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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괄리어 요새 비탈길에 위치한 고파찰 파르밧(Gopachal Parvat). 자인교 티르탄카라(깨달음에 의해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24명의 성인)의 독특한 성상들이 들어서 있다. 연꽃잎 위에 앉은 자인교 23대 성자 빠르시바나트(Lord Parshvanath, 실제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는 가장 오래된 자인교 선구자)의 성상은 높이 14.3미터, 너비 9미터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한다. 바위 단 하나로 조각된 성상으로 알려져 있다.
 괄리어 요새 비탈길에 위치한 고파찰 파르밧(Gopachal Parvat). 자인교 티르탄카라(깨달음에 의해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24명의 성인)의 독특한 성상들이 들어서 있다. 연꽃잎 위에 앉은 자인교 23대 성자 빠르시바나트(Lord Parshvanath, 실제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는 가장 오래된 자인교 선구자)의 성상은 높이 14.3미터, 너비 9미터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한다. 바위 단 하나로 조각된 성상으로 알려져 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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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진."
"자이푸르에서 출발하는 건?"
"대기 200번 넘어."
"…. 조드푸르로 돌아갔다가 가는 건?"
"조드푸르에서 출발하는 건 대기가 길고…. 애초에 조드푸르로 가는 표조차 없어."

발이 묶였다. 며칠간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는 인도 우다이푸르에 갇힌 신세였다. 외진 곳에 있는 탓에 기차가 많지 않은 자이살메르를 떠나, 일단 우다이푸르로 와서 남쪽으로 가든 동쪽으로 가든 다음 행선지를 정하자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럴 줄이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어디로 향하는 기차건 2주간 모두 매진. 매진도 모자라 대기 번호가 100건을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

며칠을 더 기다려볼까. 며칠을 기다리면 남인도로 가는 기차에 자리가 날지도 모른다. 애초 계획이 남인도로 갔다가 스리랑카로 가는 거였으니까. 자리가 날 때까지 며칠이고 있다가 남쪽으로…. 아니야. 그렇게 남쪽으로 하염없이 갔다가는 다시는 북으로도 동으로도 못 가고 꼼짝없이 길이 막힐지도 몰라. 속박된 느낌이 싫다. 마음이 내키면 어디로건 갈 수 있는 자유를 되찾고 싶다. 계획이고 뭐고...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다르질링 좋다. 산으로 가자. 시원한 산으로 가자.

우리는 일단 여행을 시작했던 인도의 북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인터넷 카페에 앉아 기차표를 조회하고 또 조회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15번쯤 바꿔 경우의 수를 조합해 봤지만, 며칠 안에 탈 수 있는 기차는 한 대도 없었다.

서늘한 땀이 흘렀다. 침착해야 한다. 일단, 가는 길에 뭐라도 구경하고 가려는 마음을 비우자. 우리는 작은 인도 지도를 펼쳐 놓고, 이름이 표시된 도시를 모두 검색했다. 괄리어? 관광지로는 별로 조망 받지 못하는 곳이지만, 도시는 꽤 크다. 승산이 있다. 출발지 우다이푸르, 도착지 괄리어. 검색. 있다.

우다이푸르의 피촐라 호수.
 우다이푸르의 피촐라 호수.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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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점심을 먹을 때만 해도, 같이 앉은 여행자에게 남인도로 가겠다고, 그 후에 스리랑카로 갈 거라고 계획을 장황하게 늘어놨는데... 안 그래도 스리랑카에서 오는 길이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에 부풀었는데...

고민할 새도 없이, 기차역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딱 두 자리가 남았다고 하기에 얼른 샀다. 좌석은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것도 모자라 차량 번호마저 다르다. 그렇다고 안 탈 수는 없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괄리어다.

남인도에 정 가고 싶다면 네팔에 간 다음에 가면 그만이다.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여정이었다. 15시간이 소요되는 밤 기차를 타고 괄리어로 간다. 괄리어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7시 기차에 오른다. 귀한 하루를 기차에서 버린다. 밤 11시에 도착한다. 어디선가 밤을 묵은 후, 다음 날 아침 보드가야로 향한다.

3일. 무슨 짓을 해도,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지나갈 시간이다. 스스로를 달래봐도 앞으로의 여정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다. 괄리어로 떠나는 저녁 8시 기차를 타기 위해, 해가 떨어지기 전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기차역에 도착해 표를 다시 확인했다. 출발 22:00. 22시? 22시면 오후 8시가 아니고 10시인데? 3일의 여정에 두 시간이 추가다.

