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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사는 잘 하셨습니까?"

정운현님(아래 정 국장님·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시절 인연을 맺어 국장이란 직함이 편합니다.)! 오늘(17일) 이사는 잘 하셨습니까? 저는 이런저런 일로 며칠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오늘 오후 집에 돌아온 뒤 이미 써놓은 원고를 가다듬다가 좀 쉬면서 인터넷 기사들을 훑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분 사진, 30년을 안고 살았습니다'라는 정 국장님의 기사에 눈이 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하고 클릭했더니 '역시나'였습니다.

기사를 읽던 중 오늘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한다는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고 순간 정 국장님 블로그에 실린 간판 사진의 흐드러져 웃는 모습이 오늘따라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참! 대책 없는 가장이십니다. 삶의 근거지인 서울을 떠나는 그 까닭을 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에 저 역시 공명이 되어 마음이 매우 아픕니다.

정운현
 정운현
ⓒ 보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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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 국장님이 이삿짐을 싣고 무악재와 박석고개를 넘어갈 때 속눈물을 많이 흘리셨을 테지요.

저도 꼭 10년 전 조기 퇴직을 하고, 서울을 떠나 고향도 아닌 생판 낯선 강원산골로 내려올 때 전재고개를 넘으면서 속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항일유적지에서 만난 사람

1999년 8월 4일, 제가 중국대륙 동북삼성 항일유적답사 첫날이었습니다. 그날 창춘에서 하얼빈으로 간 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장쾌하게 쓰러뜨린 하얼빈 역 플랫폼과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되어 일제에게 인도, 첫날밤을 보낸 옛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동북열사기념관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하얼빈 동포사학자 서명훈 선생님이 거기에 모셔진 일백여 분의 열사 가운데 허형식·양림·리추악·리홍광·박진우 등 서른네 분은 조선족 열사라 하여 가슴 뿌듯했습니다.

그때 동행한 석주 이상룡 선생 후손 이항증 선생이 "허형식 열사는 박 선생 고향 분이에요"라는 말에 저는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스페인의 탐험가 바스코 발보아처럼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한 파르티잔이 맺어준 인연

저는 비로소 내 글의 주인공을 찾았다고, 그동안 언저리 사람들은 내 고향을 친일파의 본고장으로 잘못 알고 있기에, 그들에게 크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을 샅샅이 뒤진 끝에 독립기념관 발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집에서 장세윤 연구위원이 쓴 <허형식 연구>를 읽었습니다.

저는 좀 더 그분을 자세히 알고자 그 이듬해 봉급의 반을 떼어 혼자 북만주으로 날아가 허형식 장군이 위만군의 총탄에 장렬히 산화한 헤이룽장 성 경성현 대라진 청송령 들머리에 세워진 허형식희생지 비석에 들꽃을 바치고 돌아왔지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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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성균관대학교 동아사아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장세윤(현 동북아역사재단연구위원) 교수를 뵙고자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장 교수가 허형식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을 국내신문에 처음 보도한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의 정운현 특집부 차장을 함께 만나고자 하여, 2000년 8월 하순 어느 날에 성균관대학 600주년기념관에서 만난 게 정 국장과 첫 만남이었습니다.

정 국장의 첫 인상은 참 냉철했습니다. 그날 저는 이희승 선생이 쓰신 딸깍발이의 그 기개와 청빈을 느끼게 하는 고고한 언론인으로 각인 되었습니다.

제가 중국대륙 항일유적답사기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를 펴냈을 때 국내 언론 가운데 정 국장님이 유일하게 직접 서평을 써서 보도해 주셨지요.

그 이듬해인가, 제가 정 국장님에게 허형식 장군의 항일유적지 답사한 이야기를 '영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월간 <독립기념관>에 기고 게재된 글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무렵 정 국장님은 대한매일에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기시고, 제 글을 본 뒤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라는 제목으로 다듬어 <오마이뉴스>에 전재해 주셨습니다. 그 기사로 저는 천만뜻밖에도 시민기자가 되었습니다.

또 무슨 인연인지 정 국장의 따님이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 재학 중이라 우리는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가 되기도 하였지요. 사실 저는 그때 인터넷을 전혀 몰랐고, 자판도 두드리는 게 서툴러 원고지에 쓴 기사와 현상한 사진을 따님 편에 전하면 편집실 기자들이 자판에 두드리고 스캔하여 기사를 올린 뒤 사진을 다시 따님 편에 돌려보내 주셨지요.

