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대 참모 중에서 황희 정승은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황희'보다는 '황희 정승'으로 더 많이 불리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매우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관직 생활을 유지했다. 일반 관료에 비해 참모는 출세의 가능성 못지않게 패가망신의 가능성도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관직 경력은 상당히 이채로운 것이다.
1376년에 열네 살 나이로 음서(고위층 자제의 특별채용)로 관직에 진출한 황희는 1449년에 여든일곱 살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중간에 관직을 떠난 기간도 있지만, 관직에 최초로 진출한 시점부터 계산하면 그는 무려 73년간이나 관료 세계에 몸을 담은 셈이 된다. 과거시험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부임한 1390년부터 계산해도 그의 관직 생활 기간은 59년간이나 된다.
그 기간의 상당부분인 40년 동안 황희는 장관급 이상의 관직을 지냈고, 그 40년 중에서 18년간은 영의정 직을 수행했다. 그가 활동한 시대가 조선 초기의 격동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관직 이력은 상당히 경이로운 것이다.
황희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에 개성에서 출생했다. 열네 살에 관직에 진출한 그는 27세 때인 1389년에 대과에 급제하고 1390년부터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기 2년 전이었다.
이때부터 황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번의 정치적 기로에 놓인다. 그때마다 그는 어느 한쪽을 선택했고, 그의 선택은 매번 '꽝'이었다. '황희의 저주'라도 있었는지, 그가 지지한 쪽은 항상 정치적으로 망했다. 참모가 갖춰야 할 핵심 기술 중 하나가 미래예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황희는 참모의 자격이 제대로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황희는 안정적이고 오랫동안 정치생명을 유지했다. 그는 '실패한 선택'에도 불구하고 항상 승승장구했다. 이것은 그가 실패한 선택을 사후에 잘 수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390년 이후의 황희를 추적해보면, 실패한 선택을 만회하는 방법을 배우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에 반대한 황희, 2년만에 결정 번복한 이유
황희의 첫 번째 '선택 오류'는 1392년에 있었다.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고려왕조에 충성하겠다고 노래하고, 이방원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조선왕조를 선전하던 그 시기에, 서른 살이 된 그는 조선왕조를 반대하는 쪽에 표를 던졌다.
이후의 행적을 통해 추론할 때, 황희의 선택은 정치적 신념에 기초한 결정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정치적 계산 없이 오로지 신념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이를 두고 '실패한 선택'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얼마 안 가서 선택을 수정했기 때문에 그것이 신념이 아닌 정치적 계산에 의거한 것이었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고려가 망하자 황희는 경기도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두문동에 들어갔다. 이곳은 지금 북한 땅이다. 두문동에 들어간 충신들이 조선왕조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실화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려 멸망 직후의 황희는 조선을 거부하고 두문동에서 불출(不出)하는 쪽으로 인생의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황희는 2년 만에 결정을 번복했다. 조선왕조 주체세력의 설득을 받아들여 신(新)왕조에 참여한 것이다. 이성계를 반대했지만, 2년 만에 이성계에 대한 지지로 돌아선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조선왕조에서 승승장구한다. 이로써 그는 선택의 오류를 수정하고 만회했다.
얼마 안 있어, 황희는 또다시 선택 오류를 범한다. 신왕조에 참여한 직후에 황희는 세자 이방석 편에 선다. 이방석은 이방원의 이복동생이자 정적이었다. 황희는 세자 보좌관인 세자우정자가 되어 이방석을 보필했다. 이로써 황희는 본인의 의도 여하와 관계없이 이방원을 반대하는 편에 서게 된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간에 이방석 편에 선 것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이방원이 1398년에 쿠데타(제1차 왕자의 난)를 일으켜 이방석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때 황희는 36세였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가 한때나마 이방석을 보좌한 것은 선택 오류였다.
하지만 황희는 이방석의 정적인 이방원에 의해서도 중용됐다. 그는 태종 때 장관급인 판서의 지위에 오르며 태종의 신임을 받는다. 한때 이방원의 정적을 보좌했다는 '찜찜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정적인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행운아였다.
번번이 미래 예측에 실패했는데도 승승장구황희는 태종 말년에 또다시 선택 오류를 범한다. 세자 자리가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그는 양녕대군 편을 들었다. 훗날의 세종대왕인 충녕대군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그의 선택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났다. 황희가 56세 때인 1418년에 태종은 양녕대군을 몰아내고 충녕대군에게 보위를 넘겨줬다.
'대선 결과'를 잘못 예측한 탓에 황희는 관직을 빼앗기고 유배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기사회생했다. 세종이 왕이 된 지 4년 뒤인 1422년에 그는 환갑의 나이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다. 태종의 참모에서 세종의 참모로 변신한 그는 총리급 지위에 오르며 위상을 확고히 굳히게 된다. 1418년의 실수를 그는 완벽하게 만회했다.
이처럼 황희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주요 고비 때마다 번번이 미래예측에 실패했다. 그가 투자한 '주식'은 모조리 곤두박질하고 '주식시장'에서 퇴출됐다. 그가 충성을 맹세한 고려는 망했고, 그가 한때나마 모셨던 이방석은 죽임을 당했고, 그가 지지했던 양녕대군은 동생의 눈치를 살피는 재야의 낭인으로 전락했다.
그런데도 황희는 매번 화려하게 부활해서 조선 초기 왕들의 특급 참모가 됐다. 새로운 정권을 반대했다가 뒤늦게 가담한 사람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지만, 그는 그런 것도 없이 저 높은 곳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갔다. 결정적인 미래예측 때마다 번번이 실패했으므로 정치참모로 발탁되기 힘들었을 텐데도, 그는 번번이 최고 통치권자의 정치참모로 기용되었다.
황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조선 초기의 왕들이 미래예측에 번번이 실패하는 황희를 중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분명히 황희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 노하우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 2부에서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