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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에는 전국 군단위 어디에도 없는 백화점이 있다.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크고 화려한 그것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백화점이지만, 없는 게 없는 <쬐끄만백화점>이다.

예산읍내에 자리한 이 80평 크기 백화점에는 문구류를 제외한 주방용품, 욕실용품, 식품, 의류, 제화, 시계, 가방, 장식품 등 온갖 종류의 물건이 있다. 그 종류와 개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주인 김재(63)씨도 모른다.

 <쬐끄만백화점>에는 문구류를 제외하면 없는 게 없다.
 <쬐끄만백화점>에는 문구류를 제외하면 없는 게 없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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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사려는 물건을 못찾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손님의 한마디에 주인은 요술처럼 콕찍어 물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내놓는다. "어디 쪽에 있다"며 다시 손님에게 찾아보게 하지도 않는다. 1000원대의 싼물건도 직접 찾아 대령한다.

<쬐끄만백화점>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이른 오후다.

"요즘은 많이들 밖에서 식사하시잖아요. 여럿이 점심 드시고 나서 쇼핑하러 오는 손님들이 많죠"

손님들은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실컷 구경을 하고 한아름 계산대에 올려놓아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만족해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여태 골랐는데 겨우 그돈이유?"하는 말은 주인 입에서가 아니라 손님한테서 나온다.

예산군내에서 뿐만 아니라, 홍성, 유구, 온양, 광천 등지에서 팀을 이뤄 오는 이들도 많다.

"가격 저렴하면서 여기처럼 한꺼번에 잔잔한 쇼핑을 할 곳이 없어. 오면 재밌으니까."

예산상권이 침체됐다며 너나없이 걱정하는 때에도 여전히 잘되는 집,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번째 성공비결은 '친절'

1976년에 문을 열어 40년 가까이 꾸준한 매출을 올리고 있는 <쬐끄만백화점>의 성공 비결, 그 첫번째는 누가봐도 '친절'이다.

주인은 40년 가까운 세월, 변함없는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학생들에게도 존대하던 서울새댁의 말투가 충청도식 정겨운 반말로 바뀐 정도다.

40여년 전 꼬마손님들이 40~50대 주부가 돼 찾아와서는 "아줌마 저 기억하세요? 아줌마가 서울말 쓰고, 포장도 예쁘게 해주고, 애들한테도 존대해 줘서 좋았어요"라고 인사를 건내면 주인도 덩달아 추억에 잠긴다.

 친절과 성실로 38년 세월 백화점을 유지해온 주인 김재씨가 포장을 하고 있다.
 친절과 성실로 38년 세월 백화점을 유지해온 주인 김재씨가 포장을 하고 있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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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가 1970년대만해도 상가가 아니라 일반주택처럼 돼 있었어요. 우리집도 처음에는 3~4평짜리 하꼬방(작은 가게)에서 함석에 페인트글씨로 간판을 만들었죠. 예산에서는 드물게 유리창을 크게 냈는데, 어린애들이 유리창에 붙어서 코묻히며 구경을 해도 남편에게 '우리 손님 될 애들이니 그냥두라'고 했더니, 말처럼 되더라고요. 그런거 보면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죠."

김씨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손님을 앉아서 맞지 않는다. '손님이 최고다. 주인이 앉서 손님을 맞는 법은 없다'는 생각이 낳은 오래된 습관이다.

그리고 '시류를 읽는 눈'

<쬐끄만백화점>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맞은편 <그린조이>라는 옷가게 자리였다.  이 일대가 모두 상가건물로 새로 지어질 무렵(김씨는 80년대 초반으로 기억했다), 있던 자리에 건축된 건물에 세를 든 뒤, 점차 점포를 늘리다가 건물을 매입한 뒤에는 1층 전체를 털었다.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다른 업종에 투자하면서 사업확장을 꿈꾸던 김씨가 <쬐끄만백화점>에만 매진하게 된 것은 IMF 때였다.

"사람이 살다보면 계속 올라가는 경우만 있지 않더라고요. 돈은 욕심내는 게 아니라 따라와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욕심 때문에 다시 빚이 생기면서 겸손해지고, 초심으로 돌아온거죠."

이즈음 <쬐끄만백화점>의 두번째 성공비결인 '시류를 읽는 눈'이 빛을 발한다. 현재 자리로 이전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모두 말렸다고 한다. 주택은행이 있다가 합병되면서 나갔으니 '죽은 자리'라고 다들 꺼려했던 것.

그러나 김씨는 '앞으로는 상가에 반드시 주차장이 있어야 된다'는 확신을 갖고 실행에 옮겨 멋지게 성공했다.

물건의 내용에도 큰 변화를 줬다.

"처음 저희집에서 취급한 물건들은 주로 이태리산, 일본산 등 고급 수입품들이었는데, 지금은 누구나 부담없이 사갈 수 있도록 대중화했죠. 단골손님 중에는 '전처럼 물건이 고급스럽지 않다'고도 하시지만, 저는 서민화된 게 좋아요."

마지막 키워드는 '성실'

<쬐끄만백화점>은 일대 상가에서 제일 먼저 문을 열고 제일 늦게 닫는다. 김씨는 오전 8시 30분에 나와 안팎 청소를 말끔하게 하고, 오전 9시면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낸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은 그로부터 13시간 뒤인, 밤 10시다.

1년 365일 가운데 문을 닫는 날은 다섯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 많은 물건의 위치를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 비결도 사입(상인들이 물건을 사들이는 것)부터 가격표 붙이기, 진열, 판매, 포장까지 직접 다 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쬐끄만백화점>의 롱런 이유, 그 세번째다.

꽃다운 2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예산읍내 상가를 지키고 있는 김씨는 이제 가격표를 보려면 눈을 가늘게 해야 하는 나이가 됐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친절하고 성실한 상인을 만날 수 있을까?

"글쎄요, 전에는 50만 되면…, 60만 되면… 했었는데 여기까지 와보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어요. 손님도 저도 놀이터 삼을 수 있는 날까지..."

손님을 맞는 중간중간 이어가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김재씨가 나즈막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네, 백화점입니다."

도장 장인 오복환씨
 오복환씨
 오복환씨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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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쬐끄만백화점> 또 하나의 풍경, 김재씨의 남편 오복환(64)씨가 운영하는 도장집이다.

도장집을 상징하는 빨간 대형도장이 분홍색이 돼 있을 정도이니, 그 역사 또한 유구하다.

"2대째 가업이에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상신당'이라는 이름으로 40년, 제가 여기서 한지가 38년째이니 80년 세월이네요."

그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도 무서운게 도장인데 지금은 대부분 컴퓨터로 찍어내는 바람에 수조각이 거의 사라졌어요. 도장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제 눈이 침침해져 조명을 2개나 켜고, 돋보기 쓰고도 확대경을 놓아야 겨우 일을 한다며 아쉬워하는 오씨 또한 예산 상가의 산역사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쬐끄만백화점#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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