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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현(가명, 42)씨는 같은 회사로부터 세 번 버림받았다. 그 회사는 열정에 가득 찬 그를 필요할 때 쓰고 버렸다. 배씨는 "이 회사의 정규직 노동자가 되기 위해 프리랜서 신분으로 회사에 젊음을 바쳤고, 불법적인 고용행태를 참았다"면서 "하지만 그 결과는 프리랜서 가정의 파탄"이라고 토로했다.

배씨가 마지막으로 이 회사로부터 쫓겨난 것은 지난해 2월이다. 곧바로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다. 회사의 편법적인 고용 행태가 드러났고, 같은 해 7월 정규직 직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배씨는 "곧바로 보복 해고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회사는 학력·경력을 문제 삼아 그를 해고했다. 그는 다시 부당해고 구제를 신청했다.

그 사이 배씨의 아버지는 위암에 걸렸다. 배씨가 당한 지난 세 번의 배신을 지켜봤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최근 항암치료를 중단했다. 월 300만 원 가량이 드는 항암치료제 글리벡을 더이상 부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씨가 생활비와 아버지 병원비로 진 빚만 3000만 원에 달한다. "아버지의 생명연장 치료를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은 금세 불거졌다.

배씨는 기자에게 "쓰면 삼키고 달면 뱉는 방송사의 악질적인 고용행태를 고발해 달라"고 전했다. 배씨가 말한 회사는 SBS의 자회사인 SBS아트텍이다. 방송기술과 무대디자인·소품 등 방송미술을 담당하는 이 회사는 SBS의 대다수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한다. 그는 "화려한 방송에 가려진 프리랜서 등 방송사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통이 크다"고 밝혔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2011년 SBS아트텍 경영지원팀 내부 문건에 따르면, SBS아트텍 미술부문 직원 424명 중 비정규직은 73%(308명)에 달한다. KBS아트비전과 MBC미술센터의 비정규직 비율은 각각 74%, 57%다. 문영섭 노무사는 "방송사들은 간접 고용을 허용하는 법망을 이용하여 열정이 있는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3번의 배신', 가업까지 팔고 일에 매진했는데 해고

 SBS아트텍 홈페이지.
SBS아트텍 홈페이지. ⓒ SBS아트텍 홈페이지 화면 캡쳐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광고회사를 다니던 배씨가 SBS아트텍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9년 11월의 일이다. 당시 1998년 말 SBS에서 분리됐던 SBS아트텍은 신규 사업을 찾아 나섰고, 배씨는 간접광고(PPL)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당시 간접광고가 도입되지 않았던 방송계에서 배씨의 아이디어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배씨는 기획서를 제출했고, "함께 일하자"는 답이 돌아왔다. 담당자는 "잘되면 정규직으로 발령내주겠다"며 프리랜서를 제안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았지만, 회사 사무실로 출근했고 회사의 지시를 받았다. 그는 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일했다. 배씨는 "이후 성과가 나왔고, 곧 안정적인 사업 기반이 구축됐다"면서 "KBS와 MBC가 제게 교육을 요청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년 6개월 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회사는 공식적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회사 관계자로부터 "조직에 융합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당시 제도의 미비로 인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배씨는 변변한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짐을 쌌다.

악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2003년 6월 배씨는 안면이 있던 SBS아트텍 관계자로부터 신규 사업 아이디어를 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장이 바뀐 SBS아트텍은 사업 확장에 시동을 건 때였다.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던 배씨는 방송 소품 등을 경매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회사 쪽은 배씨에게 "사업이 잘되면 재입사 시켜주겠다"면서 구체적인 기획서 제출을 요청했다. 

배씨는 프리랜서로서 1년 8개월 동안 이 작업에 매달렸다. 기획서를 만들고 회의에 참여했다. 사업 시작 직전 단계에 이르렀던 2005년 2월 갑작스럽게 회사로부터의 연락이 끊겼다. 배씨가 회사에 연락하자 "사업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배씨는 그동안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회사는 이후 배씨가 구상했던 계획대로 사업을 진행했다. 배씨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깊은 좌절감에 빠진 그는 방송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2009년 12월 전북 익산으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농자재 판매회사를 물려받았다. 월 1000만 원 이상의 높은 수익을 올렸다.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SBS아트텍이 세 번째 연락을 취해오기 전까지는.

