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이 찬바람 부는 겨울날이면 설설 끓는 안방에 모여 앉아 식구들과 함께 만들어 먹던 만두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밀가루 반죽을 하고, 어머니는 만두를 빚고, 자식들은 주전자 뚜껑으로 만두피를 찍어내랴, 몰래 만두소를 먹느라고 나름 바빴다.
오래 전 유년시절의 일이지만 내겐 아직도 몹시 그리운 추억 속의 음식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사랑 표현에 서툴기만 했던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장 행복한 나날이 아니었나 싶다. 그 맛과 정겨움의 기억이 머릿속 창고에 차곡차곡 쟁여져 또렷한데, 다시는 그 맛을 볼 수 없는 애석함이라니···.
이 책 <풍년식탐>은 이렇게 찬바람 불고 마음이 스산할 때, 문득 인생이 허무해질 때, 서럽도록 그 시절이 그리울 때, 정신의 허기마저 따스하게 채워줄 애틋한 어머니의 밥상과 인생 이야기다. 저자인 황풍년 <월간 전라도닷컴> 편집장은 책 이름 '식탐'의 탐은 탐(貪)하려는 게 아닌 찾으려는(探) 시도란다. 돈 받고 팔 일도 없고, 누구한테 치사 받으려는 뜻도 없는, 그저 무심한 듯 차려낸 무수한 삼시 세끼의 이야기. 전라도 어매들이 차린 풍성하고 '개미진 밥상'이 저자가 탐하는 대상이다.
전라도 어매들이 차린 고봉밥처럼 수북한 밥상 이야기
그토록 순정한 엄니들의 애환과 아기자기한 지혜가 오롯한 밥상은 기실 엄니의 엄니, 저어기 윗대 할매의 할매로부터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민초들의 생활사이기도 하다. 비록 화려한 궁중의 수라상과 내로라하는 종가의 대물림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몸을 불리고 맘을 살찌워 온 소중하고 애틋한 식담(食談)이다. - 본문 가운데책을 읽다 보니 흔한 음식 책이 아니다. '영혼의 헛헛함까지 달래주는 질박하고 정직한 맛의 진수'를 선보인다더니 정작 저자는 유명한 맛집이나 식당을 찾지 않는다.
전라도 곳곳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거리며 엄니들의 소박한 밥상을 찾아다닌다. 아짐들과 함께 꼬막을 사러 함께 시장에 가고, 낙지를 찾으러 뻘에 들어가고, 산나물을 캐러 바구니를 끼고 들로 나간다. 이렇게 책속엔 상에 올라오는 음식뿐만 아니라 식재료를 찾는 과정, 만드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섬긴다."(삼봉 정도전) 그래! 아짐 역시 자식새끼들의 입에 들어가는 먹을 것이 기실 하늘이었으리라. – 본문 가운데구례 김정자 아짐의 새꼬막과 고치적, 완도 황성순 아짐의 해우국, 고창 김정숙 아짐의 노랑조개회무침과 김칫국, 남원 고광자 아짐의 나물전 등등. 책에는 다채로운 집 밥 음식과 함께 26명의 '아짐', 1명의 '아재'가 등장한다. <풍년식탐> 아짐들의 음식엔 과장이 없다.
"우리 집 식구들 음식이제. 내 놀 만한 음석(음식)이 아니여"라고 엄니들은 말하지만, 텃밭의 푸성귀, 뒤산의 나물, 마을 앞 갯벌의 조개, 동네 특산물을 가져다가 가족들 입맛에 맞춰 뚝딱 뚝딱 차려낸 음식들이야말로 영혼의 헛헛함까지 달래주는 맛의 진수였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솔찬히 재미지는 전라도 말의 성찬 "인자 저것을 다끌다끌 끼래. 점점 매생이가 물거져. 풀어지제. 뚜껑은 안닫아. 너무 팍 끼리믄 색이 노래진께." (매생이국 끓이는 방법 중)질 좋은 홍어애를 두고 김문심 아짐의 딸 주서영씨는 "봉께로(보니까) 때깔도 노릿노릿험서 낭창낭창헌 것이 존놈(좋은 것)으로 줬드랑께"라고 말한다. 홍어애를 보고 기껏해야 '야들야들'이란 표현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낭창낭창'이란 표현의 등장은 신세계다 - 본문 가운데 박정희 군사정권 때 정적 김대중을 시샘하고 증오한 나머지 시작된 전라도 차별 정책은 전라도 말에도 이어졌다. 흔하게 들리던 경상도 사투리와 달리 전라도 사투리는 방송에 나올 수 없었고 나오더라도 주로 조폭이나 도둑놈, 사기꾼들이 쓰는 말로 나왔다. 그런 일이 기득권층에 의해 수십 년을 이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전라도 말에 거부감을 갖는 어이없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연예인들이 TV에 나와 전라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이 책은 전라도 말이 욕지거리만이 아니라 음식을 요리하는 장면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지 감탄을 하게 한다. 책에 소개된 음식들만큼 그걸 만들어내는 아짐들의 입말들이 여간 구수하고 찰진 게 아니다. 어찌나 생생하고 발음하기가 솔찬히 재미있는지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책을 읽었다.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를 보는 것 같았다.
돼지고기를 사르라니 볶아, 죽순튀김은 놀짱흐니 꾸워야, 소금은 흩치듯 뿌려 젓고, 설탕은 '거짓말 매니로' 조금 끼얹으라··· <풍년식탐>은 음식과 말이 버무려진 흔치않은 레시피 사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입에 배기 어렵지만 두어 장 넘기다 보면 흡사 랩의 가사를 따라 부르는듯 입에 착착 붙는 전라도 사투리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책에 가장 자주 나오는 표현인 '개미진 맛'이란 맛에 있어서 보통 음식맛과는 다른 특별한 맛으로 남도 음식에만 사용되는 순 우리말이다.
<풍년식탐>이 보여주려는 것은 아짐이요, 어머니다. 전라도는 장소일 뿐 책의 주인공은 우리네 엄니의 손이다. 저자는 "우리가 진짜 숭배하고 기억할 음식은 궁중의 수라상, 종가의 대물림, 전국 팔도의 별미가 아닌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삼백예순날 무시로 밥상을 차려주셨던 어머니들 밥상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책 속에 저자 자신의 어머니 이름 세 글자와 함께 적어 놓은 글이 가슴속에 아릿하게 남는다.
"당신을 갉고 삭혀낸 눈물의 끼니끼니가 제 몸과 맘을 지어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풍년식탐> | 지은이 황풍년| 르네상스 | 2013-11 | 15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