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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에서 발행되고 있는 예술잡지 '버질아메리카(Vergil America)'의 기자인 이동희(Joyce Lee)선생께서 일전에 페이스북에 감나무밭 사진을 한 장 올렸습니다. '감이 익어가는 언덕'이라는 제목의 사진은 제게 갖가지 감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 남가주의 감나무.
 미국 남가주의 감나무.
ⓒ Joyc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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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동아시아 온대의 특산종인 이 감나무가 북미에서 이렇듯 잘 정리된 대규모농장에서 재배되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나무의 굵기로 보아 이미 오래전에 심겨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감나무밭인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위해 조이스선생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Riverside라는 카운티에 있어요."

캘리포니아의 리버사이드라면 우리나라에서 단감 생산지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경남의 진영보다도 위도가 훨씬 낮은 곳이니 감나무의 재배에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2

우리나라 사람 중에 감나무와의 사연이 없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헤이리로 삶의 터를 옮긴 사람 중에는 자신의 정원에 있던 감나무를 두고 올 수 없어서 감나무를 함께 옮긴이도 있습니다. 한향림옹기박물관의 이정호, 한향림부부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위도도 서울보다 높고 겨울의 온도가 많게는 서울보다 6~7도가 낮은 헤이리에서 감나무는 생존자체가 어렵습니다.  

이 부부는 늦가을이면 겨울 보온을 위해 짚으로 나무을 감싸는 사투에 가까운 노력을 들여서 가까스로 살려냈습니다.  

올해 헤이리에 잣눈이 왔을 때도 그 감나무는 함박눈을 이고 겨울을 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추위에 내성을 가지게 되었는지 온몸을 짚으로 감지는 않은 모습입니다.

헤이리에 잣눈에 왔을 때의 한향림옹기박물관의 감나무 모습. 이 감나무는 한향림부부와 함께 연희동에서 살던 것을 헤이리로 이사 오면서 함께 옮겨온 것입니다. 이 부부는 연희동 자택의 정원에 91년도에 당시 15년 된 감나무를 심게 되었고 그곳에서 13년을 동거하다가 헤이리로 이사한 2004년에 함께 헤이리로 왔습니다. 헤이리로 와서도 10년을 맞았으니 38년 된 나무입니다.
 헤이리에 잣눈에 왔을 때의 한향림옹기박물관의 감나무 모습. 이 감나무는 한향림부부와 함께 연희동에서 살던 것을 헤이리로 이사 오면서 함께 옮겨온 것입니다. 이 부부는 연희동 자택의 정원에 91년도에 당시 15년 된 감나무를 심게 되었고 그곳에서 13년을 동거하다가 헤이리로 이사한 2004년에 함께 헤이리로 왔습니다. 헤이리로 와서도 10년을 맞았으니 38년 된 나무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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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헤이리에 집을 완성한 첫해에 고향 아버지의 도움으로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 두 그루의 고향 감나무를 이식했습니다.  

하지만 한그루는 결국 고욤나무로 존재하고 다른 한 나무의 감나무는 성장에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3 

지난달, 제주도의 여행길에서 경남 진영에서 단감농사를 짓고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께서 감농사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감나무는 집 주위의 정원수로 존재하면서 초여름에 감꽃으로 시골아이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감꽃은 우리의 좋은 주전부리였습니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을 그것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지요. 한 여름에는 짙은 그림자로 땀을 식혀주었습니다. 가을에 감은 어른들의 잔돈을 불려주었고 곶감을 만들어 도회지의 친지들에게 보내 정을 도탑게 해주었습니다. 그 곶감을 깎고 나온 감 껍질 말린 것은 겨울 내내 우리들의 겨울밤 심심한 입을 책임지는 군것질꺼리였습니다. 감나무는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새들에게도 은사였습니다. 까치에게는 월세를 물지않아도 되는 집터였으며 겨울의 가지 끝 붉은 홍시는 자연스럽게 까치를 비롯한 온갖 야생 조류들의 겨울식량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기상을 조금도 누를 필요가 없이 존재하는 제 고향마을의 감나무. 늦가을에도 가득 감을 달고 있습니다.
 각자의 기상을 조금도 누를 필요가 없이 존재하는 제 고향마을의 감나무. 늦가을에도 가득 감을 달고 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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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고향의 우리집 감나무는 아무것도 돌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거름을 주지도, 약을 치지도, 가지치기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한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기만 하는 감나무였습니다.

지난 가을, 제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 처마 밑에서 볕을 밭고 있던 이 곶감은 지금 저를 따라와 매일 하나씩 빼먹는 샛밥이 되어있습니다.
 지난 가을, 제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 처마 밑에서 볕을 밭고 있던 이 곶감은 지금 저를 따라와 매일 하나씩 빼먹는 샛밥이 되어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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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감나무 농부와의 만남에서 농사로서의 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 년 중 감의 수확이 끝난 늦가을 보름만이 짬을 허락하는,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라는 것입니다. 

겨울 내내 전지를 하고, 나무가 위로 자라는 것을 억제하기위해 끝없이 나무와 씨름해야 하며 거름을 내고 한꺼번에 수확해야 하는 감농사는 농부의 등골을 빠지게 하는 거룩한 땀의 결실이었습니다. 

#4 

조이스 선생 사진속의 그 감나무을 보면서 진영 단감 농사꾼의 하소연이 생각났습니다. 

LA 농장의 감나무는 제 고향 마당 모퉁이와 뒤란에서 멋대로 자라는 그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모질게 전지당한 모습에 새로 난 잔가지에만 주렁주렁 감을 달고 있습니다. 

감나무가 위로 자라면 감을 수확할 수가 없기 때문에 농부는 감나무가 위로 자라는 것을 어떡해든 막아야 됩니다. 하지만 나무의 속성상 어떤 것도 위로 자라고자하는 본능을 억제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니 모질게 우듬지를 자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속의 감나무는 위로 자라고자하는 본능을 지닌 우듬지를 거세당한 채 겨우 사람의 키 높이에서 높이 성장 대신 부피성장만을 거듭한 모습으로 오와 열을 맞추어 서서 잔가지에 감을 달고 있었습니다. 본능을 억제당한 불구의 모습입니다. 저는 산업으로서의 감농사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감나무의 장대한 기상을 잃은 그 모습에 한 방울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저의 그 알량한 한방울의 눈물은 오직 인간이라는 한 종을 위한, 여러 본능을 억제당한채 오직 생식없는 생식본능만을 강요당하면서 산업으로서 존재하는 감나무에 바치는 저의 애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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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motif.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감나무, #곶감, #감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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