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형용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슬프다'는 것이다. 슬픈 아일랜드, 척박하지만 아름다운 섬나라를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한 서린 역사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오코넬 거리에서 리피강 부둣길을 따라 더블린 항구 방향으로 약 650m가량 가다 보면 '대기근 동상'이 나온다. 작가 로완 길레스피(Rowan Gillespie)가 1997년 완성한 <기근 Famine>이라는 청동 작품이다.
살은 다 빠져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이들이 가슴팍에 보따리를 부둥켜안은 채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 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태한 걸음의 행렬. 한 사내는 굶어죽은 어린 자식의 주검을 바싹 야윈 어깨에 둘러멘 채 휘청이고, 내장까지 앙마른 개는 힘겹게 주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청동조각 작품인 <기근>은 1845년부터 7년 동안이나 이어진 아일랜드 대기근을 주제로 하고 있다. 1845년 당시 약 800만 명이었던 아일랜드 인구는 1851년엔 약 600만 명으로 200만 명이나 줄어든다. 대기근 기간 동안 약 100만 명이 사망했고, 약 100만 명이 모국 아일랜드를 떠났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여러 기록들은 아일랜드 대기근의 끔찍하고 비참했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아일랜드 대기근을 취재한 한 영국 기자는 "이 세상에 가난한 나라는 많지만, 전 국민이 한명도 빠짐없이 거지인 나라는 아일랜드밖에 없을 것"이라며 "길거리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마을은 황폐화되었다, 그곳은 지옥과 같았다"는 충격적인 르포를 남겼다.
피터 그레이가 쓴 <아일랜드 대기근>에는 1847년 2월 아일랜드를 방문한 미국인 엘리후 버릿이 남긴 글이 실려 있다.
"창백한 얼굴은 여느 병자의 것과 달랐다. 병자에게 있는 황달기조차 없었다. 지금 당장 묘지에서 시체를 꺼내 새로이 피를 혈관에 돌게 만들어 되살려낸다 해도 저렇게 창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가 물이 될 때까지 얼음 속에 가두었다가 꺼내면 저렇게 될까 싶다." 기아 이민선, 한살 갓난아기부터 여든 할머니까지...
아사(餓死)와 병사(病死)가 참혹하게 뒤섞인 광란의 죽음 판. 그나마 움직일 기력이라도 남은 이들은 이 지옥 같은 땅을 떠나려 배를 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온전히 다른 대륙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이민선을 탄 100만 명 가운데 1/5인 20만 명이 배에서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었다. 그래서 이 배를 '시체를 담는 관을 실은 배'라 해서 '관선(棺船, Coffin Ship)'이라 불렀다.
애드워드 랙스턴(Edward Laxton)의 <기근 선 The Famine Ships>에 따르면 아일랜드 대기근 동안 모두 186척의 이민선이 아일랜드와 영국 등지에서 출항했다. 맨 처음 출항한 배는 북아일랜드 뉴리(Newry)에서 출항한 '형제(Brothers) 호'. 1846년 4월 23일 뉴욕항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약 두 달 전인 1846년 2월 하순에 아일랜드를 떠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항해술로는 아일랜드에서 뉴욕까지 약 두 달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더블린에서 기아 이민선이 처음으로 출발한 날은 1846년 3월 18일, 아일랜드의 최대 축일인 '성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 하루 뒤였다. 대기근 동상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가 더블린 최초로 기아 이민선이 출항했던 자리다.
더블린에서 출항한 첫 기아 이민선을 탄 이는 모두 209명. 여객의 대부분은 스물 살 안팎의 젊은이들이었는데 노동자와 하인 신분이 많았다. 굶주림으로 기력이 쇠잔해진 중년층과 노인들은 두 달 동안의 항해를 견딜 엄두를 못냈을 것이다. 하지만 여든 살 브리짓(Bridget) 할머니는 아들 식구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여객 중 최고령자였다.
가장 나이 어린 여객은 한 살 갓난아기였던 캐서린(Catherine). 캐서린은 한 살 터울인 오빠 피터(Peter)와 이제 갓 서른에 접어든 아빠, 아빠보다 네 살 어린 엄마와 함께 배를 탔다. 캐서린이 탄 배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내 (Perseverance)'. 선장은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였다.
