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뮤지컬의 줄거리와 주요 장면에 대한 설명이 담겨있습니다.작품 전체는 하나의 '라비린토스'(반은 황소, 반은 사람이었던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을 가두기 위한 미궁)다. 그 안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관객은 '테세우스'가 되어 한 손에는 검을 쥐고, 한 손에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쥔 채 그 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간다. 객석에 앉은 이상, 피할 수 없는 싸움에 맞서기 위해서다. 괴물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인가.
뮤지컬 '아가사'는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실종 실화를 바탕으로 연극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연극 '모범생들'의 연출가 김태형을 비롯해 작곡가 허수현, 신예 작가 한지안이 함께했다. 이 뮤지컬은 오는 2월 23일까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상연된다.
내 안의 괴물을 보다청년 '레이몬드'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 편지를 통해 27년 전 자신이 실종됐던 그 날로 휘몰아 들어간다. 그녀는 신작 발표를 위해 마련한 티타임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달려나간 후 사라진다. 실종되었던 열하루, '아가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뮤지컬 '아가사'는 얼핏 추리스릴러처럼 보인다. 실종 실화를 다루고 있고, 공연 초반부도 '아가사'의 실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로 작품 전체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뮤지컬 '아가사'는 하나의 미궁이다. 그 안으로 조심히 발을 들여놓으면 추리 형식의 클리셰로 버무린 또 다른 이야기가 은밀하게 얼굴을 드러낸다.
관객은 '아가사'의 실종사건을 파헤치는 13세 소년 '레이몬드'의 기억을 따라 사건 속으로 파묻혀 간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 관객을 미궁 속으로 이끌고, 종래에는 종착지까지 관객을 밀어 넣는다. 그 미궁의 끝에 드러나는 것은 '아가사'의 내면에 있는 '살의'라는 괴물이다.
'아가사'의 살의는 관계 속에서 생생한 핏물로 피어난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 속에서 고립되어 간다. 어머니의 죽음, 남편의 외도, 더 극악한 살인을 원하는 독자의 아우성은 날 선 비수로 가슴에 박힌다. 여자로서도, 작가로서도 상처받은 그녀에게서 새어나온 핏물은 내면에 고인다. 고인 핏물은 싹을 틔워 괴물을 만들어내고, 피에서 잉태된 괴물은 '아가사'를 갉아먹기 시작한다. 내면의 괴물과 맞서는 '아가사'의 처절한 혈투는 곧 관객 내면에 있는 또 다른 괴물로 옮겨붙는다. '살의'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존재하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극중 '살의'는 '로이'라는 존재로 투영된다. '로이'(살의)는 치명적이다. 악(惡)이 종종 그러하듯이, 그는 매혹적이고도 뜨거운 충동으로 '아가사'의 내면에 침투한다. 실종 사건의 중심에 다다를수록 점점 드러나는 이들의 관계는 '살의'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에 가깝다. 작품은 인간 내부의 '살의'에 대한 고찰이자, 그와 마주한 한 여인의 사투를 그린 셈이다.
'아가사'의 또 다른 내면을 구현하는 것은 무대다. 무대는 미궁의 입구로 꾸며진다. 동시에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이름 아래 영원히 닫혀진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연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세트는 드넓은 미궁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듯한 극의 느낌을 잘 살려냈다. 하지만 이해랑예술극장의 풍만한 높이와 넓이, 깊이를 섬세하게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극의 간격 사이에서 휑하게 느껴지는 무대는 종종 헛헛했다. 무대 진행요원의 움직임이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도 하나의 아쉬움이다.
허수현 작곡가의 음악은 기묘한 극의 분위기에 잘 녹아들었다. '아가사'의 웅장한 아리아는 물론 극을 진행하는 레치타티보의 멜로디도 힘이 넘쳤다. '아가사'와 '레이몬드'의 듀엣곡 '라비린토스'는 극이 끝난 후에도 귓가를 맴돌았다.
뮤지컬 '아가사'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다른 길 없어 / 괴물과 싸우거나 / 다른 길 없어 / 먹혀 죽거나 /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 / 피할 수 없어'. 이 가사는 작품 전체를 축약한다. 결국 인간은 미궁 속을 헤매며 살아가고, 자신 내부의 괴물과 싸워야만 한다. 무찌르면 자신으로 살아갈 것이며, 잡아먹힌다면 괴물이 되어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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