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메일이 도착했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보았지만, 우울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선생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출판사에서는 선생님의 책을 출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간단히 말하면 이런 이야기다. 내 <로마문명이야기>가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그동안 써온 글을 책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국내 유수의 출판사와 연결되어 출판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막판에 무산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게 나를 슬프게 한다. 내 문명이야기에서 나오는 사회비판이 좀 걸린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로마문명이야기를 쓰면서 사회비판을 자주 하고 있지만, 그 수준이란 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도에 불과하다. 스스로 판단하건대 내 글이 본격적인 사회비판 기사로 대우받기에는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 글을 책으로 내는 것이 부담스럽다니 출판사 입장을 이해해 주고 싶어도 나로서는 솔직히 서운한 게 사실이다.
얼마 전 한 소설가가 우리나라의 저명한 문학잡지에 연재소설을 쓰기로 했다가 잡지사 측으로부터 거부통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 소설가가 쓴 1회분 원고에 '박정희 유신'과 '87년 민주항쟁'이 언급되었는데, 잡지사가 그것을 보고 마음에 걸렸던지 연재하기 어렵다고 한 모양이다. 결국, 나의 경우나 그 소설가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런 사회가 되었는가. 이런 일들은 1970년대 유신정권 시대나 1980년대 5공 시절에는 왕왕 있었다고 하지만, 그 후 민주화를 거치면서 적어도 지난 20년간은 그런 이유로 잡지사나 출판사가 글을 거부하는 일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지금 이런 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면서 사회 분위기는 점점 얼어붙고 있다. 뉴스를 들어 보면 거의 매일같이 종북좌파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정부정책에 반대하거나 정권의 정통성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종북 인사, 종북 단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누구 말대로 수도 서울이 한반도의 좌측에 위치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인지, 그 지긋지긋한 종북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수도를 우측으로 천도해야 해결될 것인지, 용한 점쟁이에게라도 묻고 싶다. 세상이 완전히 거꾸로 흘러가는 느낌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과거로의 회귀, 제왕적 대통령 다시 탄생하다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지난 대선 이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년간 어떤 대통령보다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다. 여성 대통령의 부드러움으로 국민화합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오판이었다. 부드러운 외피를 벗기면 거기엔 세찬 칼바람이 부는 동토의 대한민국이 있을 뿐이다.
그 동토 지대는 우선 정치권에서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이명박 정권 시절에는 여권에서조차 왕왕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들이 있었다. 소장파 국회의원 중에는 가끔 연판장을 돌려서라도 청와대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국회의원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내게 노안이 와서 잘못 보는 것일까.
거의 모든 여권 정치인들이 완전히 낮은 포복을 하면서 청와대와 코드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국무회의에 비친 장관들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수첩에 메모하기 바쁜 것 같다. 수첩 공주가 대권에 오르더니 이젠 수첩 대신들만이 눈에 들어온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서는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는 어떤 반론도 허용될 것 같지 않은 엄숙함만이 흐른다.
이런 분위기는 정치권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보수언론도 보수적 견해에서 정부 비판을 못 할 리 없지만, 제대로 된 비판이란 것을 본 지 오래다. 지식인의 비판 강도는 전반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자기검열의 위축 효과도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서두에서 말한 문예잡지사나 출판사의 원고 거부현상도 그런 예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 총재가 아니면서도 유신 시절 여당 총재를 겸한 박정희 대통령에 필적하는 권력을 즐기는 듯하다. 가히 부전여전(父傳女傳)이다. 유신 시절이야 대통령의 권력이 국회를 압도하는 것은 형식적이라도 헌법에 의해 보장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헌법은 그렇지도 않은데, 박 대통령 말 한마디는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그저 지존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 같다. 헌법개정 없이도 대통령의 권력을 그렇게 막강하게 만든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력은 놀라움을 넘어 신통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통치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력은 그의 높은 지지도에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선과정에서 국정원 등의 불법선거개입 논란이 지난 1년간 그치질 않았음에도 박 대통령은 50%대의 지지도를 확보했다. 박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안보논리와 경제논리는 한 겹만 벗기만 오류투성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이 많은 국민에게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언하건대 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꺾이지 않는 한 제왕적 대통령으로서의 박 대통령의 권위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18세 소년 옥타비아누스, 로마를 접수하다오늘날 우리의 정치·사회 현실을 이야기할 때 생각나는 로마인 한 사람이 있다.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다. 로마제국의 제1의 권력자로서 후세의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초대황제라 부르지만, 그는 살아생전 결코 자신을 황제라 칭한 적이 없다. 물론 헌법을 바꾸어 로마 공화정을 황제정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가 보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황제였다. 그것은 로마인의 그에 대한 절대적 지지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지지의 불가사의는 어디에서 왔을까?