괄리어에서 마주친, 10배 크기의 벌거벗은 석상

딱히 뭐를 보자고 온 게 아닌 괄리어다.
 딱히 뭐를 보자고 온 게 아닌 괄리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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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리어로 가는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다. 기차 안에 해가 들었을 땐, 기차 칸에 남아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스틴과 나 그리고 우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남자 셋 정도다. 남자 셋은 내 주위에 둘러앉아 서로 차례를 지켜가며 질문을 퍼부었다.

"괄리어엔 왜 가죠?"
"어디서 잘 거죠?"
"어디에서 오는 길이죠?"
"여행은 왜 하죠?"
"네팔은 왜 가는 거죠?"

우리는 대충 대답했다.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낯선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믿으면 안 되는지, 인도에서 지낸 지 한 달이 넘은 지금에 와서도 잘 모르겠다. 낯선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피해망상에 스스로 피곤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마냥 믿을 수도 없다. 사기를 당하거나 해를 입는 건 한순간이다. 이 남자들, 믿을까 말까.

자신을 조심스레 감추는 우리와 달리, 남자 셋은 묻지도 않은 자신들의 신상부터 인도 사회, 정치에 관한 의견을 피력하기에 바쁘다. 괄리어로 대학을 다니는 젊은 남자. 그는 기차로 2시간 걸리는 통학 길을 매일같이 한다고 했다. 고향 집과 대학교에 각각 여자친구를 두고 사귄단다. 믿거나 말거나.

자이푸르에서 장사하는 중년의 남자. 괄리어에는 비즈니스 상 볼 일이 있어서 간다고 했다. 나름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그들에게, 인도 사회의 정치란 자신들과 아무 상관 없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했다. 우리는 감추고, 남자 셋은 털어놓고.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서로 따로 노는 인도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괄리어 요새 비탈길에 위치한 고파찰 파르밧(Gopachal Parvat). 26개의 자인교 성상이 한 줄로 들어서 있다.
 괄리어 요새 비탈길에 위치한 고파찰 파르밧(Gopachal Parvat). 26개의 자인교 성상이 한 줄로 들어서 있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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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뭐를 보자고 온 게 아닌 괄리어다. 피곤해서 종일 잘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니 피로도 다 풀려 버렸다. 지도를 펼쳤다. 볼거리라고 할 만한 것은 '괄리어 요새'. 가자. 릭샤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렀다. 잘못 내렸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요새처럼 보이는 곳은 요새가 아니며, 괄리어 요새로 가려면 릭샤를 다시 타고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일단 걸었다. 뭔지 모를 입구가 나왔다. 요새인가? 요새에는 입장료가 있다고 들었는데, 입구에는 아무도 없다. 안에도 사람이 없다. 뭐, 올라가 보지.

뜻밖의 광경! 복잡한 괄리어 도시를 바라보는 산 위에는, 사람 10배 크기의 벌거벗은 남자들의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수도 엄청나다. 벌거벗은 누드남들은 여기저기 파인 동굴 안에도, 바위 뒤에도 숨어 있었다.

누운 누드남, 앉은 누드남, 얼굴 없는 누드남, 10층 크기만 한 큰 누드남, 2층 크기만 한 작은 누드남 등 종류도 다양하다. 자인교 성상들이다. 우리는 위대한 고고학적 진실을 처음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연한 발견에 신이나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바위를 타고 10층 크기 누드남의 손까지 오른 더스틴이 소리쳤다.

"릭샤 타고 요새로 바로 갔으면 어쩔 뻔했어! 이곳은 우리가 발견한 거라고, 우리가!"

괄리어 요새 비탈길에 위치한 고파찰 파르밧(Gopachal Parvat). 자인교 티르탄카라(깨달음에 의해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24명의 성인)의 독특한 성상들이 들어서 있다.
 괄리어 요새 비탈길에 위치한 고파찰 파르밧(Gopachal Parvat). 자인교 티르탄카라(깨달음에 의해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24명의 성인)의 독특한 성상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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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괄리어까지 와서 요새를 찾다, 우연히 아무도 없는 이 자인교 성전으로 들어온 것이 마치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느껴졌다.

복잡한 도시에 숨겨진 은둔처와 같은 이곳에서, 우리는 몇 시간이고 우리만의 고독을 즐겼다.

"어떻게, 지금이라도 요새로 갈까?"
"…. 아니. 뭐 별거 있겠어? 요새는 누구라도 가는 거라고. 우리는 아무도 오지 않는 숨은 보물을 찾은 거야. 요새 따위!"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벽에는 괄리어 요새의 사진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아까 호텔을 나설 때만 해도 못 봤는데. 멋있다. 아주 멋진 요새다. 이거 뭔가 후회되는데. 요새에 뭔가 있었을까? 요새로 갔다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봤을까? 우린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걸까?

