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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로스러운 두 병사의 찢고 까부는 사사로움은 만담개그에 가까운 깨알웃음을 선사한다.
마이크로스러운 두 병사의 찢고 까부는 사사로움은 만담개그에 가까운 깨알웃음을 선사한다. ⓒ 씨어터오

'착한' 연극 한 편을 만났다. 아니, 찾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굵직한 존재론적 고민이나 날 선 수사를 자근자근 내뱉는 작품으로 새해를 열기엔 '안녕치 못한' 뉴스들로 이미 충분했던 터였다. 공연 보기에 지칠 때면 머리가 소란스러워지는 작품보단 쉬어가고 싶은 작품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게 된다. 그럴 때 '착한' 작품과의 조우는 오랜 벗을 만난 듯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만약 '햄릿'의 정극적 요소를 절대적으로 중시한다면 두말없이 연극 '두 병사 이야기'를 관극리스트에서 제외할 것을 정중히 권한다. 이 작품에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고뇌가 그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더러 단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한 프로젝트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반면 정극에 질렸거나(혹은 정극을 보다 졸았거나) 평소 주인공보단 그 외 인물들(행인1 등과 같은)까지 관심을 갖는 오지랖을 가졌거나 일상 속 잔재미나 감동을 주는 작품을 선호하거나(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같은) 연극 초심자라면 주저 없이 극장을 찾을 것을 권한다. 모르고 봐도 낯설지 않고 알고 봐도 새로운, 그야말로 '착한' 작품인 까닭이다.

마이크로스러운 두 병사의 찢고 까부는 사사로움은 혀 짧은 유령(선왕)의 말을 그대로 재현해내거나 극중극의 대본을 디테일이 살아있는 만담개그로 승화시키며 '유방(유령의 이야기는 방에서만 한다의 줄임말) 프로젝트'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일개 병사 나부랭이인 버나르도와 프랜시스에게 햄릿의 가정사는 비극이 아닌 일종의 '막장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버나르도와 프랜시스가 각각 레어티스와 햄릿으로 분해 칼싸움을 겨루는 장면. 이 장면이 끝난 후 본래의 역할로 돌아간 버나르도가 '왜 진짜 칼싸움을 한 것 같지?'라며 웃지 못할(?) 고초를 토로한다.
버나르도와 프랜시스가 각각 레어티스와 햄릿으로 분해 칼싸움을 겨루는 장면. 이 장면이 끝난 후 본래의 역할로 돌아간 버나르도가 '왜 진짜 칼싸움을 한 것 같지?'라며 웃지 못할(?) 고초를 토로한다. ⓒ 씨어터오

왕위를 놓고 수려하고도 장황한 말빨(?)로 죄를 논하며 가족 간의 살육도 불사하는 그들의 일상을 이해하기엔 이들은 무지하리만큼 선량하고 소박했으며 진실했다. 그들의 존재이유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과 삼시세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소소한 삶에 있었으며, 최대 고민은 그저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고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의 '햄릿'은 가볍고 유쾌했으며 따뜻하고 친절했다. 그와 동시에 '햄릿'의 주요대목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정극을 뛰어넘는 볼거리와 실험성도 선보였다. 천막 사이로 빠끔히 머리만 내민 채로 등장하는 유령의 코믹한 모습이나 클라우디스가 선왕을 죽이는 장면을 몸짓으로 대신 보여주는 등 별다른 무대장치 없이 대본과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80여분의 시간을 짜임새 있게 꾸려간다.

극의 마지막, 가면무도회에 초대받은 버나르도가 얼굴 개그를 선보이는 장면까지 살뜰히 웃다보면 '햄릿'의 이야기보단 이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만년 조연이지만 주어진 삶을 건강하게 즐길 줄 아는 두 병사들이 더 친근해서일까. 공연이 끝난 뒤 나가기를 서둘기보단 '덕분에 잘 봤다'는 인사들이 훈훈하게 오갔던 작품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게재된 기사입니다.



#두 병사 이야기#씨어터오#상상화이트 소극장#문화공감 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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