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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했다. 지난 밤새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길 위는 온통 얼음판이다. 도로 위 오가는 차들도, 보도 위 행인들의 발길도 부쩍 줄었다. 인적이 드문 도로변 셔터 내려진 가게 앞에 머리 희끗한 할머니 한 분이 볼기 터진 낡은 다운점퍼를 입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다. 폐지를 줍고 계신 거다. 그것도 맨손으로.

눈과 추위 탓에 폐지가 담벼락에 붙어있어 쉽게 떼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서너 겹의 종이상자와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고 계셨다. 가엾은 마음에 다가가 거들었다. 손으로 잡아당기기도 하고, 발로 차보기도 하면서 간신히 떼어 냈다. 할머니의 작은 손수레에는 그렇듯 물기 머금은 폐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할머니에게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드렸다. 그때 난 '사치스럽게' 조깅 중이었다. 벌겋게 얼어있는 그 손을 보고도 못 본 채 돌아설 수 없었다. 투박하고 낡은 남성용 털장갑이었지만, 적어도 오늘 같은 날 일하시는 데는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듣자니까 이 엄동설한에 종일 폐지를 주워 팔아도, 벌이가 채 만 원도 안 된다고 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로 건너편에서도 허리 꾸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 폐지를 줍고 있다. 녹이 슨 탓인지 손수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로 아는 사이라고 했다. 구역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면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분에 비하면 자신은 양반이라며, 건네받은 장갑조차 부담스러워했다.

"저 할매 정말 불쌍한 처지라. 약을 밥보다 더 많이 먹을 만큼 몸이 안 좋은데도, 손주 때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렇게 고생하는 거라. 엄동설한에 방에 보일러라도 켜고 지내는지 몰라. 내가 주운 폐지를 얹어주고 싶다니까."

대체 누가 누구를 걱정해주나. 무심한 겨울 추위는 그렇듯 약자들에게 가혹하다.

얼마 전 슈퍼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의 타클로반 지역을 강타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태풍이라는 자연현상조차 왜 그리 약자에 가혹한지. 해서는 안 될 말로, 차라리 일본이나 우리나라를 지났다면 그토록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도시는 마치 원자폭탄이라도 맞은 듯 폐허로 변했다. 당시 현장을 담은 사진은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순간 지옥으로 변한 타클로반은 개발도상국인 필리핀 내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이라고 한다.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자 세계 여러 나라들로부터 구호품이 속속 도착했다. 그 양도, 종류도 엄청났다. 그러나 구호품은 온전히 구호 목적으로만 사용되지는 못했다. 전달되는 과정에서 부패 관료들이 상당량을 착복하고, 구호 체계가 미비한 탓에 엉뚱한 곳으로 보내진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약자들을 위해 마련된 구호 체계마저 제 구실을 못한 채 되레 그들을 방기한 셈이 됐다.

이러한 황당한 소식이 전해지자, 타클로반 지역 피해 주민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운동도 순간 열기가 식어버렸다. 설령 백에 하나만 전달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생명줄이나 다름없으니 기부와 지원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하소연이, 누구 좋으라고 내 주머니를 터냐는 등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묻혀갔다.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무관심의 최종 피해자는 물론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긴 주변에 워낙 흔한 일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이야기다. 친한 지인 중 한 분이 정기 건강 검진 과정에서 암이 발견됐다. 1기든 말기든, 암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공포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의료기술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암은 '불치병'이라는 인식이 강한 탓이다.

판정을 받자마자 그와 가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병원의 '인맥'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지방이 아닌 서울, 이왕이면 유명 대학의 부속병원이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병원에서 서둘러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깨나 쓰는 사람을 수소문하려는 것이다. 목숨이 걸린 일에 이른바 '급행료' 정도는 문제될 것도 없다.

누구든 암 같은 큰 수술은 '당연히' 서울에서 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주지하다시피, 서울과 지방으로 철저히 서열화한 것은 대학만이 아니다. 병원은 대학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주변에 누군가 암 수술을 지방 소재 병원에서 받았다고 하면, 그를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상식적이라면, 의사들의 전문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치료가 시급한 환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 게 맞다. 병원에 인맥이 없고, 돈이 없다고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서글픈 일은 없다. 더욱이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없다면, 이는 엄연한 차별이며, 지방은 더욱 빠른 속도로 공동화할 것이다.

'다행히도' 그 분은 일찍 수술 날짜를 받았다. 여전히 그와 그의 가족들은 여기저기 손을 써서 가능했던 일이라 믿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돈과 인맥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의 '새치기'로 인해 누군가는 피해를 입었을 테고, 그는 같은 환자일지언정 필경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후순위'로 밀려났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문제 삼기보다, '돈 없고 빽 없는' 자신의 무능을 탓할 것이다. 암에 걸린 것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것도, 혹 수술 시기를 놓쳐 죽게 됐대도 가슴을 치며 자책할 게 뻔하다. 모질게도 착한 우리네 '장삼이사'들처럼.

소득분위별로 보면, 소득이 낮을수록 암 환자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가난할수록 암에 잘 걸린다는 뜻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쾌적한 환경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고소득층이 더 건강하리라는 건 당연하지만, 진단과 치료하는 과정에서조차 그러하다면 '적자생존'의 동물의 세계와 하등 다를 바 없다.

무릇 정치란 우리가 당연한 듯 여기는 이러한 사회적인 모순과 불평등을 보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정치가 구현해야 할 '정의'란 늘 약자의 편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의로운' 정치가 과연 우리에겐 있는가. '정의'는커녕 우리 정치에 '온기'라도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듯 약자들의 고통에 둔감할 리 없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했던가.

"자식을 잘못 키운 탓이니, 누굴 원망하겠느냐"며, 다시 폐지 수북한 손수레를 끌고 총총걸음으로 길을 나서는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 애처롭다. 그 분에게 필요한 건, '폐지'가 아니라 '정치'다. 세밑이었지만, 차마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은 건네지 못했다. 그 분의 신산한 길 위의 삶에, 부디 건강을 빈다.


태그:#세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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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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