카이사르가 부르투스 일파에 의해 비운의 종말로 맞이했을 때, 아무도 그의 후계자로 알려진 18세의 옥타비아누스가 대권을 쥐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로마는 이미 지중해 전체를 호령하는 대제국이 되었는데 이를 통치할 존엄한 권력자의 자리가 어찌 그런 애송이의 차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옥타비아누스는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기라성 같은 로마의 영웅들을 다 물리치고 1인자가 되어 로마제국의 명실상부한 초대황제로 등극했던 것이다.
윌 듀런트는 아우구스투스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로 시작한다.
"18세에 카이사르의 후계자, 31세에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반세기 동안 로마를 통치하고, 그리고 고대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한 아우구스투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둔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보다 재미없지는 않았지만 세상 사람의 절반이 그를 숭배했다. 그는 신체가 허약했고 특별히 용맹스럽지는 않았지만, 모든 적을 압도할 수 있고, 왕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왕국에 200년 동안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다준 통치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 (<문명이야기> 3-1권, 381쪽)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200년간 평화를 누렸다. 제국의 변경은 안정되어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다. 제국 내의 치안도 안정되어 로마가도를 통해 어디를 가도 강도를 만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자의 교류는 활발하여 로마에는 제국 내에서 생산되는 온갖 물자가 넘쳤으며 제국 내의 여러 도시가 번영하였다. 이것이 바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다. 로마를 통한 평화 그러나 이것은 아우구스투스를 통해서 왔으니 팍스 아우구스타(Pax Augusta)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보통의 영웅처럼 강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 강건한 육체도 타고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영리했다. 자신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았고, 냉정하고도 용의주도했다. 그리고 정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잔인하게 누를 줄 알았다. 연설 습관을 볼 때 그는 완벽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는 연설을 함에 있어서도 언제나 준비된 원고를 읽었다. 심지어 아내 리비아와 대화할 때도 즉흥적으로 너무 말을 많이 하거나, 또는 너무 말을 적게 할까 봐 미리 할 말을 준비했고 말을 가급 적게 했다고 한다.
20세기 로마사의 황제라 불리는 영국 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그의 주저 <로마혁명사>(허승일·김덕수 옮김, 한길사)에서 다음과 같이 아우구스투스를 묘사한다.
"그 젊은이는 천성적으로 냉정하고 용의주도하였다. 그는 개인의 용기라 불리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무모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과감성이 필요한 시대였고, 카이사르의 예는 그에게 모든 난관을 기쁘게 돌파하고, 이름과 지위에 걸맞은 위신, 명예, 권리를 주장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지나치면 안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사도나 온유함에 위험스럽게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디그니타스(위엄)에 대한 입장은 확고하게 지켰다." (<로마혁명사> 1권, 209쪽)태종과 세조, 그리고 세종을 합친 인물... 아우구스투스
나는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묘사에서 우리 역사에 볼 수 있는 몇 명의 군주를 떠올린다. 권력의지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권모술수와 정적에 대한 잔인함은 조선 왕조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 세조가 생각난다. 제국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와 팍스 로마나의 영예를 얻은 것에서는 영리한 군왕으로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그것을 위해 국가의 기본 틀을 바꾼 위대한 성군 세종이 생각난다. 아우구스투스는 바로 태종, 세종 그리고 세조를 모아 놓은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달력 8월은 영어로 'August'인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에서 나온 말이다. 7월이 카이사르의 달(영어로 7월은 July인데, 이것은 카이사르의 성 율리우스에서 나온 말임)이라면 8월은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의 달인 것이다. 일 년 중 가장 정열적인 두 달이 로마제국의 창시자와 그 완성자의 이름에서 나온 셈이다. 그것도 달의 길이마저 같다.
일설은 (13세기에 만들어진 낭설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달 8월을 카이사르의 달 7월과 같은 일 수를 원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2천 년 전 우리에겐 너무나 먼 나라의 권력자이었음에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