 동지나해로 조업을 나갔던 배가 초가을 손죽도 마을 사람 8명과 함께 바다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두 명의 어부들이 바다에 빠져 죽은 사건이 셀 수 없이 많아 손죽도에는 슬프게도 이렇게 제삿날이 한날이 되는 날이 일 년에 네 번 있다고 한다. 동력선이 생긴 후에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데 동력선이 없던 아주 옛날부터 이 섬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니 그들의 용기가 대단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손죽도에는 과부가 많고 자연의 두려움이 컸기에 우상 숭배가 심하였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고 동력선이 생겨 불편한 섬보다 문화가 발달한 도시에서 얼마든지 배를 타고 집에서 드나들면서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광으로 유명한 섬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어부들이 섬에서 생활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훗날 여수가 우리나라 수산업과 원양어업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배경에는 손죽도를 비롯한 주변 어장의 경험과 자본이 어울러져서 축적되어 이루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손죽도 개요
●손죽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딸린 섬으로 여수에서 약 74㎞, 면소재지인 거문리에서는 북동쪽으로 28.3㎞ 떨어져 있다. 면적 2.919㎢, 해안선 길이 11.6㎞이다. 인구는 91가구 194명(2010년)이다.

●손죽도 가는 길 여수 여객선터미널 1일
2회 운항(소요 시간 1시간 20분) - 출항 시간 07:40, 13:40

덧붙이는 글 | 전과 동일



#화전놀이#중선배#손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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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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