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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육 년 전이라면 관조운이 비영문에서 막 출문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가형(家兄)의 급사로 낙담할 때였고, 관조운은 무를 버리고 문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본격적으로 유학 공부에 임하기 전이었다. 그는 집안의 불행과 형수 진진의 비극에 마음이 무거워 항시 무엇엔가 짖눌리는 듯 했다.

이제 자신이 장자가 되어 관가장에 들어가야 했지만 형수가 청상으로 있는 곳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저자거리에 거처를 구한 다음 한동안 헛된 세월을 보냈었다. 장부의 호방함을 기른답시고 산천주유를 하였고, 저자거리의 잡배들과도 교우를 하며 터놓고 지내기도 했다. 약관의 나이에 누구나 그렇듯 사뭇 비장함을 객기로 한껏 드러내던 시절였다.

그즈음 관조운의 저자거리 행각을 염려한 형수 진진이 금릉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시회(詩會)에 억지로 가입을 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풍류 운운하며 기방 출입이 잦았다. 그들을 따라 선유각에 몇 번 출입을 한 적이 있었다. 선유각은 기녀들의 기예와 시서(詩書)의 경지가 제법 높다고 이름이 난 기루이다.

어느 날 질탕한 주연이 파하고 집으로 향하려는 데 늙은 기녀가 관조운을 따로 불러 별채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다. 잠시 후 늙은 기녀가 들어오고 그 뒤에 어린 동기(童妓)가 따라와 다소곳이 섰다.

"이 아이도 이제 홍교(紅矯)가 될 때가 됐습니다. 저희들이 논의한 끝에 이 아이의 머리를 올려주실 분으로 관 공자님이 가장 적임자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홍교(紅嬌)는 막 기녀가 된 동기를 일컫는다. 정식으로 기녀가 되는 첫 치레는 손님과의 거래가 아닌 기녀의 뜻에 따르는 것이 기루의 전통이었다.

늙은 기생은 관조운의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을 닫고 나갔다. 기루를 출입하는 사내라면 누구나 바라는 행운이 손안에 들어왔는데 누가 내칠 것인가, 늙은 기생은 관조운의 의사도 묻지도 않고 나가버린 것이다. 관조운 그가 왜 선택되었는지 영문도 몰랐지만,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렇게 한 어린 여자의 첫 남자가 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소녀는 눈을 내리 깔고는 제 자리에 서 있다.

"앉거라."

관조운이 말하자 소녀가 맞은편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그물에 걸린 참새처럼 파르르 떨고 있다. 소녀는 장식으로 올려붙인 머리띠를 살며시 풀었다.

"관둬라!"

관조운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소녀가 흠칫하더니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소녀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소녀는 처음엔 머뭇거리며 말을 더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직나직하게 대답을 했다. 누군가 밖에서 들으면 연인의 속삭임처럼 나긋하게 들릴만했다. 관조운은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열일곱으로 삼년 전인 열네 살에 기루에 왔다. 그녀의 부모는 변경의 영하에서 살다가 난리가 나자 내륙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나 외지인이 적응하기에는 어디나 팍팍했고, 그 와중에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아래로 동생이 넷이나 있는 그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루에 왔다. 처음엔 심부름이나 하는 하녀로 지냈으나, 그녀를 지켜본 늙은 기녀가 그녀에게 기녀수업을 받게 했다. 그녀는 기녀가 되면 무엇보다 글을 읽힐 수가 있고, 다음으로 악(樂)이나 화(畵) 등 한두 가지의 기예를 익힐 수 있는 게 좋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일 뿐이다. 소녀는 그런 기예들이 결국 사내들의 노리개에 그칠 뿐이고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몹시 슬펐다.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는 갈수록 또렷한 목청으로 변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관조운은 이 소녀가 생각보다 당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가 마무리에 달할 무렵 갑자기 소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공자님께서 천한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저는 평생 공자님만 뫼시며 제 하찮은 생으로 보답하겠사옵니다."

소녀는 관조운의 첩이든 하녀이든, 무엇이 되든 상관없으니 자신을 기루에서 빼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기루에 몸값을 지불하고 기녀를 빼내오는 것은 용인되는 관행이었다. 관조운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허랑한 방황을 끝내고 관가장의 장자로 돌아가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치던 참이었다. 마음의 씻김이 필요했다. 그는 늙은 기녀를 불러 소녀의 몸값을 흥정했다.

며칠 후 그는 저자거리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약간의 관가장 재산을 보태 그녀를 기루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를 따라 오려는 소녀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엄하게 꾸짖었다. 자신은 따로 가야할 길이 있으니 상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 그녀의 이름이 진기련이었던가, 그때도 그녀가 이렇게 농염했었던가.

"소녀, 그때 관 공자님의 은혜로 새 삶을 얻었습니다. 임백원 대감님을 아시는지요?"

진기련이 아련한 추억을 떨치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금릉에서 어찌 임 대감님을 모르겠소."

관조운이 답했다.

임백원 대감은 병부의 시랑(侍郞)을 지냈고, 금릉 응천부의 승선포정사(承宣布政司)를 역임하고는 지금은 변방의 안위를 책임진 영하도독이 아닌가.

"소녀, 임 대감댁의 소실로 있습니다."
"호오, 그랬구려."

잘된 일이었다. 큰 대감집의 소실로 가면 가족들까지 먹고 사는 게 풍족할 수 있으니 많은 여인들이 정실이 아니라도 그 자리를 원했다.

