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1570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1574년 2월 퇴계의 제자와 영남의 유생들이 퇴계의 문묘종사를 건의했고, 도산서당 뒤에 서원과 사당을 짓기를 청했다. 그 결과 1575년 여름 서원이 완성돼 낙성식을 치렀고, 곧 바로 도산서원이라는 선조(宣祖)의 사액이 내려졌다.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다. 그런데 글씨체가 일반적인 석봉체와는 다르다. 획의 중간에도 힘을 주는 삼절법을 사용해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
이 현판은 도산서원의 강당인 전교당 정면에 걸려 있다. 편액의 왼쪽에 있는 '만력(萬曆) 3년 6월 선사(宣賜)'라는 글씨를 통해, 선조가 1575년 6월 이 편액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도산서원은 퇴계의 제자와 후손에 의해 운영됐다. 퇴계의 수제자인 월천 조목, 종손인 이유도 등이 도산서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1615년에는 유림의 건의로 퇴계 외에 그의 제자인 월천 조목을 사당에 종향하게 됐다. 그것은 월천이 퇴계 사후 도산서원을 지키며 후학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월천은 1600년 퇴계 문집 간행을 주도했고, 문집 고성문(告成文)을 쓰기도 했다.
도산서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나는 도산서원을 살펴보기 위해 진도문(進道門) 쪽으로 올라간다. 진도문은 도산서원의 정문이다. 그리고 진도문의 양쪽으로는 동서 광명실(光明室)이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다. 광명은 '만권의 서적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萬卷書籍惠我光明)'에서 나왔다고 한다. 광명실이라는 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광명실이 동서 양쪽으로 있다는 것은 도산서원에 책이 그 만큼 많다는 증거다.
이곳에는 1217종 4017권의 책이 보관돼 있다. 동광명실은 1819년에 세운 건물로, 역대 왕이 하사한 서적과 퇴계 선생이 친히 보던 수택본(手澤本)이 보관돼 있다. 서광명실은 1930년에 중건된 건물로, 퇴계의 제자와 유학자들의 문집이 보관돼 있다. 이 중 퇴계의 수택본은 퇴계의 사상과 고전해석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다.
동서 광명실은 책의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2층 누각 형태로 만들어졌다. 1층은 8개의 기둥만 설치, 바람이 통하게 했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형태다. 진도문 앞으로는 전교당(典敎堂)이 자리 잡고 있다. 전교당 앞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고, 동재의 뒤쪽으로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그리고 전교당과 장판각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상덕사(尙德祠)를 만날 수 있다.
도산서원의 중심건물들
전교당은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 겸 교실이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보물 제210호다. 건물의 좌측에 남북으로 이어진 두 칸짜리 방은 원장이 거처하는 온돌방이다. 방 바깥 마루 쪽에 한존재(閑存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한존재는 여유가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건물의 가운데와 우측으로 이어진 6칸 마루방은 교육공간이다. 이곳의 벽면 상단에는 원규(院規), 잠언(箴言), 사제문(賜祭文) 등이 걸려 있다.
전교당 앞의 동재와 서재는 그 이름이 박약재(博約齋)와 홍의재(弘毅齋)다. 박약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로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지킨다'는 뜻이다. 홍의는 '(마음은) 넓고 (뜻은) 굳세게'라는 말이다. 전교당 동쪽에 있는 장판각은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이들 목판은 책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37종 2790장의 판각이 소장돼 있었지만, 지금 이들 자료는 모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되고 있다. 그러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안은 현재 텅 비어 있다.
상덕사 역시 삼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나는 담 너머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을 살펴본다. 그런데 정면 세 칸 앞부분 중 반 칸이 회랑으로 돼 있다. 사당 안쪽 정면에는 퇴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제자인 월천 선생의 위패는 동쪽 벽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들 중심건물 외에 보조건물로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복제본 가득한 옥진각
제수(祭需)를 보관해 두는 곳인 전사청과 서원 관리인의 살림집인 고직사를 지나 계단을 내려오면 옥진각(玉振閣)이 나온다. 옥진각은 1970년대 지은 유물전시관이다. 그런데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어서 도산서원의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옥진이라는 당호는 '금성옥진'(金聲玉振)에서 따왔다. 여기서 금성은 종소리를, 옥진은 옥경 소리를 말한다. 자사(子思)와 맹자(孟子) 등은 금성을 선(善)과 지(智) 그리고 인도(人道)로, 옥진을 덕(德)과 성(聖) 그리고 천도(天道)로 해석했다. 그러므로 옥진각은 덕과 성을 갖춘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전시관의 유물이 대부분 복제본이어서 문화재적 가치는 별로 없다. 단지 교육적인 면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 퇴계 유품으로 소반, 투호, 지팡이 등이 있는데, 진품인지 의문이 든다. 그리고 교지와 <성학십도>가 보인다. 그 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그린 도산서원도와 중국의 무이구곡도 복사본이 있다.
