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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철교
 압록강 철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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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철교

압록강(鴨綠江)은 '물빛이 오리 머리 빛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강은 그 길이가 790여 킬로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다. 백두산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중국 동북지방과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간다. 이 압록강은 두만강과 함께 지난날 우리 조상들이 정든 고향을 등지고 중국 대륙으로 쫓겨 갔던 단장의 강이었다.

1910년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길 무렵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 지사들이 국외 독립기지를 만들기 위하여 주로 압록강을 건너 서북간도와 남북 만주,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갔다. 이상설, 이동녕,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등 민족 지사들은 이 압록강을 건너거나 이 강을 거슬러 단동, 관전, 환인현의 횡도천을 거쳐 통화,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했다. 이분들 중에는 50여 명의 친지와 가족을 이끌고 네 마리 혹은 여덟 마리 중국인 마차를 빌려 타고 열흘에서 보름 걸려 목적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 동지는 서울서 오전 8시에 떠나서 오후 9시에 신의주에 도착, 그 집(주막)에 몇 시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경이라 경비가 철통같지만 새벽 3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마침 강이 꽁꽁 얼어서 중국 노동자가 끄는 썰매를 타면 두 시간 만에 안동(단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씨가 마중 나와 처소로 간다. 안동현에는 우당장(이회영)이 방(여사)을 여러 군데 마련하여 여러 동지들이 유숙할 곳을 정하여 놓고, 국경만 넘어가면 그곳으로 가 있게 하였다. - 이은숙 <가슴에 풍은 뜻 하늘에 사무쳐> 47쪽

신의주 손 병사 집에서 이틀을 묵는 동안 만주로 들어갈 준비를 보충했다. 배 네 척을 구하고 소금 친 갈치도 몇 상자를 사서 실었다. 훗날 이 소금으로 몇 달 잘 먹었다. 만주에는 소금이 귀했다. 배는 돛단배였고 사공은 중국인들이었다. 압록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육로로 가는 것보다 수월하고 안전하다고 했다. 강에 떠 있으면 일본순사들과 마주칠 일도 없으니까. 다행히 날씨가 좋아 배는 바람을 타고 순조롭게 잘 갔다.
-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 41쪽

우당 이회영 선생 부인 이은숙 여사와 석주 이상룡 선생 손부 허은 여사의 수기의 한 대목이다.

이른 아침에 바라본 조중 철교, 우측 철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
 이른 아침에 바라본 조중 철교, 우측 철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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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자취를 찾다

안동문화방송국에서 2004년 8·15 특집다큐멘터리로 '혁신 유림'이라는 작품을 기획한 바, 독립운동가 후손이 조상의 발자취를 더듬는 답사 여정을 카메라에 담는 프로로, 그때 나는 코디(안내) 역을 맡았다.

그때 우리 일행은 가능한 조상들이 고국을 떠났던 그 길을 따라 더듬기로 하였다. 하지만 조상들이 타고 간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단둥(丹東, 단동)으로 갈 수 없어 대신 인천공항에서 선양으로 간 뒤 다시 단둥으로 내려와 거기서 망명객들의 발길을 그대로 좇기로 답사 여정을 잡았다.

2004. 5. 25. 13:30, 우리 일행은 중국 랴오닝성 선양공항에 닿았다. 거기서 승용차를 빌려 곧장 단둥으로 떠나 그날 늦은 밤에야 단둥 압록강변에 도착했다. 압록강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국문빈관에다 여장을 풀었다. 그동안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봤던 압록강 철교를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끊어진 교각의 잔해를 역사기념물로 두고 있었다.
 끊어진 교각의 잔해를 역사기념물로 두고 있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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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압록강 철교와 강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압록강과 철교가 뿌연 안개에 휩싸였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카메라를 들고 강가로 갔다. 강 언저리에는 물안개가 자욱했다.

압록강 철교는 1908년 8월에 착공하여 1911년 10월에 준공했다. 초기에는 교량 중간에 개폐식 장치를 하여 선박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 철교는 1950년 6·25 전쟁 때 미군들이 폭파했던 것을 그 왼편에 다시 세웠다.

나는 선조들이 이 강을 건넜던 피눈물 나는 사연을 떠올리면서 압록강과 철교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숙소로 돌아온 뒤 나만 본 게 아쉬워서 옆방 안동MBC 제작 팀의 방문을 두드렸다. 곧 그들도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그게 나의 큰 실수였다.

중국 공안이 나타나다

일행 모두 아침 산책 겸 압록강가로 나와서 산책도 하고 카메라로 압록강변을 스케치했다. 그때 건장한 두 사람이 다가왔다. 그들은 중국 공안이라고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그때 중국말에 능통한 김시준(신흥무관학교 교관 김규식 선생 손자)씨가 다가가서 통역 겸 우리의 처지를 말했다. 그들은 김시준씨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우리 일행의 여권부터 보자고 했다.

단둥에서 바라본 중조우의교
 단둥에서 바라본 중조우의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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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안은 우리 일행의 여권을 다 확인한 후 다시 비자를 보자고 했다. 우리 일행의 비자는 단체로 관광 비자였다.

그 무렵 한중간에는 '고구려' 문제가 불거진 후부터는 여행자에 대한 중국 관리의 태도가 돌변해서 취재 여권은 잘 내주지 않기에 관광비자로 입국했던 것이다.

김시준씨는 공안에게 우리 일행은 독립군 후손으로 "조상의 항일유적지를 둘러보러 왔다"고 해도, 그들은 막무가내 비자에 쓰인'관광' 목적을 위반했다 하면서 여권을 압수했다.

한 세기 전,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조차 못 하게 하는 그들의 처사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지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따질 수도 없는 일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다행히 안동MBC 제작팀이 본사로 연락하자 그날 오후 늦게 박인규 선양 부총영사가 우리를 구출하고자 단둥으로 온 뒤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무척 심증 고통을 겪었다. 나는 이 압록강 철교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 일들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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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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