결국 정 국장님과 장세윤 연구위원과 저는 허형식이라는 한 항일파르티잔이 맺어준 인연으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의 결의'처럼 만나 십 수년째 지금도 그 끈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임종국 선생
 임종국 선생
ⓒ 보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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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당신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정 국장님! 온 나라에 벚꽃이 만발한 시절에 그동안 '보림재(寶林齋)'라는 '임종국을 보배로 받드는 서재'의 당호로 살아오셨기에 가장으로 자녀교육에 가장 힘든 시기에 직장에서 쫓겨나 백수의 세월로 무능한 가장이 되셨습니다. 정 국장이 임종국 선생을 만나지 않고, 아니 만났더라도 외면한 채 계절 따라 옷을 바꿔 입으면서 사셨다면 이즈음에는 메이저신문 경영진이 되셨거나 푸른 집이나 여당의 금배지는 달고 다니며 자녀들은 해외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펴낸 저서들의 일부만 적어보면 <반민특위 재판기록>,<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친일파는 살아있다>,<친일파죄상기>,<임종국 평전>,<실록 군인 박정희>,<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등등 그동안, 아니 지금도 우리 사회 각 분야 주류들의 밑구멍을 속속들이 까발렸으니 어쩌면 이제까지 목숨을 이어온 것만도 다행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 국장님! 얼마 전 제가 2013 <오마이뉴스> 특별상 인터뷰 기사에 축하의 댓글을 달아주셨기에 저는 덕담 겸 진심을 담아 "새해에는 부디 좋은 일이 많기를 빕니다"라고 답 글을 달았는데 정초부터 이 무슨 일입니까. 이제 이사 간 집 서가에서 임종국 선생님 사진 액자는 내려 놓으십시오. 아마 임종국 선생님도 섭섭해 하지 않으시고 저처럼 말릴 겁니다.

당신은 신념에 따라 친일파 연구가 좋아서, 누군가 해야할 일이기에  평생 책을 보거나 쓰고, 선구자이신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보림재를 만들며 살아왔지만, 부인과 자녀들에게까지 힘들게 해서는 안 되지요. 언젠가 정 국장님이 저에게 몇 번은 죽고 싶었다고 솔직한 말씀을 하셨는데, 곁에서 지켜보는 부인과 자녀들은 당신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100년 만에 세계 곳곳에서 고향을 찾아와 만난 왕산 후손들
 100년 만에 세계 곳곳에서 고향을 찾아와 만난 왕산 후손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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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기(少忍飢)하라"

제가 2009년 9월 28일,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개관식에 초대받아 가보았더니 왕산 후손들이 100년 만에 중국, 러시아, 미국, 키르키즈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왔습니다. 이분들은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당신 할아버지가 서대문 감옥 개설 제1호로 순국당한 고국을 찾아 온 후손들은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거나, 공사장의 막일을 하다가 적응치 못하고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또 한 손녀는 평생 만주로 중앙아시아로 유랑하다가 미혼인 채 귀국하여 고국에서 외로이 사신다는 얘기… 이것이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후손들의 현주소입니다. 문득 돌아가신 조문기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아직 독립이 되지 않았습니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그래도 일본 놈들을 상전으로 모시느라 그놈들 눈치라도 봤지만 지금은 네 활개를 펴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청와대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혼자 일인 시위를 하시던 그 기개가. 정 국장님 이사 간 집 방안에는 임종국 선생 사진 액자를 걸지 말라는 이 글을 쓰다가 제 책장 위를 올려다보자 15년째 지키고 있는 허형식 장군이 액자 속에서 한 마디 하는군요.

"우선 자네부터 내 사진을 걷고 정 국장에게 말하시게."

어찌 보면 똥 묻은 돼지가 겨 묻은 돼지 나무라는 격이 되었고, 숯이 검정 나무라는 격이 되었습니다. 저는 정 국장과 견줄 만큼 처절하게 살아오지 못해 이 비유가 잘못된 줄 아오나 아무튼 아픈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정 국장님, 기왕에 새로운 곳으로 가셨다고 하오니 그곳에서 잘 적응하시며 조금만 더 참고 사십시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언젠가는 이 땅에도 정의의 싹이 돋아날 겁니다. 
 
"소인기(少忍飢)하라."

이 말은 조지훈의 '지조론'에서 나온 말로 "조금만 더 참으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이육사 같은 분은 일제 총칼에 밀려 북방에서도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고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잉태하였습니다.

이제 밤이 깊으니 아마 곧 새벽이 올 겁니다. 두서 없는 저의 횡설수설이 정 국장님을 더욱 혼미케 할 듯하지만, 그래도 제 진심이 담긴 글이기에 이사 선물로 띄웁니다. 정 국장님, 부디 건강 건필 하십시오.


태그:#정운현, #임종국, #친일파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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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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