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2500년 전 공자가 <논어>에 적은 문구입니다. 2014년 대한민국도 '배우고 익히는' 열기가 뜨겁습니다.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아이들은 보다 나은 성적을 위해, 직장에선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합니다. 하지만 즐거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걸 놓쳐서입니다. 함께 모여 '즐거운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 사례를 통해 공부가 왜 익힐수록 즐거운지 살펴봅니다. - 기자말
"너도 긁어!"한결(15)은 옆에 앉은 동곤(15)에게 1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며 씩 웃었다. 이들은 가로 세로 30cm 하얀 천에 나뭇잎을 올려 놓고 얇은 비닐을 씌웠다. 그리고는 얼굴을 두 팔에 파묻은 채 열심히 긁었다. 하지만 기대만큼 색이 배지 않았다. 아쉽다는 표정으로 "가을 축제 땐 붉은 단풍도 있었고, 노란 은행도 있어서 참 잘나왔는데…"하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두 사람은 이번 숭문중학교(서울시 마포구) '환경반 연말파티'에서도 자신들의 부스가 가장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가을 축제 때는 손수건이 부족해 걸음을 돌린 친구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동곤은 "큰 마음 먹고 손수건 50장이나 준비했는데 색이 안 나와 걱정"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한 사람이 앉자 이내 부스 앞에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생겼다.
한파가 한풀 꺾인 지난해 12월 30일 오후, 서울 시청역 인근의 한 카페를 찾았다. 이날은 숭문중 환경반 주최 '연말파티'가 열린 날이다. 환경반 신경준 교사와 30명의 친구들이 지난 1년간의 활동을 정리해 선보였다. 여느 중학교 동아리 발표회를 상상해선 안 된다. 환경단체 못지않은 다양한 활동이 있었다. 1년을 정리하는 현장에서 숭문중 환경반 이야기를 들어봤다.
"소풍에서 돼지껍데기, 순대국밥 먹어 봤어요?"
잔치엔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 행사장 입구부터 군침 도는 냄새가 가득했다. 자리에 앉자 이내 "떡 드세요"라는 말과 함께 환경반 진형(14)이 주전부리를 한가득 내왔다. 그런데 눈에 띄는 건 따로 있었다. 귤과 계란 껍질을 버리라고 만들어 놓은 종이 상자였다. 신문지를 재활용해 곱게 접었다. 환경반다운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행사 진행의 모든 것이 환경반 친구들에 의해 이뤄졌다. 각 부스별로 에너지 낱말 퍼즐, 손수건 천연 염색, 키보드 액세서리 만들기, 환경 사진전이 준비됐고 축하 공연까지 멤버들이 직접 선보였다.
1학년 성원(14)이는 환경반 사진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서 불러도 모를 정도였다. 성원은 "지난 1년 정말 많은 것을 했지만 '공정여행 소풍'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먹고 지역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게 공정여행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하철 타고 버스 환승해서 서울시청, 서울도서관, 청계천, 방산시장에 갔어요. 처음엔 다들 싫어했어요. 다른 반은 영화보고 놀이동산 갔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방산시장에서 시켜 먹은 돼지껍데기랑 순대국밥이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친구랑 둘이 6000원씩 냈는데. 먹는 저희도, 파는 아줌마도 신기해 했어요. 맛도 좋았고요."신경준 교사와 환경반 친구들의 소풍은 남달랐다. 쉽게 갈 수 있는 오락 시설 대신 우리 마을, 우리가 사는 지역을 올곧이 알기 위해 서울을 둘러봤다. 청계천 방산시장에 이르러선 학생들끼리 조를 짜 돌게 했다. 돼지껍데기와 순대국밥은 아이들에게 큰 추억이 됐다.