한 살 젖먹이가 감당해야 했던 인내는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얼마큼의 인내심을 품고 있어야 생물체가 당하는 가장 처참한 죽음인 굶어 죽는 일을 피할 수 있을까. 운명은 대상을 가리지 않기에 가혹하다. 가혹한 운명 앞에서 기도는, 더욱 슬플 수밖에 없다.
"세상이 온통 돌아 버렸어. 생각해 보렴.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고, 아이들이 배를 곯다니.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유령처럼 거리를 떠돌면서 모두 열병에 걸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어버리신 걸까?"- 마리타 콘론 맥케너 <슬픈 아일랜드> 중에서, 이명연 번역 캐서린이 탄 배는 두 달 후인 5월 18일 뉴욕항에 도착한다. '인내'호를 탄 여객 가운데 항해 동안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진짜 원인은 '악랄한 착취'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은 겉보기엔 주식으로 재배하던 감자에 마름병이 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영국과 영국인 지주들의 악랄한 착취 때문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감자 외에도 밀과 옥수수 등 각종 곡식이 많이 재배됐다. 하지만 감자를 제외한 나머지 곡식들은 모두 영국이 수탈해갔다. 감자 외엔 먹을 것이 없었던 차에 감자 마름병이 번지자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악랄했던 영국인 지주들은 먹을 감자조차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일랜드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강요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란 이름으로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기에 영국 왕실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싸늘히 거부한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은 다른 나라의 식량 원조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영국 그리고 영국 왕실, 영국인에 대한 한에 가까운 증오심이 심화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대기근의 여파는 1871년을 넘기면서 진정 기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1879년에 또다시 다른 형태의 기근이 급습했다. 감자 농사가 흉작이 되고, 영국이 미국에서 수입한 값싼 옥수수 때문에 곡물 값이 크게 떨어지자 영국인 지주들은 그 책임을 아일랜드인 소작인들에게 전가했다. 흉작에도 소작료는 악착같이 거둬갔고, 심지어 소작인들을 내쫓기까지 했다.
참다못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데빗과 파넬의 주도로 '토지연맹'을 결성했다. 토지연맹은 소작료를 줄이고 소작인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토지연맹이 구사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바로 '보이콧 운동(boycotting)'이었다.
아일랜드 메이요(Mayo) 주에는 토지 대리인이었던 보이콧(Boycott) 대위가 있었다. 보이콧 대위는 흉작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난한 소작인들을 내쫓았다. 소작인들을 내쫓은 보이콧 대위가 다른 주민들에게 추수를 맡기려 했다. 비정한 보이콧 대위의 행태에 분노한 주민들은 토지연맹의 제안에 따라 보이콧 농장의 추수를 거부해버린다. 아일랜드 소작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지주 및 토지 대리인과 일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보이콧' 전술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어 사전엔 '보이콧(boycott)'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새해 초입, "서울하늘 아래서 밥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2014년 신년사가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구휼(救恤)이야말로 목민관의 기본 업무"라고 했다. 백성의 가난과 굶주림, 외로움을 구제하는 일이야말로 공무(公務)를 보는 자가 마땅히 가장 앞서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가난과 굶주림과 외로움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늙고 병든 이를 기꺼이 품에 안으려는 다감한 국가와 정부. 구휼은 국가와 정부의 기본 의무다. 이 기본 의무를 안 하겠다고 강짜부리는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 그들이 말하는 효율성과 경쟁력은 국가와 정부의 이름만을 빌린 재벌과 대기업의 신종 사업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4대강 사업 등을 보며 이미 확인했다.
'기아 이민선'이 서러운 뱃고동 소리 울리며 떠나던 더블린 부둣가를 서성인다. 말 그대로 살인적인 굶주림 때문에 모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다시 돌아왔을까. "이렇게 살바에야 차라리 이민 가고 싶다"던 벗들은 모두 평온할까.
"무엇보다 건강하시라, 그리고 아낌없이 행복하시라." 지난한 연대기에 한 줄도 안 남을 새해 인사를 대서양에 띄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