"다행히 대감께서 소녀를 귀히 여겨 주셔서, 지금 부름을 받고 대감님의 임지에 가는 중입니다."
"그 먼 길을 어찌 마차 한 대만 달랑……"

"제가 주문한 비파가 늦어지는 바람에 저만 혼자 이렇게 뒤에 출발한 것이고, 본대는 여기서 두 시진 거리인 파양진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자 여인은 두 눈을 마주치기가 뭐했는지 비단보를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관조운은 적당한 때에 마차에서 내려 자신의 길로 가야 했다.

"제가 배탈이 나서 급히 볼 일을 봐야하니 마차를 세워달라고 하겠습니다. 매우틀(나무로 짠 휴대용 이동식 변기)을 사용해야 하지만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냄새 때문에 적당한 관도에 내려달라면, 마부는 아마 민망해서 제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공자님께서 빠져나가시면 될 것입니다."

여인은 비단보의 수를 만지작거리며 딴사람에게 얘기하듯 말을 했다.

관조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의 말대로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여인이 휘장 옆에 있는 수실을 잡아당기자 마차가 섰다.

"네, 마님. 무슨 하명이 있으신지요?"

마부가 물었다.

"수돌 아범, 여행을 앞두고 긴장했는지 내가 체했는가보오. 속이 거북해 볼 일을 봐야하니 적당한 곳에서 세워주시오."
"네, 마침 이곳이 인적이 없으니 딱 좋은 장소입니다. 그럼 저는 저만치서 혹시 지나갈지 모른 내왕객을 막을 터이니. 마님께서 편하게 일 보십쇼."

마부가 저만치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관 공자님. 저와의 인연은 여기까지겠군요. 부디 무양하기를 바랍니다."

여인이 나직이 말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공자님."

여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무릎에 놓인 비단을 걷더니 옆에 있던 문갑을 열었다. 그곳에서 옥과 비취로 된 패물과 은자 한 움큼을 집어 비단주머니에 넣었다.

"쫓기시는 몸이니 필요할 거 같아서……. 사양 말고 받아주시면, 평소 염원했던 저의 소원을 이루어진 걸로 여기겠습니다."
"부인, 거두어 주십쇼. 성문을 벗어나게 해주신 것만 해도 저한테는 한량없는 은혜인데…… 어찌 이런 도움까지."

관조운은 여인에게 이런 호의까지 받자니 자기도 모르게 사양하였다.

"아닙니다. 제가 공자님께 받은 은혜는 이보다 백배 천배 더합니다. 그러니 부디 저의 성의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쇼."

더 이상의 사양은 과공비례(過恭非禮)인 것 같았다. 관조운은 고마움을 무어라 표현할 길 없어, 다만 포권으로 예를 취하고는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무사하십시요, ……공자님."

관조운은 마부 쪽을 바라보았다. 마부는 멀리서 등을 진 채 다른 마차나 행인이 오는 가를 살피고 있다. 관조운은 풀숲으로 몸을 숨기며 다시 한번 마차를 돌아보았다.

여인은 관조운과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떨구더니 손에 들고 있던 비단을 살포시 입에 물고 고개를 숙였다. 풀숲에서 여치가 서너 마리 뛰쳐나왔다.

무영객은 은화사의 안거를 빠져나온 뒤 곧바로 후원의 담을 넘어 서생을 뒤쫓았으나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일단 은화사에서 일운상인이 임종하자마자 그 서생을 연행해서 심문을 했다는 것은 서생이 그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증거다. 자신이 어렵사리 탈출은 시켜주었지만 무영객은 그 서생이 누군지 몰랐다. 다행히 유학자의 고집스러움이랄까 혹은 어리석음이랄까, 서생은 자신이 누구라는 걸 밝혔다.

이름은 관조운이며 관가장 사람이라고 했다. 금릉에서 관씨 가문의 장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서생이 쫓기는 몸으로 관가장으로 갈만큼 어리석지는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그 자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일운상인이 맥없이 죽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그는 일을 맡긴 자에게 결과를 전해주고 자신은 대가를 받고 사라져야 하는 것인데.

무영객은 은가에서 있었던 대결을 떠올렸다. 왠지 송충이 눈썹을 한 자가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자가 검을 뽑는 순간에 뿜어 나오던 검기를 아직도 몸으로 생생히 느낄 정도이다. 그것은 자신이 강호에서 일을 시작한 이래 불과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앞의 두 번은 다행히 암습이 성공해, 그런 식으로 검기를 발산하는 자와 정면 승부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둠과 상대를 기만한 편법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창을 든 어린 녀석이 먼저 내지를 것을 알았다. 녀석이 숨을 들이키는 순간 공격을 예상했고 숨이 멈춘 순간 손을 뻗었음을 알았다. 그는 창에 찔린 것처럼 비명을 질러 상대를 착각하게 만들고는 바로 계단 위의 양도를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작전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대로 동쪽 통풍구로 향했더라면 틀림없이 송충이 눈썹의 검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결과를 어땠을까.

어쩌면……?, 그는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만약 그자와 밝은 곳에서 정면으로 대결을 펼쳤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자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런 계산은 그가 강호에 출도한 이래 처음이었다.

무영객은 일단 비영문으로 다시 잠입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비영문의 장문인으로부터 그 서생의 소식을 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덧붙이는 글 | 월,수,금 주3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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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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