초등학교 동생들에게 에너지 절약 강의하는 중학생들
이날 행사에서 단연 인기를 끈 건 고장난 키보드를 활용해 만든 휴대폰 고리였다. 제작에 많은 품이 들진 않았다. 버려진 현수막 비닐을 잘라 그 위에 키판을 붙였고 현장에서 유성펜으로 그림 하나 그려 넣었다. 그런데 '와' 소리가 절로 나는 작품이 나왔다. 휴대폰 고리 만들기 부스를 맡은 원재(14)는 "여자 친구에게 주라"며 기자에게 방금 만든 고리까지 선물했다. 스스로가 대견한지 금세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재는 환경반 선배 호욱(16)을 불러 '에너지 퀴즈'를 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전자 제품을 사용하거나 대기전력일 때 발생하는 탄소량을 측정한 값입니다."말문이 막혔다. 순간 '중학생이 무슨 이런 난이도의 문제를 내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 호욱은 팸플릿 한 장을 꺼내들며 차분하게 "정답은 탄소발자국"이라고 했다. 그 안엔 하얀 글자로 'CO2'가 적힌 빨간 발자국이 있었다. "신경준 선생님과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탄소발자국'도 알게 됐다"고 말하는 호욱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있었다.
숭문중학교 환경반은 지난해 11월 26일 '2013년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로 선정됐다. 이 상이 얼마나 큰 상인지는 함께 수상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메이저리거 류현진이 포함돼 있다. 그들과 함께 숭문중학교 환경반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 1년 신경준 교사와 환경반 학생들이 걸어온 노력을 세상이 공감한 것이다. 환경반의 활동은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다. 지난 4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숭문중 환경반 친구들은 서대문구 '충현공부방'과 망원동 '무지개공부방'을 찾고 있다. 그곳에서 초등학생 동생들에게 에너지 절약에 대한 강의를 직접 진행했다.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만들고, 에너지 퀴즈 카드게임도 했다. 멀티탭 사용과 전력 사용량을 관리해 주는 '에코마일리지' 같은 생활 속 절약 운동도 빼놓지 않았다.
활동은 계속 발전했다. 쌀뜨물을 이용해 재생 비누까지 만들었다. 중요한 점은 단순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었다. 실제 본인들이 사용하는 비누를 제작했다. 환경반 1학년 진형(14)의 어머니는 "아들 덕분에 생활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환경반이 만든 비누로 설거지를 하고, 멀티탭을 이용해 전기도 아끼고, 전력 사용의 경각심을 얻기 위해 탄소발자국도 전자제품에 붙여놨어요."환경반 활동이 가족의 일상까지 바꾼 것이다.
"졸업하고, 스무 살이 넘어도... 여러분을 믿습니다"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었다. 숭문중 환경반이 자리잡기까진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환경반 담당 신경준 교사의 몫이 컸다. 신 교사는 "2011년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적극적인 환경반 활동의 필요성을 공감했고, 이후 아이들에게 환경에 대한 정확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어서 교실 밖 환경운동에 관심갖게 됐다"고 밝혔다. 신경준 교사는 8년째 숭문중학교에서 기술과 환경을 가르치고 있다. 환경반을 맡은 지는 3년이 됐다.
하지만 신 교사의 진짜 목표는 따로 있다. 신 교사는 한 해 동안 고생한 환경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만든 상장을 수여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여러분이 환경반 활동을 통해 마을을 지키는 사람으로 커갔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자란 마을에 본인 능력의 10%만 나누며 살면 정말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어요. 지난 1년 우리 숭문중 환경반이 해온 일입니다. 잊지 마세요. 졸업하고 스무 살이 넘어도 계속 환경반 활동은 이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을 믿습니다."신경준 교사의 말대로 아이들은 환경반 활동을 통해 '마을 지킴이'로 자라고 있었다. 이미 2014년을 위한 준비도 시작됐다. 지난 29일, 환경반 멤버들이 직접 가사 붙여 만든 <세이브 더 에너지(save the energy)>란 곡이 스튜디오에서 정식 녹음됐다.
겨울 내내 울려퍼질 그들의 노래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