요새로 바로 갔다면 자인교 성당을 발견하지 못했을 텐데. 자인교 성당과 요새 가운데 어떤 게 더 좋은 구경거리였을까? 시간을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후회도, 지루함도, 모든 게 여행

새벽.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길을 나섰다. 피곤한 몸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나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다 내 업보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7시부터 밤까지 온종일 기차에 있어야 한다. 자이살메르에는 왜 갔을까. 까짓 낙타 사파리가 뭐라고. 옛 상인들처럼 대단하고 진귀한 여정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낭만적이고 대단한 여정은 개뿔. 돈 주고 하는 여행 상품일 뿐인데. 돈 주고 사는 경험이 진짜일 리 없는데. 동물원에서 돈 주고 몇 분 타 보는 낙타와 다를 게 없는데. 아, 그래도 사진 하나는 잘 나왔다.

1398년에서 1536년 사이 또마르 왕조가 지은 고파찰 파르밧의 자인교 성상들은 인도의 문화 유산 중에서도 독특한 건축한적 보물들로 여겨진다.
 1398년에서 1536년 사이 또마르 왕조가 지은 고파찰 파르밧의 자인교 성상들은 인도의 문화 유산 중에서도 독특한 건축한적 보물들로 여겨진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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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온 사진 몇 장 값이 이렇게 혹독할 줄이야. 낙타 사파리에 대한 계획을 지키느라 일이 이 지경이 된 거다. 그렇다고 계획을 게을리할 수 있나. 괄리어에 대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괄리어 요새도 못 보지 않았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획만 고집스럽게 지킬 수도 없다.

계획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괄리어의 자인교 사원도 볼 수 있었고, 또 우연히 발견했다는 기쁨이 더 크지 않았나. 결국에 여행의 기술이란, 계획과 무계획 그리고 계획의 이행과 불이행 사이를 줄타기하듯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인가 보다.

괄리어 고파찰 파르밧에서 마주한 뜻밖의 광경. 벌거벗은 누드남들은 여기저기 파인 동굴 안에도, 바위 뒤에도 숨어 있었다. 누운 누드남, 앉은 누드남, 얼굴 없는 누드남, 10층 크기만 한 큰 누드남, 2층 크기만 한 작은 누드남 등 종류도 다양하다.
 괄리어 고파찰 파르밧에서 마주한 뜻밖의 광경. 벌거벗은 누드남들은 여기저기 파인 동굴 안에도, 바위 뒤에도 숨어 있었다. 누운 누드남, 앉은 누드남, 얼굴 없는 누드남, 10층 크기만 한 큰 누드남, 2층 크기만 한 작은 누드남 등 종류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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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탄병'에 빠져 지난 시간을 원망해 본들 시간은 가지 않는다. 기차 밖에는 초록의 너른 밭이 펼쳐져 있다. 초록 바탕 위에 노랗고 작은 꽃들이 점묘화처럼 점점이 피어 있다.

그 길 사이를, 바구니를 이어진 분홍, 초록, 빨강 사리를 입은 여인네들이 걸어간다.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기차 차량과 차량 사이의 문 자리는 비어 있는 법이 없다. 문간에 걸터앉아 기차가 빠르게 스쳐 가는 인도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나도 조금 마음을 비워본다. 기차에 있는 이 시간을 저주하고, 지나간 과오를 후회하고, 원망하는 건 그만하자. 다음 도시로 가기 위해 기차에 있는 이 시간도, 존재하는 시간이다. 저들처럼, 기차가 부드럽게 훑는 대지의 따뜻함을 즐기면 그만 아닌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650루피의 차비와 사흘이라는 시간과 쓰라린 후회와 다음 도시를 향한 기대 그리고 마흔세 번의 카드 게임, 한 번의 싸움, 지루함, 세 개의 사모사, 다섯 개의 바나나가 필요하다.

길고 험난한 여정 후에는, 최소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동하면서 지루하고 힘든 시간은 빼고, 관광지에서 무엇을 하고 보는 시간만 여행이라도 할 것인가.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낙타 사파리에 대한 실패의 쓰라림도, 계획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가야로 가기 위해 길에서 버려야 하는 사흘간의 기차 여정도, 더는 먹고 싶지 않은 사모사도, 기차 밖의 풍경도, 씻지 못해 더러운 온몸도. 이 모든 게 여행이라고.


태그:#괄리어, #인도, #고파찰 파르밧, #자인교, #티르탄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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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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