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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희 기자의 '베트남 평화기행'을 매우 가슴 아프게 읽으면서 마침 그 시대 군대생활을 하며 파월자를 목격하고 쓴 단편소설이 있기에 독자들의 시대상 이해를 돕고자 찬조로 2회 송고합니다. - 기자의 말

새벽부터 부대가 발칵 뒤집어졌다. 3소대 파월귀국자인 김재수 병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제대를 불과 3개월 남짓 남겨둔 고참병이다. 3소대장 정 소위 말에 따르면, 그는 약간 정신착란증 증세가 있기에 여러 차례 중대장에게 후송을 의뢰한 자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대장은 그때마다 제대 날까지 내무반 감시나 불침번을 시키라면서 정 소위의 건의를 묵살했다. 그래서 그는 야간 잠복근무는 나가지 않았다.

그는 취침 중에 자주 악몽을 꾸는지 헛소리를 하거나 갑자기 벌떡벌떡 일어나곤 해서 같은 내무반 소대원들이 가위에 눌릴 정도로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늘 시뻘겋게 충혈 되어있었고, 또 대인 공포증도 있는 듯 비실비실 사람을 피했다. 때로는 한밤중에 막사 뒤 한적한 곳에서 혼자 중얼중얼 염불인지 주문인지를 외우기도 했다.

월남전이 한창인  1969년 당시 전방소총소대원들. 이 가운데도 파월자가 있었음.
 월남전이 한창인 1969년 당시 전방소총소대원들. 이 가운데도 파월자가 있었음.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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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귀국자

이즈음은 전입병 가운데 열에 한두 명은 파월 귀국자들이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모를 월남전 무용담이나 여자 헌팅 얘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자기 M16 소총으로 베트콩을 몇 명 사살했다든지, 사이공이나 다낭, 퀴논 뒷골목에서 콩까이나 각국 창녀들과 오입한 얘기를 게거품을 뿜으며 자랑했다. 그들 얘기를 듣노라면 베트콩 사살한 얘기를 할 때는 전투만 하다 귀국한 것 같고, 여자 헌팅 얘기를 할 때는 파월기간 중 내내 오입질만 하다 온 것 같았다.

매주 토요일 오전 중대 정훈교육 시간은 늘 그 소리가 그 소리인지라, 정작 정훈교육은 5분 이내로 끝내고, 입심 좋은 파월귀국자들의 무용담이나 콩까이 사냥담 경연장이 되곤 했다. 그런데 김 병장은 한 번도 그런 일에 나선 일이 없었다. 그는 파월귀국자라면 으레 가졌을 일제카메라나 트랜지스터라디오도 없었다. 그는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늘 말이 없이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중대장 당번병이 3소대 내무반을 뒤져 그의 사물과 관물을 챙기자 어느 것 하나 없어진 게 없었다. 그의 개인 화기 Ml 소총도 총가에 꽂혀 있었다. 그는 맨몸으로 부대를 떠난 것이다. 중대장 강 대위는 독사눈으로 '씨팔 씨팔' '쌍놈의 새끼' 등 욕지거리를 늘어놓으면서 3소대장, 선임하사, 내무반장을 일렬로 세워 놓고 무사고 중대의 기록이 깨진데 대해 분풀이를 하듯 그들 정강이에 조인트를 깠다. 그래도 중대장은 분이 삭아지지 않은 듯 불침번, 동초, 위병소 초병들을 속속 행정반에 불러들여 침대 각목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중대장님, 책임 추궁은 나중에 하시고 우선 찾아보시지요."

그제야 그는 조금 이성을 찾은 듯 전 중대원을 단독군장으로, 연병장에 즉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달! 각 소대 동작 그만. 지금 즉시 단독군장으로 중대 연병장으로 전원 집합한다!"

정문, 후문 초병을 제외하고 취사병까지 전원 집합했다. 중대장은 수색작전처럼 명령을 내렸다. 1소대는 심학산 기슭을, 2소대는 한강 둑을, 3소대는 교하 쪽을, 화기소대는 산남 들판 노루메 쪽을, 중대 행정반 요원들은 모터보트를 타고 한강 하류를 살펴보라고 했다.

"미친 새끼! 월북했을지도 몰라."

중대장은 투덜거리면서 행정반 요원들과 함께 모터보트장으로 갔다.

나는 소대원을 이끌고 강변으로 가서 철조망 문을 열고 1, 2분대는 철조망 안으로 3, 화기분대는 철조망 밖 강둑에 일렬횡대로 세워 수색을 해 나갔다.

"김 병장 때문에 오늘 오침은 다 틀려 뿌렀당게."
"탈영하려면 월남서 할 것이지 귀국해서 지랄이야."
"월남 콩까이 때문에 상사병 걸린 모양이데이."

몇몇 소대원들은 잠시도 입을 닫지 않고 푸념을 마구 쏟았다. 나는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시신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들의 시신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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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열흘 전쯤 내가 일직근무를 하던 날, 그의 소대 내무반 일석점호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따라왔다.