2010년 3월 SBS아트텍 김아무개 팀장이 배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김 팀장은 배씨의 친한 선배였다. 김 팀장은 신규 사업의 마케팅 업무를 담당해달라고 제안했다. "반드시 정규직 발령을 내주겠다"고도 했다. 세 번째 제안이었다. 신뢰하는 선배의 말을, 그는 믿었다. 방송에 대한 미련도 있었다. 3월부터 김 팀장의 지시를 받아 자료조사 업무를 진행했다. 김 팀장은 회사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고, 배씨는 가업을 모두 처분했다. 배씨는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배씨는 김 팀장의 지시를 받으며 사무실에서 일했다. 2010년 12월부터 두 차례 1개월 임시 인력 계약을 맺었다. 이후 배씨와 회사는 2011년 2월부터 1년 단위의 프리랜서 계약을 두 차례 체결했다. 김 팀장은 24개월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 직원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비정규직 보호법'을 언급하며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 직을 걸고 정규직 발령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해고 뒤 복직, 또 보복성 해고... 방송사 프리랜서들, 뿔났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프리랜서 등 방송사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2013년 한 드라마의 촬영 현장 모습이다. (위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프리랜서 등 방송사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2013년 한 드라마의 촬영 현장 모습이다. (위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이정민

하지만 회사는 2013년 2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계약 만료 통보를 한 것이다. "사업 실적이 낮아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댔다. 배씨는 곧바로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를 신청했다. 6월 지노위는 배씨의 손을 들어줬다. 24개월 넘게 SBS아트텍의 지시를 받고 일했기 때문에, 배씨는 이 회사의 직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7월 1일 이 회사의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학업을 중단한 학력 때문에 고졸 대우를 받았다. 그래도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는 배씨에게 매일 출퇴근 대면보고와 일일업무일지 작성 보고 명령을 내렸다. 이어 8월 말 해고를 통보했다. 정규직으로 복직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회사는 2년 전 배씨가 임시 인력 계약을 맺을 때 낸 이력서를 문제 삼았다. 학업을 중단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기재됐다는 것이다.

배씨는 회사의 보복성 해고조치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번에 정규직으로 입사할 때 정식 이력서를 냈고, 학력을 정확히 기재해 고졸대우를 받고 들어왔다"면서 "이제 와서 과거 임시 인력일 때 낸 이력서를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지적했다. 문 노무사는 "배씨는 학력이 아닌 과거 경력이나 성과에 따라 입사한 만큼, 과거 학력 등을 잘못 기재한 것을 두고 해고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례는 학력을 허위 기재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해고를 하는 것에 제동을 걸고 있다. 대법원은 2012년 7월 진합OSS 노동자들이 낸 부당해고 취소 소송 판결에서 "징계해고사유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근로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해고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면서 "이는 근로자가 입사 당시 제출한 이력서 등에 학력 등을 허위로 기재한 행위를 이유로 징계해고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경기지방노동위원회는 지난해 11월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배씨는 즉각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했다. 방송업계의 프리랜서들은 배씨의 싸움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방송사 프리랜서로 일하는 이들이 많은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 카페에는 배씨의 싸움이 소개됐다. 많은 이들이 방송국의 부당한 대우를 비판하면서 응원을 보냈다. 문영섭 노무사를 중심으로, 방송사 프리랜서 고용에 대한 수당·임금체불 권리구제 진정을 제기하기로 했다.

문 노무사는 "방송사들은 신규 사업을 위해 신규 직원을 뽑는 게 아니라, 프리랜서와 위탁 계약을 맺는다"면서 "신규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 위탁 계약을 끝낸다,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변칙적 고용형태를 유지하는 방송사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행동이 시작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SBS아트텍은 "현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진행 중인 사안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면서 "배씨와 관련해, 회사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방송사 프리랜서의 부당한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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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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