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
잘 지내시는지. 입춘이 지났건만 아침저녁은 아직 동장군의 시샘이 물씬 느껴지는군. 봄을 이기는 겨울이 어디 있겠나. 머지않아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 불현듯 찾아오겠지. 밖은 아직 어둡다네. 고즈넉한 세미나실에 홀로 앉아 친구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이른 새벽이 참 오붓하군. 바쁜 삶 속에 '카톡'으로 몇 마디씩 주고받던 근황 인사가 늘 아쉬웠는데.
나는 지금 한 인터넷 언론의 시민기자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 중이라네. 오마이뉴스에서 주최하는 오연호의 기자 만들기라는 프로그램(2.17일~19일)이지. 이 프로그램에는 사회적 글쓰기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네. 19세 대학 새내기에서 80을 바라보는 퇴임 대학교수까지. 농부가 있는가 하면 공무원도 있고 헤어디자이너에 방송작가까지 이 땅의 모든 직업군과 연령층을 모아 놓은 듯한 모임이네.
모임의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의 삶을 좀 더 알차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강행군 일정에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반짝이는 눈들이 그걸 증명하지. 특별한 의미가 느껴지는 것은 교육장소인 오마이스쿨이 폐교를 리모델링해 쓰고 있다는 점이네. 버려진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연수원이라는 거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꾸고 또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물씬 느껴지는 현장이라는 것과 뭔가 딱 맞아 떨어지는 않은가?
문득 후쿠오카에서 건너오던 여객선 안에서 처음 만나던 때가 떠오르는 군.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우린 쉽게 이야기가 통했지. 간간이 파도에 흔들리는 배에 몸을 맡기고 우리는 장장 5시간 동안이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가. 마치 오랜 동지를 만난 것처럼. 그건 동년배에게서 느끼는 친근함 만이 아니었네. 우리는 서로 상대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게 하는 신비한 끌림이 있었다고 생각하네. 팍팍한 우리네 삶에서 좋은 만남처럼 큰 선물이 어디 있겠나.
지난 연말 부산 찜질방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기억하나? 내 정년 후 첫 프로젝트 말일세. 일본의 농업관광 책쓰기는 자그만치 20년 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일이었어. 그 일을 갑자기 서두를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는 벤치마킹 모델인 다카야마씨의 건강문제 때문이라네. 연말에 다니러 갔을 때 그 분 얼굴이 많이 초췌해졌더군. 같은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은 사람 중에 남아있는 건 유일하게 자기 뿐이라며 대범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 담긴 안타까움이 뭉클하게 전해져서 마음이 아렸다네. 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데려 간다고 하던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마음이 조급해지더군. 그 분이 잘못되면 20년의 염원이 물거품이 될 거라는 것을 강하게 예감했네. 귀국하고 바로 직장에 1년 휴직을 타진했지. 집필휴직은 규정에 열거된 사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렵다고 하더군.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네. 명예퇴직이지. 그렇게 더 이상 뒤로 물러 설 수 없는 절박함으로 배수진을 치게 된 거라네. 내 삶에서 꼭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초등학교 때 끼니를 걸러 본 기억이 있는 50대 남자가 수입이 보장된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까 짐작할 수 있겠나.
50을 넘어서면서 주위에 지인들이 뜻하지 않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일을 종종 겪게 되면서 내게 남은 시간을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네. 제대로 된 삶이란 내 팔다리 움직이며 내 힘으로 살 수 있는 동안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침대에서 연명하는 시간이라면 100년을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평균연령 80을 종점으로 본다면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은 25년이네.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 생각하네. 스치듯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보면 25년은 오히려 짧은 거지. 명예퇴직이란 결국 안정된 수입을 포기하고 얻게 되는 5년의 천금같은 삶을 의미하는 것일세. 욕심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내 욕심은 내게 남은 삶을 좀 더 밀도있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에서 출발한 것이니 너무 탓하지 마시게나.
명예퇴직은 내게 광활한 우주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 일이었네. 로켓발사를 앞둔 우주선 선장의 마음이랄까.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네. 부품 하나라도 빠지면 발사를 연기해야 할 테니까. 발사가 연기되면 평생 계획이 물거품이 되니까.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은 가족의 생계 문제였네. 지난 1년간 농협통장의 지출내역을 전부 뽑고 평균생활비를 산출했네. 이 금액을 연금과 비교하며 앞으로의 삶을 가늠해봤지. 다행히도 아껴쓰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네. 그러니 행여 내 경솔함을 탓하지 말아주게. 지금보다 수입이 줄어들긴 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의 여유를 얻는 일이니 기꺼이 감수해 나갈 마음 준비를 하고 있네. 더 알차게 살아야 하겠지. 삶은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아닌가.
이번 오연호의 기자 만들기에 지원한 것도 도일 프로젝트 준비과정의 하나였네. 계획을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었던 것일세. 강의실에서는 언제나 질문이 풍성하고 사람들은 늘 활기가 넘쳤다네.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뿌듯하더군. 이곳에 오기를 참 잘 했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네. 친구도 기회가 되면 한번 와 보게. 글쓰기라는 주제를 통해서 스스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지 않으면 로켓은 예정대로 발사될 것일세. 목표한 일을 마치고 귀환하기까지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수많은 모험을 거치게 되겠지. 누구라서 미래를 알 수 있겠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깊이 생각하여 결정하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사는 것뿐이겠지.
세미나실 낡은 창문너머로 코발트색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군. 운동장 건너편에 서 있는 플라타나스 나목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네. 지난밤 늦어진 강의 뒤풀이의 여파인지 아직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군.
나는 고즈넉한 이 새벽시간을 좋아하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알찬 시간이기 때문이지. 삶에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생각하네. 인생의 그림 퍼즐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느냐 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겠지. 마지막 눈을 감는 날 내 삶은 아름다운 여행이었노라고 미소를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나. 앞으로의 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네. 잠시 건투라도 빌어주지 않겠나. 종종 소식 전하겠네. 다시 만날 때까지 늘 건강하시게.
덧붙이는 글 | 제49기 오연호의 기자만들기(2.17~19)에 참가하여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