"2소대장님, 바쁘십니까?"
"점호만 끝내면 별로, 왜?"
"달빛도 좋은데 소대장님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싶습니다."
"청담?"
"네, 기왕이면 조용한 곳이 좋겠습니다."

엉뚱한 제의다. 녀석이 별난 놈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점호가 끝나면 무료한 시간이라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그럼 10분 후 내 BOQ(숙소)로 와."

나는 마지막 화기소대 일석점호를 끝낸 후 행정반 당번병에게 긴급한 상황이 있으면 내 숙소로 연락케 했다. 내가 숙소로 돌아오자 김재수 병장은 내 막사 앞에서 멀거니 보름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김 병장 들어와."

나는 숙소 거적문을 말아 올린 후 라이터로 램프 등에 불을 붙이려 했다.

"달빛이 좋은데 그냥 두시죠."
"그래? 그게 좋겠군."

나는 지포라이터 뚜껑을 닫았다. 무슨 일일까? 저희 소대장을 찾지 않고 나를 찾은 이유는? 군인답지 않게 청담이랬지. 내가 직업적으로 묻는다면 그는 말문을 닫을지 모른다. 기다리자. 김 병장이 스스로 입을 열도록.

"담배 태우나?"
"네."

나는 그에게 청자 한 개비를 건넸다. 나도 한 대를 빼물었다. 그가 성냥불을 붙여 먼저 내 담뱃불을 붙인 다음 돌아서 자기 담배에도 불을 붙었다. 담배가 백해무익이라고 아우성이지만 이럴 때는 담배가 제격이다. 두 사람 사이가 서먹서먹하다든지, 대화가 끊긴다든지, 마음을 가다듬을 때, 권태로울 때, 담배는 영약이다.

그뿐 아니라 담배 한 개비는 두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 주기도 한다. 고된 군사 교육 중 10분간 휴식 때 담배 한 대는 꿀맛이다. 나와 김 병장은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 가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침내 김 병장이 마지막 한 모금을 길게 빨고 꽁초를 바닥에 부비면서 입을 열었다.

선암사로 가는 길
 선암사로 가는 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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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최동수 이병한테 소대장님 얘길 들었습니다. 국문학과를 나오셨고 글을 쓰신다고 하기에 진작 한 번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그랬어? 아주 좋은 달밤이야."

나는 선문답처럼 대꾸했다. 나도 김 병장 신상은 대충 전해 들었다.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ㅅ예대 문창과를 중퇴한 다음 탄광에서 막장생활을 하다가 입대, 동부전선 최북단 88여단에서 근무 중 파월하여 1년간 전투생활을 마치고 잔여 복무를 마무리하고자 우리 중대로 전입해 왔다.

"소대장님,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그가 면담을 요청할 때부터 나는 다소 긴장은 했지만 느닷없는 의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너와 나 피차 군복을 입은 주제에, 밤낮 대남방송이 들리는 이 최전선에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인간은···인간은 말이야.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야."

나는 지극히 모호한 말로 얼버무렸다. 궁색한 내 답변이 겸연쩍어 슬쩍 그를 쳐다봤더니 김 병장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치 부여는 말한 사람의 자유이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을 수도 있을 테지. 그럼 김 병장은 어떻게 생각해?"

나는 대답이 궁색한 나머지 되물었다.

"저는 이제까지 인간은 신과 가깝다고 한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은 누구나 그 몸속에 야수를 숨기고 있다는 프리드리히의 견해에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 중 가장 저능아요, 가장 비열한 존재며, 우주질서를 파괴하는 한 오점이라 생각합니다."
"김 병장의 그런 인간관은 월남에서 전투를 치른 탓이겠지. 전쟁은 인간을 야수로 만드니까."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은 권력을 쥔 자들의 궤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있어요. 아마 한반도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전쟁 자체가 평화를 깨뜨리는데 무슨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말입니까?"

김 병장의 어투는 점차 격양돼 갔다. 나는 그의 감정을 가라앉히고자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권했다.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전쟁은 있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없어지지 않은 한 전쟁은 이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아."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인간의 치사한 이기심과 탐욕···저도 그 굴레를 벗어나질 못했으니까요. 탄광에서 막장생활을 해도 돈이 모이질 않았어요. 군에 입대한 후 그 전투수당이란 게 제 눈을 멀게 했습니다. 전투수당으로 받은 달러로 미군 PX에서 물건을 사 오면 한 밑천 잡을 수 있다는 탐욕 때문에 파월을 지원했습니다."

"왜 파월을 후회하나?"
"네, 자나 깨나 메콩강변 한 모녀의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택한 액운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죠."
"액운이라고?"
"네, 제가 선택한 길은 분명 액운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치유될 수 없는··· 이 시대에 태어난 자체가 액운이었습니다."

김 병장은 좀 전과는 달리 차분히 말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어느 탈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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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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