도산서원도 왼쪽 위에 보면 표암이 직접 쓴 화제가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표암에게 도산서원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표암은 퇴계의 업적, 서원을 보고 느낀 감정, 제작시기 등을 기록했다. 도산서원도는 산수화 형식 속에 낙동강과 도산서원 그리고 주변 마을 등을 비교적 자세히 표현했다. 그럼 성호 이익은 도산서원을 방문해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
성호 이익이 기록한 도산서원
성호는 1709년 도산서원을 방문하고 '도산서원을 알현한 기록(謁陶山書院記)'을 남긴다. 성호는 청량산을 방문하고 나서 온계리와 토계리의 퇴계 선생 유적을 둘러본다. 가는 길에 잠깐 농암 선생 유적인 애일당에도 들른다. 그리고는 도산서원과 도산서당을 둘러보고 상덕사를 참배한다. 성호는 도산서원 서재인 홍의재(弘毅齋)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영천군(榮川郡, 현재의 영주군)으로 떠난다.
"선생이 손수 창건한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여전히 여기에 있는데 후인들이 이어서 서당의 뒤에 서원을 건립하여 존봉(尊奉)하였다. 우리들은 말에서 내려 공손히 바깥문으로 들어갔다. 서쪽에 동몽재(童蒙齋)가 서당과 마주 대하고 있는데, 동몽재는 어린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곳이라고 한다. 다시 진덕문(進德門)으로 들어가니 또한 좌우에 재(齋)가 있는데, 동쪽은 박약재고 서쪽은 홍의재다.
가운데 남쪽을 향하여 강당을 두었는데 편액을 전교당이라 하고, 당의 서쪽 실(室)이 한존재다. 서원 내에 반드시 원장을 두었고, 그로 하여금 유생들을 통솔하며 항상 이곳 한존재에 거처하게 했다. 동서재인 박약재와 홍의재는 곧 유생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홍의재에 들어가 거재(居齋)하는 사인(士人) 금명구(琴命耈)를 만나서 원의 규모와 지명, 민풍(民風)에 대해 대략 들었다. 이어서 원노를 불러 사우(祠宇)의 바깥 정문을 열도록 하고 배알하는 절차를 상세히 물은 뒤 들어갔다. 사우에는 상덕사(尙德祠)라는 세 글자 편액이 높이 걸려 있었다. 또 남쪽 문을 열어 주어, 우리들이 뜰아래에서 엄숙히 참배했다. 그리고 서쪽 계단을 통해 가 몸을 숙이고 문지방 밖에 차례로 서서 사당 내의 제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왼쪽에 월천(月川) 조공(趙公)을 배향하는 신위만 있을 뿐이다." 퇴계학은 후세에 어떻게 전해졌을까
퇴계의 학풍은 직계 제자인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를 통해 계승됐다. 그리고 기대승, 이산해, 조호익, 황준량 등에 의해서도 확장됐다. 자료에 의하면 퇴계의 학풍을 계승한 유학자가 26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퇴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던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은 <퇴계선생행록>(退溪先生行錄)에서 퇴계를 주자 이후 제1인자라고 표현했다.
그에 의하면 주자가 세상을 떠난 뒤 도(道)의 정맥이 중원 땅에서는 이미 끊어졌다. 수백 년 후 퇴계가 나타나 박약(博約)과 경의(敬義)를 통해 주자의 도를 제대로 전했다. 동방에서 뿐 아니라 중원에서도 그와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퇴계는 실로 주자 이후 제1인자다.
퇴계학은 그 후 성혼, 이익 등에게도 전해져 실학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에서 퇴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놨다. 그리고 정약용은 <퇴계집>에 나오는 편지를 읽으며, 퇴계의 사상과 인간됨을 33장의 글로 정리했다. 그것이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인데, 그곳에서 다산은 퇴계 사상의 특징과 인간적인 측면을 자세히 기술했다. 퇴계가 박택지(朴澤之)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사람의 일신은 이(理)와 기(氣)를 겸비하였는데,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합니다. 그리고 이는 작위적이지 않지만, 기는 사욕(私欲)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의 실천을 위주로 하는 사람은, 기를 기름이 그 가운데 절로 있으니 성현(聖賢)이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기(氣)를 기르는 데에 치우친 사람은 반드시 본성(本性)을 해치기에 이르니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퇴계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근세 일본 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에도시대 일본에서 퇴계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목판으로 발간됐고, 퇴계는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의 학자들로부터 '주자의 직제자(直弟子)' '주자의 도통(道統)'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중국의 개화기 사상가인 양치차오(梁啓楚)도 퇴계를 '이부자(李夫子)'라고 불렀다. 퇴계학은 이제 세계적인 학문으로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